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아바타의 재능으로 동화율 돌파-160화 (160/204)

160화 무너진 방화벽

개발자 엘리가 세상 안으로 가는 방법은 플레이어들과 비슷하다.

그녀가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땐 사망한 지구 여인의 몸에 들어가는 빙의 형식이었지만, 그 후로는 캡슐로 접속했다.

게리 스탁턴이 지구의 과학 지식과 마법을 이용해 접속 캡슐을 만들고, 프로토타입부터 시작해 일반형, 고급형 모델의 시험 작동을 한 사람이 바로 엘리였으니까.

웨애애앵!

헤스티아 성국 대신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나타난 엘리, 요정왕 엘리하.

‘하아…….’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

대신전이 완전하게 침식됐다.

부서진 신전 건물 잔해, 기이하게 변해 버린 정원의 식물들, 도저히 평범하다고 여기지 못할 울긋불긋한 대지의 색깔 그리고 그곳을 점령한 몬스터, 침식된 흡혈박쥐, 변이된 만티코어, 석화 바실리스크, 독혈의 히드라.

‘회복이 불가능해.’

헤스티아 성국.

대륙민들의 성지(聖地).

동서남북으로 침식지에 포위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버텨 왔던 장소.

하지만 몰락했다.

성황마저도 죽임을 당했다.

아니면 침식당했거나.

‘방화벽이 무너진 거야.’

운영 시스템으로 따지면 대신전은 방화벽.

세상에선 주신의 신성한 권능이 닿는 곳.

이곳이 파괴되면 세상에 대한 주신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약화된다.

힘의 역전.

반(反)시스템이 득세할 여지를 준 것이다.

시스템과 반(反)시스템의 대결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까?

어떻게 하면 이기는 걸까?

간단하다.

세상을 운영하는 데 사용되는 ‘자원’의 할당량을 누가 많이 확보하느냐에 따라 갈린다.

‘대신전이 무너지면 반(反)시스템의 힘이 더 강해졌을 텐데…….’

그런데 의외로 조용하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기록을 봐야겠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 줄 존재가 하나 있다.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하는 존재.

바로 세계수.

그래서 요정왕 엘리하는 곧바로 로그드라실로 갔다.

거대한 나무가 보인다.

그 나뭇가지에 번데기 고치처럼 매달려 있는 구체, 아마 저 안에 에루인의 본체가 들어 있을 터.

엘리하는 세계수에 접촉했다.

[어서 오세요, 엘리하.]

“네, 반가워요. 기록을 열람하고 싶어요.”

[열람을 승인합니다, 엘리하.]

* * *

테라퓨타 마탑 입구 앞.

마탑주 브랜달을 위시한 고위급 마법사들과 마주한 찬웅.

마법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섞인 다른 복색의 사람들.

일단 침착을 유지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먼저 알아야 했다.

“하하하, 보고 싶었습니다. 잘 지내셨죠? 형님 세상은 평안한가요?”

“아니, 우리도 침식 때문에 힘들었거든.”

“아! 그랬군요. 그래서 10년 전 갑자기 이방인들이 사라진 거군요. 형님도.”

“다행히 잘 해결했어.”

“그야, 형님이 계시는데… 우린 그러지 못했어요. 이방인들이 사라지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헤스티아 성국 대신전도 침식당했어요. 그로 인해 대륙 곳곳에서 침식지 웨이브가 일어났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

헤스티아 성국의 침식.

대기실에서 대신전으로 가는 게이트가 사라진 이유.

“정말 절망적이었습니다, 우리도 침식될까 두려워서. 그때 그분이 나타나셨어요. 침식을 막아 주는 결계를 만들어 웨이브를 종식하고 대륙을 보호하셨죠.”

“그분?”

“네, 성녀님. 참누리 교단, 진정한 신을 모시는, 참된 신의 좋은 말씀을 전해 주시는 교구의 책임자분이시죠.”

참누리 교단의 성녀라…….

