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게리 스탁턴 혹은 골드 드래곤 (2)
게임 속 NPC가 현실로 넘어오는 방식은 일종의 영혼 전이.
엘프 장로 에루인도, 데우스칩도, 드래곤도 예외 없다.
레지키쓰론도 그렇게 넘어왔다.
문제는 그렇게 될 경우 본신이 지니고 있던 능력 대부분을 포기해야 한다는 단점.
이미 뒈졌지만 레키지쓰론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도 플레이어들에게 드래곤 하트를 먹게 한 후, 그들이 받아들인 침식의 기운을 흡혈로 빨아들였다.
엘프 장로 에루인은?
시스템이 해결해 줬다.
진(眞) 세계수의 열매를 배송시켜서 그녀에게 복용시킨 것.
데우스칩도 영혼만 넘어왔다.
진(眞) 집사 골렘을 이용해서.
그의 경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데우스칩의 무기는 물리력이 아니라 지식이니까.
그리고 지금, 자신의 손에 의해 멱살 잡힌 게리 스탁턴, 공식 나이는 40대로 알려졌지만 20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앳된 얼굴.
하지만 그가 가진 힘의 정도는…….
‘브랜달과 비슷해, 아니 그보다 더 강한가?’
그에게서 짙은 마나의 기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고리가 깨어지기 전, 그러니까 9서클일 때의 브랜달과 말이다.
‘드래곤 본신의 힘은 아니야. 마법사… 영혼이 드래곤이라면 서클 마법이 아닌 용언 마법이겠네.’
그렇다면?
“왜 나한테 멱살을 잡힌 거죠? 충분히 피할 수 있었으면서.”
“…으음, 우호의 제스처라고 해 두지. 난 자네의 적이 아니라 친구니까.”
“초면에 무슨 친구.”
“에이, 섭섭한 소리. 그동안 서로 교감을 충분히 주고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설마 나 혼자만의 생각인가?”
찬웅은 피식 웃으며 게리의 멱살을 놓아 줬다.
“다음번엔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세요.”
“흐흐흐, 미안하네. 급한 마음에.”
“뭐가 그렇게 급해서?”
“알려 줄 것도 있고, 직접 얼굴도 보고 싶고.”
알려 준다는 것이 뭐길래.
“말씀해 보세요.”
“이게 이야기를 하자면 조금 기네만… 손가락을 이마에 짚어도 될까?”
“제 이마에?”
“어, 일종의 영상 전송 마법인데,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걸 편하게 관람할 수 있어.”
“으흠.”
게리 스탁턴은 영상 전송 마법을 시전한 적이 있었다.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 침식이 지구를 덮쳤을 때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보여 줬다.
그때는 그냥 동의도 안 구하고 손가락으로 짚어 버렸지.
미국 대통령 따위와 구구절절 대화 나누는 것이 귀찮았던 까닭에.
하지만 케이는 다르다.
사전에 이야기하고 허락을 구해야 한다.
“부탁하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나아.”
“내용은?”
“세상의 비밀. 여기까지 왔으면 듀플렉스가 어떻게 생겨났고, 또한 침식이 일어난 이유와 왜 그 게임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인제 와서? 처음부터 알려 주셨어야죠.”
“그때는 때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때가 됐고.”
그래, 궁금하긴 했다.
대체 듀플렉스 스페이스는 게임이 맞나?
아니면 많은 사람이 주장하듯, 다른 차원의 이세계?
“짚어요. 한번 봅시다.”
마침내 허락을 받은 게리 스탁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가 찬웅의 이마를 쿡 찍었다.
쏴아아악!
마치 3D 영화처럼 떠오르는 화면.
우주 공간에 푸른 행성 하나가 보인다.
행성을 도는 달 같은 위성도 있고.
‘지구……? 아니야.’
행성이라는 것은 비슷하지만.
‘아예 달라.’
특히 땅의 모양.
