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아바타의 재능으로 동화율 돌파-163화 (163/204)

163화 동화율 200%가 보는 세상

성녀(聖女) 하면 연상이 되는 특유의 모습이 있다.

단아하고 정숙하며, 온화하고 차분하며……. 물론 각종 장르 매체에서 흔히 알고 있는 성녀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비틀어 버리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다소 퇴폐적인 이미지의 성녀.

저기다 담뱃대 하나 꼬나물면 딱 어울릴 것 같았다.

아무튼 지금은 탐색전.

기묘한 눈빛으로 찬웅의 위아래를 훑는 성녀.

찬웅도 그녀의 몸을 속속들이 들여다봤다.

‘없네.’

침식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없거나, 아니면 가렸거나.

“어마! 부끄러워라. 왜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실까. 어딜 더 보고 싶으세요?”

“관심 없어. 어차피 그래픽인데.”

“으흥, 기분이 나쁘네요. 저 보고 그래픽이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구에는 저보다 못한 2D 그래픽을 사랑하는 인간도 많다고 들었는데.”

저 말은 또 어디서 들었나?

반박도 불가능하다.

“…됐고, 날 보자고 한 이유는?”

“우리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싶어서요.”

“새롭게 정립한다니, 처음 보는 사이에.”

눈웃음을 치면서 말하는 성녀.

“우리 피차 다 알고 있지 않나요? 탐색전은 그만해요.”

“난 정말 모르겠는데.”

“우린 변했어요. 보세요. 제게서 침식의 기운이 느껴지나요? 여기 이 신전에도, 저의 힘을 받은 성기사들에게서도.”

“…이건 거의 자백이군. 결국 침식과 한편이었다고 스스로 실토하는 거?”

“피이, 어차피 케이 님도 알고 왔으면서. 네, 맞아요. 예전엔 침식의 기운을 품고 있었어요.”

이젠 숨길 생각도 안 하는구나.

“그럼 넌 뭐였지? 군주였나? 아니면… 반(反)시스템?”

“전 몬스터가 아니랍니다. 우린 인간이고 은둔자였어요. 그분을 섬기며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그럼 침식지 군주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잖아. 그들은 왜 내버려 둔 거지?”

“걔들은 버리는 돌이에요. 변화에 탑승하지 못하고 도태된 버러지들. 새 판을 짜기 위해선 썩은 살은 당연히 도려내야죠. 안고 갈 필요가 있을까요?”

의리가 없네, 의리가.

결국 침식지는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깔린 패였다.

성녀를 비롯해 ‘우리’라고 칭한 세력이 숨겨진 패.

“후우, 같은 편에게 버려졌다니, 침식지 괴물들에게 불쌍한 기분이 들어.”

“원래 세상이 다 그런 거잖아요, 지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 우매한 개돼지들의 희생이 필요한 거죠.”

미친년이!

더럽게 기분 나쁘다.

한때 찬웅도 개돼지라 불리는 위치에 선 적이 있었다.

게임으로 인생이 역전되지 않았다면 여전히 개돼지였을 테고.

“그래서 이 짓을 왜 하는 거지? 대체 목적이 뭐야?”

“나가려고요. 세상 안은 이제 지긋지긋하거든요.”

“그냥 가만히 있는 건 어때? 움직이면 귀찮잖아.”

“에이, 나가서 좋은 세상 만드는 게 뭐가 귀찮다고. 세상은 달라질 거예요. 그 과정에서 희생이 생기겠지만….”

“누구더러 희생?”

“그야 당연히 지구죠. 우리가 밖으로 나가면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럴 줄 알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겠다는 수작?”

“흥! 과연 우리가 굴러온 돌일까요?”

“…무슨 뜻이지?”

“뭐,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을게요. 바로 제안으로 들어가죠.”

제안 같은 소리 하네.

그냥 여기서 끝내 버릴까?

“우리 쪽에 서세요. 뭘 하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조용히 계시기만 해도 케이 님의 권리를 인정해 드릴게요.”

“무슨 권리?”

“케이 님의 왕국을 다스릴 권리, 한반도까진 보장해 드릴 수 있어요. 물론 통일 한반도, 모자라면 만주와 연해주까지도 고려할 용의가 있고.”

여전한 개소리.

찬웅은 인벤토리 목록을 떠올렸다.

핵배낭 [구현율 : 15%]

안에서도 차곡차곡 구현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핵은 무리고.

“아무것도 안 하는 대가치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저 눈만 감으면 끝날 일.”

시끄러워 죽겠네.

“희생은 불가피해요. 곧 두 세계가 합쳐질 건데, 인간은 해당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세요? 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세상의 영혼 숫자만큼 지구의 영혼은 소멸할 거예요.”

그냥 저 입부터 막아 버릴까?

“세상이 합쳐지면 인간들도 합쳐져요. 하나의 육체에 두 개의 영혼, 그걸 빙의라고 부른다죠? 결국 둘 중 하나가 고착되겠죠. 사라지는 건 대부분 지구의 영혼들일 테고.”

찬웅은 거리부터 쟀다.

방이 좀 크다.

