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테나 >
게리 스탁턴의 천성이 게으르다.
원래 영혼이 골드 드래곤이었으니까.
엘리가 항상 궂은일은 자기에게만 시킨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애초에 계약이 그거였는데.
그래서 그녀의 영혼 데이터는 아직 세상에 남아있었다.
안과 밖을 오가며 플레이어들의 원활한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리 스탁턴은 안에 들어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
자신의 영혼은 지구로 완전히 건너왔고, 안쪽 세상의 시스템 데이터 베이스에서 영구 삭제됐다. 그나마 남아있던 육체도 소멸.
물론 지구인으로서 계정을 만들어 플레이어가 되면 안에 들어갈 수 있지만···,
뭣 하러!
바깥일만 신경 쓰는 것도 머리가 깨질 판에.
요즘 들어 걱정이 많다.
갑자기 닥친 침식의 위험, 예상은 했다.
밖으로 나온 목적도 그거고.
하지만 이렇게 빠르다니.
중국 베이징은 시작일 뿐이다.
곧 큰 것이 온다.
‘데우스칩이 잘해주려나.’
차원의 틈에 보관된 진(眞) 마정석의 일부도 넉넉하게 덜어줬으니, 든든한 방패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아이템으로서의 방패가 아니라 케이에게 집중되는 공격을 분산시킬 정도의 힘을 가진, 세력으로서의 방패를.
그런데!
“주, 주인님!!! 큰일 났어요.”
“···하아, 씨발!”
쟤만 오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데.
“또 뭐!”
“이거 좀 보세요.”
스마트폰을 열어 케이에게 온 메시지를 보여주는 엘리.
“···어?”
이게 뭐지?
찌그래기 새끼들이 세상으로 접속하고 있다고?
점검 중인데도 불구하고?
혹시?
“···백도어?”
“네, 뒷문이 열려있었어요.”
“제기랄!”
“인증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구멍을 만들어 둔 것이 틀림없어요. 그, 그 다, 다른 시스템이.”
“악신(惡神)이라 불러도 돼.”
“네, 악신이 개입했을 거예요.”
점검 전에 미리 준비했을 것이다.
악신, 반(反) 시스템이.
“우리도 빨리 점검이 끝나야 하는데, 베이징 침식지가 사라지면 접속이 되겠죠?”
“흐음, 글쎄.”
얼굴을 찌푸리는 게리 스탁턴,
“다른 문제라도?”
“내가 많이 생각해봤는데,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 것 같아.”
엘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애초에 세상이 막힌 이유가 뭐였지?”
“레지키쓰론의 탈출과 침식의 발생이잖아요.”
“맞아. 그래서 오류가 생긴 거야.”
“오류?”
“로그드라실 정화가 정상적인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진 건가?”
“그건 아니죠.”
그랬다.
플레이어가 보스를 공략하고 놈의 영혼을 삭제시켜 정화하는 과정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냥 사라져서 없어진 것이다.
“침식된 레지키쓰론의 기록은 시스템 데이터에 남아있어. 삭제되지 않은, 엄청난 대용량의 시스템 오류 파일로써.”
“아!”
“그 오류 파일이 내부에서 시스템 자원을 갉아먹고 있고, 그래서 점검이 실행된 것이고,”
“그럼 결국···.”
“놈의 영혼을 소멸시켜야 해. 바깥에서. 예를 들어 레지스트리 정리?”
레지스트리.
시스템에서 사용하는 모든 프로그램의 시스템 구성 정보를 저장한 데이터베이스를 의미한다.
레지키쓰론의 기록은 아직 삭제되지 않고 남아있는 레지스트리, 따라서 그걸 정리해야 점검이 끝나고 플레이어들도 접속할 수 있다.
“결국 케이가 해야겠네요.”
“뭐, 그럴 힘을 가진 유일한 존재니까.”
하지만 레지키쓰론을 먼저 찾아야 삭제하든지 하지.
