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실을 위한 선택 >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 중 하나인 열대우림.
빽빽한 밀림과 뱀이나 독충 같은 것들 때문에 평소에도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런데 침식까지 당했다면?
그 안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게다가 많고 많은 다양한 형태의 침식지가 존재하는 게임 안에서도 열대우림과 같은 환경은 없다.
정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상황.
찬웅은 데우스칩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저 안에 숨어 있을 거라 예상되는 군주는 둘, 레지키쓰론과 부정한 물의 정령왕이다.
하나만으로 힘든 판에 둘씩이나.
일단 기다려보자.
뭐라도 알아낼 때까지.
이건 베이징 침식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거대한 열대우림.
침식의 결과로 빚어지게 될 결과를 생각하면···,
결론적으로 지구가 공동으로 대응해야 할 문제.
숨길 이유도 없었다.
동시에 터져 나온 언론 속보.
<아프리카 가봉 열대우림 지역 대형 침식지 발생.>
<지구의 허파가 침식당했다. 침식된 면적은 약 100제곱 킬로미터.>
<확산은 멈춰, 그러나 언제든 확산할 가능성 있어>
<가봉 여행 금지 지역으로 지정.>
<가봉 대통령 전 세계에 지원 호소.>
이제 모두가 알게 됐다.
“원인이 뭐든 지구에 닥친 문제입니다. 자칫하면 지구 전체가 침식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전에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의 유엔 연설과 동시에 미군과 나토의 전격적인 참전 결정, 반드시 침식을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각성 플레이어의 역할은 엄청나게 중요해졌다.
침식지 안에서, 혹은 주변에서 필요할 때 투입될 수 있는 인력은 오로지 각성 플레이어들 뿐.
국가에 소속된 각성 플레이어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 미국, 유럽연합, 호주, 싱가폴 등 동남아시아, 중동지역···,
하지만 모든 각성 플레이어가 다 국가소속은 아니다.
또한 각성 플레이어라고 해서 모두 다 침식지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 ※ ※
남아메리카 브라질 리우.
만약 이곳에서 플레이어가 각성하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국가 소속으로 빠지는 건 극히 드물다.
별로 대우가 좋지 못하니까.
그냥 조용히 숨어지내거나,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는 국가로 귀화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각성으로 얻은 힘을 이용해 빌런의 길로 빠지거나.
실제로 브라질 리우의 마약 조직에 각성 플레이어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니나 페레즈는 모델을 꿈꾸는 브라질의 평범한 20대 여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델 학원을 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이 다 죽어 있었다.
목이 잘려 참수당한 채로.
아빠, 엄마, 아직 학생인 남동생도.
거실 벽에 가족들의 피로 쓰인 글.
‘혀를 함부로 놀리지 마라.’
기자 직업을 가진 그녀의 아빠.
브라질 리우 빈민가를 지배하는 각성 플레이어 마약 조직에 대해 심층 취재를 하는 중이었단다.
니나 페레즈는 모델의 꿈을 접었다.
대신 가족에 대한 복수.
하지만 어떻게?
아빠가 일했던 신문사도 두려움에 입을 닫았고, 지역 경찰도 한통속, 심지어 정치인들까지.
브라질은 썩었다.
그런 그녀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은 바로 각성 플레이어가 되어 직접 복수를 하는 것뿐.
아빠의 유산을 탈탈 털어 캡슐을 구입했다.
접속 제한 시간을 제외한 모든 자원을 게임 플레이에 투자, 무조건 동화율 돌파에만 자신을 갈아 넣었다.
그러나 그토록 노력했지만 반영률 스탯은 생성되지 않았다.
하긴, 각성이 마음만 먹는다고 될 거였다면 세상은 각성 플레이어로 넘쳐났을 터.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카시우스 제국 망령의 침식지를 공략한다는 케이의 SNS, 니나 페레즈는 즉시 길드에 가입해서 크자누이 공격대에 참여했다.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크자누이가 죽으면 축복이 내린다.
그 축복을 받아 각성 플레이어가 된다.
그녀의 절실한 염원은 응답을 받았다.
네크로맨서 크자누이가 죽고, 축복을 받아 마침내 각성 플레이어가 된 것.
남은 건 복수.
니나 페레즈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갓 각성했다고 섣불리 뛰어들면 가족의 복수를 하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었다.
복수할 대상은 마약 갱단 각성 플레이어.
그래서 더 열심히 게임했다.
동화율과 반영률을 돌파하면서 상자도 까고, 차근차근 준비했지만···.
갑작스러운 게임 긴급 점검.
기약 없는 기다림.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복수를 실행하고야 말았다.