그래도 두 번의 순간 가속, 1초면 닿을 거리.

“여기로 눈 돌리지 말고 차라리 침식지 정화나 하는 게 어때요? 아니면 상자나 까든가.”

지금까지 무고한 NPC를 죽인 적은 없었다.

물론 침식된 존재를 제외하고.

이번에도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이놈들은 침식과 다를 바 없다.

파앗…….

먼저 한 번의 도약.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방 안 전체의 공기 흐름이 달라졌다.

‘응?’

위에서, 양옆에서, 사정없이 짓눌러 오는 가공할 압력.

무거워지는 몸, 느려지는 팔다리, 미끄러워지는 바닥,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정신 공격.

그러나 무시하고.

파앗!

또 한 번의 도약!

그러나 닿지 못했다.

성녀도 거리를 벌렸다.

“깔깔깔, 우릴 너무 우습게 보시는군요. 케이 님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 채 만나자고 했을까요?”

압력이 점점 거세진다.

하지만 이거 하나 풀지 못하면 어디 가서 드래곤 하트 먹었다고 이야기도 못 한다.

“흐읍!”

투둑! 툭!

포스에 의해 무력화되는 방 안의 압력.

팟팟!

순식간에 성녀와의 거리를 좁힌 후.

츠피릿!

강기의 도끼로 그녀의 머리를 그대로 찍었다.

그러나 이 방 안엔 그녀와 자신, 단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채앵!

어느새 앞을 막아선 성기사의 방패.

“영광입니다, 케이. 이제야 맞상대해 봅니다.”

“내 손에 목이 떨어지면 더더욱 영광이겠군.”

“그보다 제가 케이 님을 세상에서 3일 휴가 보내 드리면 어떨까요?”

죽인다는 말이다.

“싫은데? 그리고 네 주제에?”

“하하, 저도 분수는 압니다. 혼자선 불가능하죠.”

순간!

우르르.

밖에서 성기사들이 방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이 정도는 어떻습니까? 밸런스가 맞습니까?”

“…너무 많아. 조금 줄이자.”

“더 불러올까요? 황도 곳곳에 있는 기사들 다 부르면 한 100배 이상은 가능합니다만.”

쓸데없이 많기도 하다.

화사하게 웃는 성녀.

“그럼 남자들끼리 놀고 계세요. 전 야만적인 놀이는 싫어해서…….”

스슷.

방 벽면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드러난 컴컴한 동굴.

“다 끝나면 이리로 들어오세요.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요. 여기도 즐길 거리가 많으니까. 준비하고 있을게요.”

성녀는 동굴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파앙!

방패로 찬웅을 밀어내는 성기사.

“성녀님 말씀대로 함께 놀아 봅시다.”

갑자기 방 안의 압력이 더더욱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 영향은 오롯이 찬웅에게만 적용됐고.

“들어와!”

“한 수 청하겠습니다.”

한꺼번에 달려드는 성기사들.

대체 몇 명이지?

한 30명쯤 되나?

그리 좁지 않은 방이 가득 찼다.

채챙! 챙챙챙!

무수한 검격이 날아온다.

도끼로 쳐 내고 다시 반격.

때때로 뚝뚝, 끊기는 포스의 흐름.

침식과 포스는 서로 상극.

그러나 이 경우는 적용되지 않았다.

성기사들이 가진 힘은 포스가 아니니까.

거기에 모조 마탑의 디버프까지.

더구나 방 안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수많은 성기사의 합동 공격을 막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비겁한 새끼들, 한 수 배우겠다고 해 놓고.”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래도.

팟팟!

콰직!

“끄아악!”

찬웅의 별빛 가르기에 의해 사라지는 성기사의 머리.

츠피릿!

콱!

“큭!”

함몰되는 가슴.

하지만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성기사 새끼들은 광기 그 자체.

“행복하게 순교하라! 진실한 세상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믿습니다!”

도끼가 날아오면 몸으로 막고 검을 찔러 넣었다.

츠팟! 휘리릿!

동귀어진.

자신이야 죽든 말든, 어떻게든 케이에게 일 검을 가하겠다는 일념으로 덤벼왔다.

광신도가 이렇게나 무섭다.

이런 놈들이 3,000명 이상 있다고?

심지어.

웅얼웅얼.

방 한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는 몇몇 성기사들.

이 급박한 상황에서 무슨 기도?

하지만 곧.

촤아아아악!

불타오르듯 찬연하게 빛나는 성기사들의 몸.

자기희생 주문.

스스로 영혼을 불살라 평생에 걸쳐 쓸 힘을 한순간에 쏟아 내는 성기사 고유의 스킬.

“언제 나오나 했다.”

저게 없으면 성기사가 아니지.

자기희생 주문을 마친 일부 성기사들이 덤벼들면.

웅얼웅얼.

나머지 성기사들도 차례대로 자기희생 주문을 시전했다.

‘하아, 이 새끼들.’

고작 3일 동안 자신을 추방하겠다고 이런 일까지 벌여?

츠콰아아악!

태애애앵! 콰악!

강화된 성기사의 오러.

놈들의 몸이 새하얀 빛으로 불타오른다.