거대한 하나의 대륙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듀플렉스 대륙이구나.’
확실하다.
게임 홈페이지에 나온 대륙 전체 지도와 똑같다.
그럼 이 행성의 이름은 듀플렉스 행성?
행성은 점점 확대되었다.
문명의 모습이 보였다.
제국과 왕국, 황제와 왕, 기사와 마법사, 귀족과 평민, 인간과 이종족… 여지없는 게임 속 세상.
그러다가.
‘아!’
침식이었다.
끔찍한 파괴의 힘이 대륙을 덮쳤다.
처음엔 게임처럼 침식지의 형태로 대륙 곳곳에 또아리를 틀었다.
물론 대륙인들은 손도 대지 못했다.
접촉하기만 해도 침식이 되니까.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 갑자기 대확장을 시작하는 침식지. 천천히, 하지만 막을 수 없게끔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이 떨어졌다.
너무나 거대해서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는 빛.
‘특수 효과인가? 대단하네.’
순간.
쿠쿠쿠쿠쿠쿠쿠…….
하나의 대륙이 쪼개지고 갈라진다.
어떤 땅은 가라앉고, 어떤 땅은 솟아오르고.
바다와 호수가 생겨나고, 강이 흐르고.
변화하는 땅의 모양.
그런데.
‘…어?’
듀플렉스 행성.
‘이런!’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다.
‘지구였어?’
갈라진 대륙들.
아메리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호주.
순간 영상이 뚝 끊겼다.
동시에 옆에서 들려오는 게리 스탁턴의 음성.
“보다시피 지구와 듀플렉스는 하나였네.”
“나보고 이걸 믿으라고? 환영 마법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보장하죠?”
“이해해. 나도 세상 안에서 밖으로 나올 때 알게 됐지. 처음엔 역시 자네처럼 믿지 못했고.”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지구의 나이 45억 년, 뭐,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지만 1억 년만 해도 가늠하기 힘든 세월이잖아. 그 기간 동안 세상이 몇 번 망했다 다시 생겨났는지 어떻게 알아?”
사실 까마득하다.
인류의 기원이라 해 봐야 300만 년 정도.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들, 지구의 전체 역사를 정확하게 알 도리는 없다. 다만 이럴 것이다, 하고 추정만 할 뿐.
“케이, 자넨 신을 믿나?”
“…어림도 없어요. 신은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안 믿을 겁니다.”
찬웅은 기본적으로 무신론자다.
부모를 잃고, 고아 신세가 되고, 자신마저 사고로 장애가 되었을 때부터 그에게 신은 없었다.
“맞네. 지구엔 신이 없어. 정확히 말하면 있었는데… 없어졌지.”
어쩐지 처연해진 게리 스탁턴.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믿고 안 믿고는 자네 자유야. 그저 들어만 주게.”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침식, 그 수수께끼의 힘이 지구를 덮쳤을 때 주신은 결정을 내려야 했네. 맞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어. 주신의 권능마저도 잠식해 왔으니까. 그럼 두 가지가 남아. 포기하고 파멸하느냐, 아니면 피신하든가.”
당연히 파멸은 아니다.
“피신 말고는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지. 그리하여 신은 스스로를 희생해서 이 지구와 중첩된 차원을 창조해 냈네. 아직 침식되지 않은 모든 생명의 에센스, 즉 영혼만을 그리로 옮겨 지구에서 완전히 격리한 거지.”
게리 스탁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영혼뿐이 아니라 당시 세상의 인류와 이종족들이 이룩한 실제 문명의 생산물들도 모두 차원의 틈에 딸려 들어왔어.”
실제 물건?
설마 진(眞) 아이템이…….
“하지만 차원이 강제로 생성되는 후폭풍 때문에 원래 지구의 지형이 조각조각 나 버렸고.”
“그리하여 가상의 공간에서, 신에 의해 구원받은 영혼들은 생과 사 그리고 윤회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냈네.”