브라질 리우의 마약 조직 갱단, 가족의 원수, 조직원들을 한명 한명씩 죽여 나가는 와중에, 결국 갱단의 간부와 마주했다.
갱단의 간부, 호세 안티구아도 각성 플레이어.
역부족이었다.
보스도 아니고 중간 간부가 각성자.
숨을 헐떡이며 놈을 노려보는 니나 페레즈.
“헉헉, 이, 개, 개 같은 새끼!”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지? 이유나 들어보자. 왜 우리 애들을 죽인 거야?”
“닥쳐! 버러지야!”
“뭐? 이년이···,”
그러자 옆에 있던 조직원이,
“그 기자의 딸년입니다.”
“기자라니···.”
“우리 조직에 대해 탐사 보도 기사를 기획했던 리카르도 페레즈 기자.”
“아! 그놈?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는군. 딸 하나를 놓쳤다고 했나? 그게 저년이란 말이지.”
“네. 맞습니다.”
니나 페레즈는 불의의 일격을 당해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호세.
“흐음, 그러고 보니 각성 플레이어는 한 번도 못 먹어봤네. 무슨 맛인지 궁금하잖아.”
그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머릿속엔 이미 도주 경로가 그려져 있었다.
“끌고 와!”
“위험합니다. 그래도 각성 플레이어입니다. 차라리 지금 죽이심이.”
“괜찮아. 저년은 이미 끝났어. 어차피 제대로 힘을 쓰지도 못할···,”
벌떡!
타닷!
빛살처럼 빠르게 달아나는 니나.
“잡아!”
휘릿!
죽을힘을 향해 도망쳤다.
“아직 움직일 힘이 있었나? ···흥, 그래봤자지.”
호세는 천천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어차피 죽을 것이다.
자신이 익힌 스킬.
[하트 브레이커]
곧 심장이 멈출 터, 멈추기 전에 맛이나 보면 더 좋고.
타다다닷!
필사적으로 달리는 니나.
여기서 잡힌다고?
죽는 건 무섭지 않다.
가족의 복수를 끝내지 못하는 것이 두려울 뿐.
브라질 리우 빈민가.
복잡하고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마침내 집에 도착한 니나 페레즈.
여기라면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 그 지하에 위치한 거처.
“하악, 하악, 하아···.”
심장이 쪼개질 듯 아프다.
“야, 약이···,”
서랍을 열어 진통제 몇 알을 꿀꺽 삼키고.
여기서 몸이 회복될 때까지 조용히 지내다 다시 복수에 뛰어든다.
‘대체 언제 서버가 열릴까?’
너무 서둘렀나?
동화율을 좀 더 높이고 복수에 뛰어들었다면···.
니나는 스마트폰으로 가상현실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러나 긴급 점검 해제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아프리카 가봉에서 일어난 침식에 대한 이야기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녀가 바라는 건 오로지 복수.
니나는 캡슐을 열었다.
안에 누워서 전원을 켜봤지만 여전히 접속 불가.
조여오는 심장의 통증.
환영처럼 보이는 가족들의 모습.
아빠, 엄마, 그리고 동생···,
‘···미안해.’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곧 죽을 것임을.
마약 조직 간부, 호세 안티구아.
놈은 강했다.
심지어 스킬까지 갖춘 고레벨 플레이어.
진통제의 영향 때문인지 솔솔 잠이 온다.
흐려져 가는 의식.
심장 박동도 느려졌고.
니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놈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신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간절하게 소원했다.
‘제발, 제발 복수를 허락해 주길,’
그럼 죽어도 상관없을 텐데.
결국 눈꺼풀이 천천히 감긴다.
그렇게 니나 페레즈는 죽었다.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가족들의 품으로.
※ ※ ※
듀플렉스 대륙 로그드라실.
엘프 장로 에루인은 높게 뻗은 세계수를 보며 한숨만 쉬어댔다.
요즘 들어 심란한 마음.
그토록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방인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로그드라실 침식지가 정화되어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 대륙이 똑같았다.
대륙 전체에서 이방인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
왜지?
이방인들의 세상에 무슨 일이 생겼나?
듀플렉스 대륙도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헤스티아 성국에 대규모 침식지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다는 소식, 공교롭게도 이방인이 사라진 마당에 일이 벌어진 터라 더더욱 불안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뜬금없이 정화된 로그드라실, 그토록 엘프들을 괴롭혀왔던 침식지 보스 광룡 레지키쓰론의 죽음.
놈의 레어 안에 하트가 사라진 사체가 뻔히 놓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저렇게 어이없이 죽었다니.
자신이 직접 죽였어야 했다.
놈에게 죽어간 엘프들의 복수를 해야 했다.
‘진짜 죽었단 말이야?’