‘그래, 끝까지 가자.’

도망가는 건 자존심이 상해 못 하겠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지.

‘자원 재생 물약도 충분하고.’

다만 우려가 되는 것이 있다면…….

화아아악!

모조 마탑의 디버프 공격이 점점 강해진다.

한층 더 강화된 압력.

찬웅의 포스 대부분이 저 압력을 이겨 내는 데 소모되고 있었다.

‘X발!’

신전 건물을 둘러싼 모조 마탑의 개수는 25개.

이것들이 모두 자신에게만 집중한다면?

그땐 도망치든가, 여기서 죽고 3일 푹 쉬든가.

바로 그 순간!

[시스템 권한으로 아바타 관리 프로그램을 실행합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어?’

이제야 개입한 시스템.

그동안 뭘 하다가…….

어쨌든 드래곤 하트 흡수율이라도 올려 주려나 보다.

지금이 30%니까, 한 50% 정도?

그런데 몸이 버티려나…….

[가용할 수 있는 시스템 자원을 총동원해 1분간 아바타 케이의 동화율을 최대 200%까지 강제 돌파합니다.]

‘…뭐?’

동화율이… 최대치로 상승?

동시에 시야가 변했다.

오감도 급속하게 민감해졌다.

주르르르르륵!

흘러내리는 각종 숫자와 문자.

“아!”

보인다.

더불어 느껴진다.

자신의 아바타를 옥죄고 있는 문자열의 흐름.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들.

또렷하게 보이는 이 세상의 본질.

‘이건 모조 마탑에서 흘러나오는 건가?’

그 가운데 붉은색으로 표시된 취약한 연결 고리도 보이고.

서걱!

툭!

문자열 중앙이 싹둑 잘려 나갔다.

이것도.

서걱!

툭!

저것도.

서걱!

툭!

모조 마탑의 디버프가 사라졌다.

몸이 자유로워진다.

성기사들의 공격도 마찬가지.

자기희생 주문으로 강화된 그들.

몸 전체가 훤히 보였다.

모두 다 코딩으로 이루어진 가짜 육신.

그러나 머릿속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진짜 영혼.

적어도 영혼만큼은 문자열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자기희생 주문은 그 영혼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불타면서 점점 작아지는 영혼, 거기에서 출발해서 성기사들의 머리 아래 몸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

찬웅의 반격이 시작됐다.

잘라 낸다.

서걱!

“아악!”

프스스스.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성기사.

서걱! 썩둑! 서거거걱!

“허억!”

“꺼억…….”

“컥!”

쐐애액!

공격이 들어와도.

팟팟!

자연스럽게 피하고.

콰직!

눈에 보이는 붉은 부분을 도끼로 치면.

“크악!”

성기사들은 당혹스럽다.

케이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놈을 여기서 죽여도 3일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을 여기서 죽여야 했다.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니까.

소형 마탑의 도움 그리고 자기희생 주문, 이 정도면 무조건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는데…….

‘대체 무슨……?’

도끼로 디버프를 끊어 내?

게다가 자기희생 주문으로 강화된 자신들을 단 한 번의 동작으로 베어 넘겨?

츠피릿!

콰지직!

찬웅의 번뜩이는 도끼날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성기사들.

프스슷, 프스스슷

이것이 동화율 200%가 보는 세상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동화율이 육체 능력과 포스만 올려 주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드래곤 하트 흡수로 포스가 대폭 상승하자 동화율 돌파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시스템이 보여준 동화율 200%의 세계.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의미.

핵심은 동화율 돌파.

포스는 거들 뿐.

츠피릿!

콱! 콰지지직!

부서지는 너와 나의 연결 고리.

가루가 흩날린다.

그저 최단 경로로, 가장 약한 고리에, 핏! 하고 도끼만 휘두르면 끝.

프스스스, 프스스….

치오르는 고양감.

성기사 만 명이 덤벼들어도 상관없다.

팟! 팟! 팟!

순간 가속을 곁들여 한참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방 안엔 찬웅 혼자만 남아 있었다.

자기희생 주문의 성기사 30명이 소멸하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벽면으로 보이는 컴컴한 동굴.

성녀가 도망간 장소.

‘쟤만 죽이면 끝나나?’

물론 건물도 부숴야지.

그건 나중에 핵으로.

찬웅은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바타 케이의 동화율이 원상태로 복귀합니다.]

스르륵!

팟!

다시 변하는 시야.

무뎌지는 감각.

“하아.”

1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아쉽다.

여기서 끝낼 수 있는 건데.

‘그래도 들어가 봐?’

아니다.

동굴 안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고.

또 한 번 동화율 최대치의 기회가 주어질까?

그건 어려울 것 같다.

시스템 메시지에서도 알려 줬듯이 가용할 수 있는 시스템 자원을 총동원했다고 했으니.

하는 수 없다.

사냥을 통해 돌파하자.

‘넌 다음에.’

성녀는 신전 건물과 함께 보내 준다.

찬웅은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핵배낭 [구현율 : 17%]

100%가 될 때까지 기다리면 되고.

그럼 그동안은?

당연히 동화율 돌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