진짜 어디 있을까?
※ ※ ※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사도 빌런, 변절자의 실마리를 찾아 제거에 여념이 없는 찬웅.
미국과 한국 정부도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직접적인 행동이야 케이가 다 하겠지만, 그를 보호하고 운신의 폭을 자유롭게 해주는 일도 중요하다.
미국 브래들리 국무장관이 비밀리에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중국 서열 2위 위룽타오 국무원 총리와 만났다.
아무래도 중국 권력층에 말빨이 먹히려면 한국보다 미국이 훨씬 낫다.
불퉁한 태도로 브래들리 국무장관을 맞이하는 위룽타오.
“베이징 침식지 문제 때문에 오셨소?”
“비슷합니다. 미국이 도와드릴 일이 없는지,”
“하! 각성 플레이어라도 지원해주겠다는 말이오? 쯧쯧,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전화 한 통도 없더니.”
“그땐 우리도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위룽타오 국무원 총리는 한껏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며 말했다.
“지원은 필요 없소. 우리가 다 처리하고 있으니까, 보시다시피 중화의 각성 플레이어들이 지금도 용감하게 침식지를···.”
뻔뻔하게 자신들의 성과를 자랑하는 위룽타오 국무원 총리, 그러나 브래들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정말 중국 각성 플레이어의 힘만으로 공략해냈단 말입니까?”
“···무슨 소릴, 그럼 그게 아니라는 거요? 감히 중국을 능멸하는 건가?”
“이거나 보고 말씀하시죠.”
“무슨?”
가지고 온 태블릿으로 영상을 재생하는 브래들리, 찬웅이 어쩌다가 베이징 동물원 침식지를 정화할 때 찍은 영상이었다.
영상을 보는 위룽타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안색이 점점 굳어졌다.
“···이, 이게.”
침식된 동물원, 탱크와 미사일 발사차량, 사도들, 모든 것이 생생하게 담겨있었다.
대화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전술 핵미사일, 그것이 향할 목표도.
“조, 조작된 영상이야.”
“우리가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흥! 그럼 영상을 찍은 자 혼자서 베이징 침식지를 공략했다는 말이오? 그런 자가 있을 리가···, 아! 서, 설마?”
“네, 맞습니다. 그가 했습니다.”
그가 누구겠나?
케이, 한국의 각성 플레이어.
“영상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것도 보세요.”
참모부장 허진량이 나오는 영상이었다.
케이에게 발각되어 끝내는 가루로 변해 사라지는 모습.
“이런! 허진량 부장이 왜?”
“안심하세요. 케이가 처리했으니까.”
“안심? 허진량은 중국 군사위원회 고위직 관리요. 우리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이런 짓을 했단 말이오?”
“허락이라···,”
브래들리는 싸늘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지금 케이의 행동을 문제 삼는 겁니까? 오히려 중국을 구원해줬는데?”
“그, 그런···,”
“만약 케이의 행위에 대해 중국이 무슨 행동을 취한다면 우린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런 브래들리는 매섭게 노려보는 위룽타오.
“···당신은 우리 중국을 협박하려고 왔군.”
“정말 협박이라고 생각하세요?”
“이게 협박이 아니고 뭐요?”
“경고. 허튼짓하면 중국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미국과 유럽연합, 나토의 의지를 전해주려고 온 겁니다.”
“뭐, 뭐?”
“케이가 한 침식지 정화라는 위업을 뻔뻔하게 당신들의 공으로 둔갑시키는 건 그렇다고 쳐. 몰랐을 테니까, 이해해.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염치를 알아야지.”
브래들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영상이 하나 더 있소. 케이가 흡혈귀 사도 빌런에게서 중국 여인 3명을 구한 거, 그러니 제발 조금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길 바랍니다.”
“···.”
“태블릿은 가져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그래도 의심이 된다면 확인해보든가.”
위룽타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증거가 눈앞에 있는데 무슨 말을 하겠나?
‘끄응, 이러면···.’