브랜달의 눈빛이 아련해진다.

그의 말투에서 성녀에 대한 신뢰가 철철 묻어났다.

그럼 세뇌? 아니면 현혹?

‘그럴 리 없어.’

브랜달의 로브에 새겨진 동심원은 9개.

9서클이라는 표식.

‘9서클 대마법사가 현혹이나 세뇌를 당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

그러고 보면 브랜달은 확실히 천재이긴 하다.

고작 10년, 그 짧은 기간에 9서클에 도달했다.

어쨌거나 세뇌가 아니라면 침식?

하지만 침식의 기운은…….

‘전혀 안 느껴져.’

그가 침식됐다면 보자마자 알았을 터.

브랜달이 가진 성녀에 대한 신심(信心)은 순전히 자발적인 것.

“그래서 성녀라는 분은 어디 있는데?”

“제국 수도에 계세요. 참누리 교단의 신전이 그곳에 있거든요. 알폰소 카라카스 황제가 성녀의 공을 인정해서 황도 폴른스타에 신전을 건설해서…….”

“잠깐! 카라카스 황제라고? 스타리아 황제가 아니라?”

“아! 그것도 모르셨구나. 카시우스 제국의 전대 황제 브랜든 스타리아는 다른 황자들의 반란에 의해 암살 당했습니다. 그래서 카라카스 공작이 반란을 진압하고 황위를 계승했어요.”

이건 또 무슨!

“황제의 후사가 없었거든요. 제국 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카라카스 공작이 적법한 계승자가 된 거죠.”

대체 10년이란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카시우스 제국 또한 마키나 공화국을 징벌하는 성전(聖戰)에 참여할 겁니다. 카라카스 황제가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춰서 병력을 보내기로 약속했습니다.”

“…….”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침식을 막아 낼 힘을 가졌다는 성녀, 헤스티아 성국의 자리를 대신한 참누리 교단에 대한 정보도 확보하고.

원래 듀플렉스 스페이스 세계에서 신은 하나, 아니 알고 보면 둘.

기존의 주신(主神)이 이런 일을 획책할 가능성은 없다.

‘새로운 신이라…….’

아마 반(反)시스템과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어떤 권능을 가졌을까?

일단 침식의 힘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기존 침식의 힘이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데.’

침식은 악취를 풍긴다.

그리고 악취를 풍기는 뻔한 독은 무섭지 않다.

무색무취의 알 수 없는 독이 무섭지.

‘혹시 침식을 다른 종류의 힘으로 변형해서…….’

가능성은 충분하다.

“형님, 이번 전쟁에 참여하실 거죠? 형님이 나서면 이방인들도 함께할 테니까, 참된 신께서도 이방인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실 겁니다.”

은근하게 물어 오는 브랜달.

그러나.

“글쎄, 그러고 싶진 않아.”

“…후우, 그럴 줄 알았어요. 형님은 이방인이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결정을 내리셔야 할 거예요. 이방인들이 나타난 이상 그들도 이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어요.”

“그래, 그렇겠지.”

이 전쟁의 배후에 반(反)시스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생각해 보자. 그것 또한 시스템.

시스템은 퀘스트의 주체다.

플레이어들은 두 종류의 다른 퀘스트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일.

두 편으로 분열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하지만 만약 휘말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내 선택은 이쪽이 아니야.”

“무슨……?”

“공격하는 쪽보다 공격당하는 쪽에 설 거야.”

“네? 서, 설마… 마키나 공화국에?”

“그러면 안 되냐? 난 너와도 친분이 있지만 데우스칩과도 교분이 있어.”

순식간에 안색이 달라지는 마탑주 브랜달.

“진심이십니까? 대륙이 위기에 빠졌을 때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는 데우스칩입니다. 10년 동안요. 그런데 마키나 공화국 편을 들겠다고요?”

“그건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야.”

