소설리스트

게임 속 아바타의 재능으로 동화율 돌파-177화 (177/204)

177화 테라퓨타 게이트 (2)

찬웅은 사실 정치에 관여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단순한 채용 비리가 아니다.

테라퓨타 선원 플레이어 채용 목적이 뭔가?

몬스터와 싸워서 세상 안, 세상 밖 침식을 막아 내는 것이다.

최소한의 신념과 목적의식 정도는 있어야지, 그렇지 않아도 공략이 어려워질 거라는데.

하지만 청탁을 통해 테라퓨타에 입성하려는 플레이어들은 염불엔 마음이 없고 온통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이 원하는 건 하나.

침식지가 정화되고 난 이후 받는 주신의 축복.

그리하여 혹시나 있을지 모를 각성과 랜덤 D박스 진(眞) 아이템 획득.

제 욕심만 채우려는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공략에 임하라고?

진짜 웃기는 건 따로 있었다.

특혜로 채용이 결정된 아바타들, 그들 중 상당수가 나이 지긋한 늙은이라는 것. 아바타로는 실제 나이를 알아볼 수 없으니.

돈과 권력은 충분하지만 늙음을 안타까워하는 노인네들.

각성하면 포스의 힘으로 건강해질 수 있고, 활력의 영약 같은 진(眞) 아이템을 뽑으면 젊음도 되찾고.

이 늙은이들이 용병 플레이어 아바타를 생성해서 동화율을 140%까지 올렸다?

제대로 돌파했을 리 만무하다.

민간 길드나 고레벨 도우미를 고용해 버스를 탔을 터.

사전에 봉쇄해야 한다.

아예 뿌리를 뽑아 엄두도 못 내게 해야지.

너그럽게 대해 주면 분명히 이런 일이 또 생긴다.

침식지가 게임 속 문제만은 아니라는 전 세계의 공감대가 형성된 지는 오래, 대한민국 정부도 알고 있을 테고.

알아서 움직여도 부족할 판에, 오히려 은폐하고 숨기려 해?

그래서 찬웅은 청와대에 왔다.

진짜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서.

반면 공포에 질린 한태수 대통령은 오금이 저려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상태.

케이라니!

물론 케이와의 만남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공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한밤중에 몰래 그가 찾아왔다는 것.

게다가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감싸 주려고 했을 뿐.

아니, 그게 큰 문제라도 되나?

“이, 이 밤에 무, 무슨 일이요. 공식적으로 요청했으면 얼마든지 만나 줬을 텐데.”

“만나 주신다고?”

황송하네.

사실 예전부터 요청이 있었다.

이왕 정체를 까발렸으니 청와대에서 대통령과의 공식적인 만남을 가져 보자고.

그러나 뻔한 수작.

자신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를 모를 리가 있나.

또한 정체가 알려졌다고 해도 아직은 만천하에 얼굴을 내비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공식적으로 만납니까?”

“으흠, 자네, 말이 조금 거친 것 같군.”

“아! 그래요? 그럼 둘 중 하나 골라 봐요. 말은 거칠게 행동은 부드럽게, 아니면 말은 곱게 행동은 거칠게.”

“…….”

“많이도 통화하셨더군요. 법조계 인사들, 여야 국회의원들, 오성, 대현, 세경 그룹 등등 재벌 회장들도…….”

“그걸 어떻게?”

“이 사람들 포섭해서 뭐 하시게? 빚을 지게 해서 퇴임 후에도 권력을 휘둘러 보시려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당황하는 한태수 대통령.

‘노회한 정치 요괴’, ‘분쟁의 해결사’, ‘협상의 달인’, ‘혓바닥 마술사’

모두 자신을 칭하는 별명들이다.

서로 마주 앉아 10분 정도만 대화를 나누면 철천지원수라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늘 자부해 왔다.

실제로 그랬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케이, 언제 어디서나 손가락만 까닥해도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저승사자가 눈앞에 있는데.

그래도 한번 해 보자.

정치판에서 구른 지 몇 년인가?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다.

살아온 세월이 자신의 반도 안 되는 이 어린 애송이 정도 설득하는 게 그리 어려울까?

“개인적 욕심 때문이 아니네. 난 대통령으로서 항상 국익을 먼저 생각해야 해. 그 사람들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라 처벌을 받으면 대한민국 정치 사회 경제에 혼란이 생겨서…….”

“지랄 똥 싸는 소리 하고 계시네.”

“…뭐?”

“사회 지도층이라, 그놈들이 누굴 지도하는지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 지도한다고 칩시다.”

“무, 무슨.”

“그런데 지도한다는 새끼들이 부정부패나 저지르고 다녀? 아! 범죄를 저지르는 방법을 지도한다는 건가?”

“…….”

말이 통하지 않는다.

대통령이란 권위는 쓸모가 없었다.