현재 중국의 모든 매체들이 베이징 침식지를 공략하는 중화 각성 플레이어들을 칭송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띄워줬다.
그걸 기회로 삼아 당시 시민들을 버리고 제일 먼저 베이징을 탈출했던 중국 지도부의 실책을 무마하고.
하지만 베이징 동물원 침식지 공략의 주체가 사실은 한국인 케이라니.
‘절대 숨겨야 해.’
이 사실이 밝혀지면?
위대한 중화의 위신이 밑바닥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자신도, 중국 지도부의 체면도.
※ ※ ※
데우스칩의 하루 일과는 출근에서부터 시작한다.
“좋은 아침이군.”
“밤새 잘 주무셨나요? 데우스칩.”
“골렘은 잠을 자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내 이름은···,”
“아! 죄송합니다. 우석씨.”
최기병은 데우스칩, 대우석이 사는 찬웅의 집으로 그를 태울 차량을 보냈다.
물론 3명의 경호 인력까지 함께 태워서.
그래서 APS 본부까지 출근하면 바로 업무가 시작된다.
오늘은 침식지에서 발견된 아이템 연구.
실험실 관찰 본부에서 연구 과정을 검토하는 데우스칩, 현재 보는 것은 베이징 침식의 근원, 케이가 가지고 온 깃발 형태의 아이템이었다.
“천천히 돌려보게.”
“네.”
접하면 접할수록 신기한 지구의 과학.
‘3D 스캐닝 기술이라고 했지?’
침식의 근원, 깃발 아이템을 분해할 필요도 없이 3D 입체로 화면에 나타나게 만들어 준다.
이리저리 마음대로 돌려볼 수도 있고 심지어 내부 모습도 관찰이 가능했다.
“아공간 마법 문양이 있군. 아마도 침식의 에너지를 보관했던 것같은데, 예를 들어 침식 마정석 같은 거.”
“지, 진(眞) 침식 마정석이라니, 그게 밖으로 나온단 말입니까?”
“못 나올 것이 뭐가 있나? 군주들도 튀어나오는 판에.”
“···그렇긴 하죠.”
최기병은 옆에서 데우스칩의 말을 녹음기에 담고 있었다.
“깃발의 기본적인 기능은 안테나 역할이라고 보면 되네. 에너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하지만,”
“또 뭐가 있습니까?”
“낯선 문양들이 많아. 에너지 전달은 맞는데 조금 달라. 저 문양은 뭐야? 뭘 전달하려고 이런걸···.”
곰곰이 생각하는 데우스칩.
“아직 깃발에 침식의 기운이 완전히 제거된 건 아니라고 했지?”
“네, 찬웅씨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없애버리는 것보단 조금 남겨두는 것이 연구에도 좋을 거라고.”
“잘 생각했군. 그럼 샘플 자료들을 가져와서 깃발과 가까이 둬봐.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지 봐야겠어.”
데우스칩의 지시에 각성 플레이어들이 침식의 샘플을 가지고 와서 깃발 주위에 놓았다.
잠시 후,
‘큰 변화는 없어 보이는데,’
그때였다.
부글부글.
샘플 중에 하나, 용기에 담긴 물이 끓어오른다.
“응?”
“저, 저건,”
찬웅이 베이징 동물원 침식지 연못에서 퍼온 물.
부글부글.
계속 끓어오르더니.
퐁!
하고 튀어나오는 희한한 반투명 형체.
데우스칩은 보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정령?”
확실하다.
아주 작지만 물의 정령이었다.
침식으로 오염된 부정한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
찌우웅!
나타나자마자 실험실 각성 플레이어들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 어, 어떡합니까?
“죽이게! 소멸시켜!”
츠핏!
서걱!
푸욱!
각성 플레이어의 포스 공격에 의해 물방울로 변해 사라지는 운디네, 약하고 작은 놈이라 금방 제거할 수 있었다.
“휴우, 하마터면···,”
최기병도 놀랐다.