그곳이 바로 듀플렉스 스페이스.
허상이되 허상이 아닌 곳,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곳.
“그렇게 되자 지구를 파멸시켰던 침식의 기운도 사라지기 시작했지.”
“왜?”
“먹이가 사라져서 굶어 죽는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지구는 점점 깨끗해졌어.”
“그럼 다시 돌아왔으면 된 거 아니었어요?”
“흐흐흐, 영혼만 남았는데 어떻게?”
세상은 둘로 나뉘었다.
기존의 지구와 신이 새로 만든 차원.
“지구엔 다시 생명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네. 그 과정에서 신의 개입은 하나도 없었어. 신은 그저 관찰만 할 수 있었지. 변해 가는 지구의 모습을.”
“비록 실재하는 세상은 아니었지만 우리 차원도 평화로웠네. 그렇게 두 세상은 분리된 상황에서 각각의 문명을 발전시켰고.”
갑자기 표정이 침중해지는 게리 스탁턴.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아는가? 주신이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 세상을 옮겨 올 당시, 그 안으로 섞여 들어온 무언가가 있었어.”
…섞여 들어왔다고?
“설마?”
“맞네. 침식의 씨앗. 주신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고 작은.”
“아!”
“씨앗은 어느 정도 힘을 얻게 되자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어. 그 시점이 언제일까?”
“…5백 년 전이군요.”
“지구에서 나타났던 침식과 비교하면 턱없이 약한 수준이지만 그것이 점점 힘을 얻게 되면?”
“…….”
“세상 안을 파멸시킨 후, 다시 밖으로 나가 지구도 파멸시킬 것이 불 보듯 뻔했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서 대리인으로서 내가 나왔네. 침식이 커지기 전에 정화하고, 주신을 도와줄 이방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게 게임을 만든 이유인가요?”
“침식은 영혼을 가진 존재만 집어삼켜. 그런데 진짜 영혼은 밖에 두고 연결만 한다면? 캡슐을 이용해서 말이야.”
“…용병 플레이어가 침식에서 자유로운 이유군요.”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어쨌든 연결이 되고 있으니 침식의 위협에서 완전한 건 아니었어. 그저 지연하는 것뿐. 진짜 핵심은 아바타에 있네.”
아바타라.
“침식이라고 무적일까, 플레이어 아바타도 신의 권능으로 창조된 것, 침식과 자주 맞서다 보면 항체를 얻도록 설계했어.”
질병 예방주사와 마찬가지.
접촉해서 저항력을 얻는 방식.
“다시 말해 간접적인 영혼 연결을 통해 침식을 늦추고 그렇게 시간을 번 후, 완전하게 면역이 되도록 유도하는 거지.”
하지만 궁금증도 있다.
“…사도 빌런은?”
“인간의 자유의지에는 신도 간섭할 수 없네.”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미.
욕망에 영혼을 팔아먹은 자들.
이상할 것도 없다.
“현재 반(反)시스템, 즉 침식된 시스템은 궁지에 몰렸어. 현실에서 벌인 계획과 성녀를 이용해 세상 영혼들을 장악하려던 짓도 사전에 분쇄됐잖아.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예상되는 건요?”
“어쨌거나 반(反)시스템의 기반은 침식지야. 놈은 거기 집중할 걸세. 앞으로 공략이 매우 힘들어질지도 몰라.”
힘들어 봤자.
마탑도 손에 넣었고.
아무튼 침식지만 공략하면 된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세상 안도 구하고, 세상 밖도 구하고.
오히려 단순해져 더 좋다.
“그래서 뭘 줄 건데요? 보상이 있어야 열심히 하지.”
“하하, 지분을 모조리 넘겨주겠네. 듀플렉스 스페이스 회사 지분을 모두!”
“그건 필요 없고.”
“…아니, 왜? 회사를 통째로 넘겨주겠다는 말이야.”