한태수는 바짝 얼어 버렸다.

그도 알고 있다.

일본과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물론 케이가 직접 한 일은 아니라지만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건 분명하니까.

“전에 제가 활력의 영약도 드렸는데, 그건 기억하고 계시죠?”

“하,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네.”

“아무래도 육체적으로 건강하시다 보니 다른 생각이 자꾸 나시는 것 같은데…….”

“처, 천만에! 오해야. 결코…….”

“그래서 준비했어요.”

찬웅은 인벤토리에서 돌돌 말린 종이 하나를 꺼냈다.

[진(眞) 마법 스크롤 : 맹약의 주문서]

흠칫! 하고 놀라는 한태수 대통령.

“…이건?”

익히 알고 있던 진(眞) 아이템.

지금도 여기저기서 쓰이고 있다.

개인 간의 약속 혹은 거래 시 이를 어겼을 때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마법 주문서.

“맹약 주문서를 왜? 내, 내가 약속을 해야 할 일이 있나?”

“걱정하지 마세요. 어려운 게 아니니까.”

찬웅은 한태수에게 스크롤을 건넸다.

“약속은 간단해요.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유지하는 동안, 모든 사안을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한 방식으로 처리하겠다……. 쉽죠?”

한태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저 말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법과 원칙에서 공정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럼, 아닌가요?”

“…야, 약속을 어겼을 때의 제재는?”

“활력의 영약 효과가 무효화될 겁니다. 그리고 자잘한 제재들, 탈모에 발기부전… 별거 없죠?”

“끄응.”

무참하게 구겨진 자존심.

차라리 맹약 주문서로 특별한 요구를 했다면 이렇게까지 부끄럽진 않았을 것이다.

법, 원칙, 공정.

대통령으로서 너무나 당연하게 해야 하는 것.

이미 취임식 때 선서로써 맹세한 내용.

“안 하실 겁니까? 그럼 다른 방법을 찾죠.”

“…하겠네.”

한태수는 맹약의 주문서를 찢으며 말했다.

찌익!

“나 한태수는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유지하는 동안, 모든 사안을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한 방식으로 처리하겠습니다……. 됐나?”

화아악!

자그만 빛 덩어리 하나가 한태수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찬웅도 씁쓸했다.

대통령이라면 뭔가 다를 줄 알았다.

법과 원칙.

공정과 상식.

이건 기본이다.

능력은 부차적인 것.

아무리 능력이 좋으면 뭘 하나?

그 능력을 이상한 곳에다 쓰니까 문제.

맹약의 주문서까지 사용했으니 잘할 것이다.

한태수는 능력이 있는 사람.

문득 드는 생각.

대통령이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공정과 상식도 없고, 심지어 무능하기까지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라 망하는 거지.’

나중에라도 그런 대통령이 나올까 무섭다.

* * *

한태수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그리하여 인정사정없는 사정의 칼날이 휘몰아쳤다.

<한태수 정부, 테라퓨타 게이트 관련자들 명단 공개>

<채용 비리 혐의로 남만기 대법관 전격 사퇴, 경찰은 구속영장 청구>

<표창주 대현 그룹 회장 검찰 소환 임박>

.

.

.

그 와중에 APS 내부에서 진(眞) 마정석 유통 부정까지 밝혀졌다.

창고에 보관된 진(眞) 마정석, 워낙에 개수가 많아 몇백 개쯤 빼돌려 봐야 티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뒤로 챙긴 마정석만 수억 원어치.

물론 형사 고발에 민사 소송까지 걸었지만.

허탈한 표정의 데우스칩.

“정말 이럴 줄이야. 실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 저 죽을지도 모르고 부나방처럼 달려드는군.”

“조금 부끄럽네요.”

“뭐, 여기나 저기나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순간!

“똑같기는! 엘프들은 그런 짓 안 해.”

“어?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이젠 죽일 놈도 없어서.”

어느새 중국에 갔다 한국에 온 에루인.

뭘 하다 왔는지 온몸을 명품으로 칭칭 휘감고 있었다.

“내가 대신 죽여 줄까?”

“누굴요?”

“침식지 정화에 걸림돌이 되는 아이들, 그냥 죽여 버리는 게 나아. 후환도 남지 않고.”

“…….”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는 엘프.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것엔 거리낌이 없는 엘프.

“…고생하셨으니 좀 쉬세요. 언제 다시 세상 안으로 돌아가실지 모른다면서요.”

“아! 알았어. 잔소리는, 참! 카드는 안 돌려줘도 돼?”

“마음껏 긁으세요. 한도도 없으니까.”

“고마워. 딸기하고 도연이하고 쇼핑이나 가야겠다. 데우스야, 너도 같이 갈래? 짐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해.”

그러자 벌떡 일어나는 데우스칩.