정령? 빙의 형태도 아니고, 게임 속 몬스터가 실체화되어 나타났다. 그 모습 그대로.
데우스칩도 심각해졌다.
‘정령이라니.’
정령.
금속으로 따지면 수은과도 같은 것.
에너지로도 존재하고, 물질로서도 존재할 수 있는 양면성을 가졌다.
하지만 물질로서 실재하려면 그걸 가능하게 해줄 힘이 필요하다.
실체화의 조건은 두 가지.
먼저 첫 번째, 계약.
정령 친화력을 가진 인간이나 엘프가 정령과 계약하면 실체화 속성이 부여된다.
‘하지만 여긴 정령 계약자가 있을 리 없잖아.’
두 번째는 물의 정령왕.
정령왕은 스스로 실체화할 수 있고, 자신보다 급이 낮은 정령들을 실체화해줄 수도 있다.
솔직히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지구에 정령왕이 있다고? 차라리 계약보다 더 현실성이 더 떨어지는···, 가만!’
데우스칩의 눈에 깃발이 눈에 들어온다.
에너지를 전달하는 안테나 역할의 깃발, 그리고 정령.
그런데 고작 저걸로?
지금 데우스칩이 생각하는 가설이 성립하려면 안테나는 저보다 훨씬 더 커야 한다.
그런 이유로 이 가설도···,
‘아니야.’
단순히 크기가 문제라면···,
‘이거 설마?’
※ ※ ※
투타타타타타!
아프리카 열대 우림을 날고 있는 헬리콥터.
관광 목적의 헬기 투어지만 사실 탑승자는 관광객이 아닌 CIA 현장 요원 닐 심슨.
중국에서 일어난 침식.
왜 하필 동물원이었을까?
한국 APS와 CIA는 케이가 촬영한 동물원 침식지의 영상을 보고 몇가지 추측을 했다.
침식이 일어나면 생명체들은 죽거나 오염된다.
몬스터로 변이되는 것.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침식 당시 동물원에는 사람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정작 변이한 숫자보다 사망한 숫자의 사람이 훨씬 많았다.
동물들은?
그 반대.
거의 다 침식되어 몬스터로 변화한 것.
그래서 내린 결론.
인간은 대다수가 죽고, 동물은 대다수가 변이된다.
놈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동물원을 고른 이유일 테고.
그럼 침식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은?
베이징처럼 동물원, 아니면 동물들이 가장 많이 서식하는 장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프리카와 남미로 정보국 요원들이 파견됐다.
일부는 초원지대로, 일부는 열대 우림으로.
아프리카 가봉의 열대 우림은 CIA 현장 요원 닐 심슨이 정찰을 맡은 지역, 헬기를 대여해서 숲속 깊숙한 지역으로 날아갔다.
“이만 돌아갈까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조금만 더 들어가 봅시다.”
하루 만에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면적이 엄청나게 넓은 곳, 숲이 우거져있어 밑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그런데.
“음?”
숲을 관찰하는 닐 심슨의 눈에 들어온 이상한 구조물 하나.
“···깃발?”
거대한 나무들 틈 사이로 삐죽 솟아난 깃발, 언뜻 보면 나무와 구별이 안 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닐 심슨은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금속 재질의 깃대, 깃발.
크기가 엄청나게 크다.
‘똑같아. 베이징 침식지에서 발견된 그것과. 크기만 다를 뿐이지···,’
바로 그때!
파주주주주죽!
밑에서 솟구치는 거대한 물줄기.
“헉!”
파바바박!
물줄기에 맞고 균형을 잃어버린 헬기.
“으아악!”
“조, 조종이 불가능···,”
헬기가 추락한다.
동시에,
우우우우우우우우···,
“이런 제기랄!”
콰콰쾅!
닐 심슨이 마지막으로 목격한 건 소름 끼치도록 끈적한 에너지의 파동이 열대 우림 전역으로 번져나가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