“하아, 진짜 잘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형이 최강의 이방인이라지만 마탑과 제국이 참전하는 전쟁입니다. 이기는 쪽에 서세요.”

“이겨서 뭐 하게? 전쟁의 명분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지.”

바로 그때.

“역시 근본 없는 이방인이군. 티끌도 안 되는 놈이 감히 명분을 논해?”

새파랗게 젊은 자였다.

테라퓨타를 상징하는 로브를 입고 있지 않은 걸 보니 마법사는 아니고.

“브랜달!”

“…네.”

“저 새끼 누구야?”

“제, 제국에서 온 사절단입니다. 참누리 교단의 사제이시자 제국의 귀족으로서…….”

팟! 하고 사라지는 찬웅.

츠피릿!

어느새 나타난 도끼가 허공을 가르며 교단 사절단이라는 놈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혀, 형님!”

스웅!

순간 놈의 몸에 나타나는 진한 우윳빛 실드, 브랜달이 급하게 주문을 시전해 덧씌워 준 모양.

그러나.

와장창!

강기가 서린 도끼날에 9서클 마법사의 실드도 얇은 유리창처럼 무참하게 깨져 나갔다.

턱!

“헉!”

시퍼런 도끼날이 놈의 어깨에 걸쳐졌다.

9서클 마법사의 실드면 어쩌라고?

자신은 이미 전설급 NPC인 에루인의 경지를 넘어섰다.

“다시 말해 봐! 내 근본이 어떻다는 말이지?”

“이, 이런 오만방자한!”

“제국의 귀족이라면서 나를 모르나?”

“흥! 당신의 공작 작위는 박탈된 지 오래요.”

그런 것 같다.

이름표에 나와 있어야 할 작위가 사라졌으니까.

“그따위 작위를 말하는 게 아니야. 정말 날 몰라? 암살자 에루인의 제자이며 망령의 침식지를 정화한 날?”

“…….”

“근본 없는 이방인이라 불렀으니 진짜 근본 없이 행동해 주지.”

스슷!

시퍼런 도끼날이 놈의 목을 파고들었다.

“허어억! 자, 잠깐!”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던 차였다.

오랜만에 접속했더니, 빠르게 삭제된 10년에, 침식되어 버린 헤스티아 성국, 무슨 참누리 교단이 툭 튀어나오고, 변한 브랜달의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고.

그 와중에 브랜달이 케이에게 소리쳤다.

“대체 왜 그러세요?”

“넌 조용히 있어.”

“형! 진짜 내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저런 말을 이 상황에서 들을 줄이야.

“미치기 싫으면 공중 도시 진행 경로를 틀어. 마키나 공화국과 반대 방향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는 브랜달.

“그러지 마세요, 형. 전 형과 싸우기 싫어요. 저와 우리 마탑의 은인이시잖아요. 그리고 제가 존경하는 유일한 이방인이고.”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부탁이나 들어줘. 먼저 전쟁을 멈추자.”

“…전쟁은 저 혼자 결정한 게 아니에요.”

“그래, 네 입장도 이해해. 하지만 내 의지는 변하지 않아.”

싸워야 한다면 싸울 수밖에.

“정말 우리와 싸울 생각이세요? 마탑과?”

“필요하다면.”

솔직히 부담이긴 하다.

떠다니는 공중 도시, 그 자체로 최강의 마법 병기인 테라퓨타.

그러나 열대우림 공략 과정에서 지구의 전쟁과 무기를 경험하고 습득한 데우스칩이 마키나 공화국으로 돌아오면?

과연 마탑이 가진 최종 병기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브랜달은 고민했다.

9서클에 오른 자신의 마법 경지.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케이.

그도 강해졌다.

예전보다 훨씬!

싸우면 승패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적어도 거리를 허용하면 자신은 무조건 진다.

특히 그는 마법사의 천적.

순간 가속 스킬로 짓쳐들어오는 그의 빠른 접근을 막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케이는 마탑의 은인.

브랜달도 염치 정도는 가지고 있다.