그런데 왜 믿기질 않지?
세계수는 알고 있을지도.
에루인은 가만히 세계수 곁으로 다가갔다.
가만히 손을 뻗어 줄기에 대고.
‘레지키쓰론은 정말 죽은 건가요?’
하지만 여전히 응답하지 않았다.
‘확답을 내려주세요. 세계수여.’
언제나 그랬다.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는 세계수와의 소통은 어렵다.
이럴 때 제자 케이라도 있었더라면.
‘제발···,’
순간!
[에루인,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에요.]
세계수가 응답을 해왔다.
‘왜 확답을 할 수 없는 겁니까? 이유를 말해주시면···.’
그러자.
[진실을 알길 원하나요, 에루인?]
진실.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
‘네.’
[그럼 기회를 드릴게요.]
‘대체 무슨···,’
그때였다.
스우웅.
바람이 불어온다.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세계수 주변에서 휘몰아쳤다.
가지가 흔들리고 잎사귀가 파르르 떨렸다.
‘아!’
그러더니,
툭,
에루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자그마한 열매 하나.
‘이, 이건?’
그녀는 머리 위에 떨어진 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허리를 굽혀 열매를 주웠는데.
[진(眞) 세계수의 열매]
[등급 : 신화]
[종류 : 소모품]
[귀속 여부 : 습득 시 귀속]
[효과 : 세계수의 가호와 은총을 받습니다.]
에루인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왜 글자가 나타나는 거지?’
세계수의 열매.
그리고 진(眞)이라는 수식어는 대체?
[에루인, 그걸 먹어요. 그럼 진실이 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진실을 알고 난 후 일어나는 일은 온전히 그대가 홀로 감당해야 합니다.]
‘···.’
[물론 먹지 않아도 돼요. 그럼 모든 걸 잊고 평소처럼 이 로그드라실에서 영원히 살아갈 겁니다.]
세계수는 에루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진실을 위해 열매를 먹을래?
아니면 그냥 살던 대로 살래?
이미 결정을 내린 에루인.
서슴없이 열매를 입으로 가져가,
꿀꺽.
단숨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결국 선택했군요. 에루인.]
‘이제 뭘 하면 되죠?’
[나를 끌어안아요.]
에루인은 거대한 세계수의 줄기에 몸을 밀착했다.
그러나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와 그녀를 살며시 감싸기 시작했다.
뿌득, 뿌드드드드···.
[이것만 기억해요. 에루인.]
‘네?’
[택배를 꼭 확인하세요. 잊지 말고.]
‘택배? 그건 또···.’
순간!
화아아아악!
새하얀 빛으로 빛나는 세계수.
동시에 그녀의 의식이 어디론가로 빨려 들어갔다.
※ ※ ※
카리브해 작은 섬의 리조트.
게임이 긴급 점검에 들어간 덕분에 게리 스탁턴은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
접속이 안 되니, 플레이어들이 상자를 못 까고, 그런 이유로 진(眞) 아이템을 배송할 일도 없고.
하지만 편안히 쉬지는 못했다.
게리 스탁턴도 가봉 열대우림에서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친 새끼들이 부정한 물의 정령왕까지 데려왔어?”
완전히 작정한 모양.
시스템은 어떻게 대응할까?
레지키쓰론의 탈출엔 데우스칩을 내보냈다.
그럼 부정한 물의 정령왕은?
“후우, 답답해.”
마음이 편해야 쉴 수도 있는 거지.
그러던 바로 그때!
띠링!
배송 출고를 지시하는 알림음.
‘배송이라니,’
누가 접속했나?
사도 플레이어들은 아닐 것이다.
진작부터 막아뒀으니까.
그럼?
게리 스탁턴은 먼저 배송될 물품부터 확인했다.
“뭐?”
깜짝 놀랐다.
이걸 배송하라고?
“···세계수 열매.”
무려 신화등급이다.
게리 스탁턴이 관리하고 있는 진(眞) 아이템 중에서 신화등급은 몇 없다.
‘이걸 어디로.’
위치는 브라질.
배송받는 사람의 이름은
‘니나 페레즈.’
누구지?
왜 시스템은 이 사람에게 세계수의 열매를 배송하라고 했을까?
‘이걸 보내야 하나?’
만약 잘못된 이에게 가는 거라면.
지금 뒷문으로 접속할 수 있는 놈들은 사도 빌런들 뿐인데.
한참을 고민하는 게리 스탁턴.
“에이, 그냥 보내자.”
아무리 반(反) 시스템이라고 한들, 아이템 배송 부분에 대해선 절대 관여할 수 없다.
게리 스탁턴은 지정된 위치로 물건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