그깟 회사 가져서 뭘 하게?
괜히 머리만 아프지.
“현실 말고 게임 안에서!”
“다, 달리 줄 것이 없어서, 드래곤 하트라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 있는 것도 온전하게 소화 못 해요.”
“아, 으음.”
당황한 듯 얼굴이 빨개지는 게리 스탁턴이었다.
“쯧, 엘리는 올 때마다 뭐라도 주고 가던데, 비교가 확 되네. 줄 거 없으면 코인이나 줘요.”
“…어, 얼마면 되나?”
“많이!”
앞으로 코인 쓸 일이 많다.
* * *
공중도시 테라퓨타 선원 모집이 공개적으로 실시됐다.
게임 속에서 만나 상태창을 공개하는 면접 방식.
면접 과정에서 선원들의 월급이 공개됐다.
└ 월급이 1,500코인이라네.
└ 미친! 그럼 1,000만 원이 넘어.
└ 와! 월 천! 나도 면접 봤는데.
└ 결과는 언제 나오지? 합격했으면 좋겠다.
한국을 너머 전 세계가 열광의 도가니.
돈도 돈이지만 공중전함에 탑승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혜택, 일을 해야 하지만 교대 근무가 끝나면 자유 시간도 주어지고.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잡음이 들려왔다.
제한된 인원을 뽑다 보니 탈락한 사람들의 불만이 상당했다.
그 와중에 터진 문제.
└ 나 동화율 145%인데 떨어졌다. 나 아는 놈은 갓 140%로 붙었고.
└ 이거 채용 기준이 어떻게 되는 거야?
└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면접 보기도 전에 붙은 놈들이 있다고 하더라고.
└ 엥? 혹시 비리라도 있는 거야?
└ 확실친 않지만 뒷배가 있대.
└ 씨발! 공정과 상식은 어디로 갔냐?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래서 자체 조사에 들어간 한국 APS.
이필동에게 물어보는 최기병.
“어떻습니까? 소문에 신빙성이 있어요?”
“네, 불행하지만, 그것도 국내에서만 문제가 생겼어요.”
“하아…….”
어째 불안불안했다.
이게 다 데우스칩의 선의 때문이다.
한국 국적의 대우석 박사.
가재도 게 편이라며 총 3,000명 채용 중 1,000명을 한국인 특례 채용으로 배분했다.
또한 보수도 매우 크다.
이번에도 데우스칩이 결정했다.
공중도시의 기동도 플레이어의 포스를 이용하기로 해서 선원으로 채용된 플레이어들은 한번 일할 때마다 자신의 포스를 모조리 불어넣어야 한다.
재미도 없고 힘들기도 하고.
물론 교대를 한다지만.
“여기저기서 청탁이 들어온 모양입니다. 저 윗선에서 압력도 들어왔고.”
“제기랄! 내가 단단히 일러뒀는데!”
“감시가 어려웠습니다. 자격 조건이랄 것도 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동화율 140% 이상만 되면…….”
“조건이 없기는 뭐가 없습니까? 이거 생각보다 힘들어요. 포스가 끊기지 않게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데, 성실하지 않으면 못 하는 일입니다.”
“그렇긴 하죠. 어떻게 처리할까요?”
순간!
대답과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사람.
벌컥!
“전수조사 합시다.”
찬웅이었다.
“그리고 한국인 특례 채용도 폐지하세요. 왜 폐지하는지 확실하게 알리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청탁한 사람, 청탁받은 사람, 압력을 넣은 사람. 혐의가 밝혀지면 엄정하게 처리하죠.”
“네!”
솔직히 별거 아닌 일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공정과 상식의 화두가 전국을 휘몰아쳤다.
폭풍의 시작은 아침에 현직 장관의 출근길 자택을 직접 찾아간 어느 너튜버 스트리머의 기습 질문에서부터 시작됐다.
“장관님! 테라퓨타에 몇 명 꽂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