“…알겠어요. 공중 도시 진행 속도를 늦춰 볼게요. 대신 그분은.”

“그래. 한 번은 봐주지.”

찬웅은 놈의 목에서 도끼를 거뒀다.

“어허허허.”

다리가 풀린 듯 털썩 주저앉은 제국의 젊은 귀족.

브랜달이 한숨을 쉬며 찬웅에게 말했다.

“후우, 대신 저하고 약속 하나만 해 줘요.”

“뭘?”

“카시우스 제국으로 가서 참누리 교단의 성녀님과 한 번만 만나 주세요.”

“알았어. 어차피 만날 계획이었으니까.”

씁쓸하다.

변해 버린 브랜달.

물론 10년이라는 공백이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마탑주 브랜달과의 만남은 끝났다.

다음은 마키나 공화국으로.

대비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 * *

세계수가 수집한 10년 동안의 기록을 열람 중인 요정왕 엘리하.

‘역시…….’

먼저 대신전, 방화벽이 무너진 시점.

의외로 오래되지 않았다.

‘열대우림 침식지 공략 직전이었어.’

그러니까 폭격이 시작되기 전, 방화벽이 무너지고 반(反)시스템이 기존 시스템이 가지고 있던 자원 할당량의 상당 부분을 확보하긴 했는데.

‘그 자원을 어디에 썼지? 흐음… 일부는 침식의 힘을 외부로 반출해 열대우림의 안테나로 공급됐고.’

또한 일부의 자원으로는…….

‘새로운 운영체제를 만들어 냈구나.’

프로그램을 새로 짰다는 의미다.

하지만 침식의 기운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침식이 아닌 전혀 생소한 힘.

‘가면을 썼어.’

지금까지 세상을 괴롭히고 위협했던 침식은 일종의 랜섬웨어 혹은 악성 바이러스와 같은 놈이었다.

시스템에 기생해 자원 할당량을 가로채서 감염시키는 행동밖에 못 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독자적인 시스템 구축을 가능케 할 힘을 손에 넣었다.

‘대신전의 부재를 틈타, 신흥 종교를 만들었고.’

세상의 시간을 10년씩 스킵 한 것도 반(反)시스템.

목적은 새로 짠 프로그램, 즉 신흥 종교를 고착화하여 세상에 뿌리 내리게 만든 것.

‘하지만 무리했네.’

시간 조작은 법칙을 거스르는 일, 반(反)시스템은 대신전을 소멸시켜 얻은 자원 할당량의 남은 부분을 10년 스킵에 모조리 다 소모했다.

‘모험을 걸었구나.’

수긍이 간다.

세상을 제 입맛대로 변화시키려고 할 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케이, 케이 때문이지.’

케이가 변수로 작용할 싹을 잘랐다.

그가 접속해도 이미 10년이 지난 뒤니까.

케이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는 일, 충분한 가치가 있다.

케이가 없는 틈을 타 신흥 종교가 듀플렉스 전체에 퍼지게 하고 대륙의 영혼들이 기존 시스템 대신에 반(反)시스템을 신봉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반(反)시스템의 영향력은 점점 더 확대될 터.

“하아, 미친!”

이건 악몽이다.

세상이 망할 뿐 아니라 지구도 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반(反)시스템이 각성 플레이어들의 아바타 정보를 삭제해 버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각성 플레이어의 능력은 사라진다.

케이도 피할 수 없다.

그냥 일반인이 될 터.

‘더불어 침식을 따르는 사도 플레이어들의 아바타 정보는 그대로 유지하고…….’

새로운 힘을 가지고도 침식을 그대로 둔 이유가 뭐겠나? 세상 밖으로 침식을 내보내면 지구는 그들의 손에 넘어간다.

‘하아, 케이를 만나 봐야겠네.’

이제부터는 싸움의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상대해야 할 적이 늘었다.

세상은 분열됐다.

5백 년 전 대륙 대전쟁 당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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