“어어, 그, 그래, 같이 가.”

쯧쯧,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데우스칩이지만 유독 에루인에게는 약하기 그지없다.

저런다고 사귀어 주기나 할까?

아무튼 모든 채용은 무효화됐다.

그럼 다시 뽑아야지.

공정한 방식으로.

찬웅은 최기병, 이필동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

“국가별로 진행하죠. 명색이 글로벌 게임이잖아요.”

“방식은……?”

“나이와 동화율, 스킬 숙련을 감안해서 한 국가당 10명에서 20명 사이로 인원 배분하고 만약 부정이 발견되었을 시 해당 국가 플레이어들은 모조리 퇴출하고.”

차라리 그게 낫다.

각국 정부들은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을 테니까.

철저하게 선별해서 뽑겠지.

“모든 국가에게 다 기회를 줍니까? 빼야 할 국가도 있는 것 같아서.”

슬쩍 찬웅의 눈치를 보며 물어 오는 최기병.

아마 일본과 중국을 말하는 거겠지.

“빼야 하는 이유가 있으면 빼야죠.”

자업자득이다.

사실 그들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그걸 잡지 않고 끝까지 더러운 짓을 해 댔으니.

“대신 APS 소속 용병 플레이어들은 총 채용 인원과 상관없이 계속 타는 걸로 해요.”

데우스칩과 함께 테라퓨타 공중도시를 시험 운영하고 공략에도 참가했던 APS 플레이어는 약 150명 정도.

이들은 숙련자들이다.

신규 플레이어를 가르칠 사람들도 있어야 하니.

“그럼 빠르게 진행합시다.”

“네.”

* * *

그동안 데우스칩은 마탑의 기동력을 플레이어의 포스로 대체하는 마법 문양을 곳곳에 새겼다. 포스를 불어넣은 장치도.

플레이어들은 노잡이 역할, 방출 스킬로 주입되는 포스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

“포스 방어막은 100명이면 충분하지만, 마탑을 움직이려면 최소 1,000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필요하네.”

“빠르기는?”

“환상적이지. 그러나 마정석도 있어야 해. 플레이어 포스는 가속의 역할을 하는 것뿐이야.”

“그래도 예전만큼 많이 들어가진 않겠죠?”

“당연하지. 90% 이상 줄였어. 또 남는 마정석으로…….”

츠릿!

데우스칩이 손짓을 하자 마탑에서 빛이 솟아올랐다.

“저건?”

“투명화 마법, 테라퓨타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스텔스 공중전함이 되는 거지.”

“…….”

스텔스 공중전함.

마법과 SF의 결합.

아무튼 본격적으로 마탑을 활용해 침식지 공략을 하려면 선원들의 손발을 맞춰 보는 것이 중요하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각국 플레이어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순간!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플레이어 한 명.

“미스터 케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이틀 피트였다.

“무슨 말을…….”

“어제 [애널서커]와 [로드 오브 머니]를 주축으로 하는 300명의 공격대가 침식지 공략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요?”

“작은 침식지였습니다. 늪 지형이고 보스는 독두꺼비.”

“실패하셨네요.”

성공했다면 전체 공지가 울렸을 터.

“실패야 늘 하는 거지만… 공략에 참가했던 일부 플레이어들에게 문제가 생겨서.”

“무슨 문제?”

“현실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

짐작이 간다.

플레이어 킬과 비슷한 방식인가?

“열 명은 쇼크 상태로 발견되어서 병원으로 이송됐고, 한 명은 가벼운 뇌출혈로 수술을 받았고, 또 한 명은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어… 다행히 제때 조치해 사망자는 없습니다.”

“그럼 총 열두 명인가요?”

“네, 그들 모두 보스에게 사망했고, 동화율 150% 미만의 용병 플레이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동화율 150% 이상은?”

“괜찮아요. 살짝 어지럼증이 있는 정도.”

이거였다.

게리 스탁턴이 했던 말.

앞으로 공략이 어려워질 거라는 언질.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아무리 반(反)시스템이라도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자원이 꽤 필요할 텐데.

그나마 작은 침식지라 망정이지, 군주가 다스리는 커다란 침식지라면?

‘죽을 수도 있어.’

놈이 무리했는지도 모르지만 효과는 상당할 터.

플레이어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

“일단 경고는 해 둘 생각입니다. 침식지 보스 공략은 잠정 중단할 거고…….”

결국 믿을 건 테라퓨타 마탑밖엔 없다.

마키나 공화국 올드 팩토리를 정화한 이유도, 데우스칩이 지구로 넘어온 이유도, 주신의 안배일 터.

실전된 옛 마법 문양과 지구 과학의 지식으로 마탑을 더 강화하라는 의도.

빨리 끝내자.

즐거워야 할 게임 플레이가 고통이 되면 쓰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