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절자를 위한 세상은 없다(2) >
변절자를 위한 세상은 없다(2)
헤스티아 성국 남쪽 침식지.
부정한 물의 정령들이 주요 몬스터인 지역이다.
아바타명 [금의위진무사], 중국 군사위원회 참모부장 허진량은 오염된 운디네를 검으로 찔렀다.
푸푹!
“후우,”
사도 플레이어는 어떻게 동화율을 올릴까?
당연히 사냥으로 올린다.
여느 용병 플레이어와 다를 바 없다.
사도 플레이어도 기본적인 레벨업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에.
사냥터는?
자신이 모시는 군주님의 침식지만 아니면 어디라도 가능하다.
허진량의 경우, 주어진 임무에 성공한다면 자신이 모시는 다크엘프 군주, 셀라핌의 은총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주를 알현조차 못 했다.
계획은 어이없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초반엔 순조로웠다.
셀라핌께서 진혈의 군주 렐리스의 고유 스킬 [매혹]을 하사해주셨고, 덕분에 군사위원회를 장악하고 중국 주석까지 손안에 주무르면서 인민해방군 최정예 부대를 움직였다.
그리하여 침식을 일으키고, 사도들을 모으고, 군대를 밀어 넣고,
‘미사일만 발사되었어도.’
안타까운 일이다.
케이를 제거했다면 세상의 정화는 더더욱 쉬워졌을 텐데.
‘그 개자식 때문에!’
어떻게 알고 왔지?
디바인 아티팩트는 또 무슨 수로 찾아냈고?
은폐 마법진이 무력화된 탓이었다.
동화율 200%의 플레이어라도 못 찾을 수준의 마법진임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동물원 침식지는 최소 한 달 정도는 더 유지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군주께서 그놈에게 신경을 쓰시는 이유가 있었어.’
어차피 중국 차기 권력은 자신에게 넘어온다.
허수아비 주석을 죽이면 더 빨라질 수도 있고.
‘권력만 손에 들어오면···, 반드시 죽인다.’
전쟁.
명분은 충분하다.
중국 소분홍, 젊은 세대에서 번지고 있는 반한 감정, 그걸 적절히 이용해 전쟁을 일으켜 한국을 지구에서 지워버리면 그만.
‘오늘은 이만해야겠군.’
밖에서도 할 일이 많다.
언제쯤 마음 편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을까?
그때!
띠링! 하고 울리는 친구 메시지.
[시칠리아의 아들] : 허진량, 제물은 준비됐나?
‘···누군가 했더니.’
놈의 이름은 알바토레.
렐리스의 사도.
‘더러운 흡혈귀 새끼.’
새파랗게 어린놈이 건방을 떠는 꼴을 보면.
알바토레가 말한 제물은 여자들이다.
그것도 25세를 넘지 않는 젊은 여자들.
놈이 살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여자를 납치해서 흡혈하다간 꼬리가 잡힐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항상 자신에게 손을 벌린다.
최소한 중국에선 그런 어린 여자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구해서 제공할 여건이 되니까.
어쩔 수 없다.
들어줘야지.
그나마 다행인 건 렐리스의 사도인 흡혈귀 새끼들의 숫자가 작다는 점, 많았으면 어떡할 뻔했나.
[금의위진무사] : 지금 어디?
[시칠리아의 아들] : 네가 있는 도시 텐진.
[금의위진무사] : 캡슐은 어디서···, 또 사고 쳤나?
[시칠리아의 아들] : 걱정 마. 혼자 사는 놈이었어. 시체는 깔끔하게 처리했고.
피를 빨고 싶어 안달이 났나 보다.
텐진시(市)의 아무 집이나 쳐들어가 살고 있던 사람을 죽이고 캡슐을 빼앗아 접속한 모양.
[금의위진무사] : 준비해뒀다. 밖에 나가서 주소를 보내줄게.
[시칠리아의 아들] : 지금 로그아웃하라고?
[금의위진무사] : 어차피 흡혈을 하려면 그렇게 해야지. 나가서 보자.
[시칠리아의 아들] : 알았어. 바로 연락해줘.
허진량, [금의위진무사]는 로그아웃했다.
벌컥!
열리는 캡슐의 뚜껑.
허진량이 접속하고 있는 장소는 텐진시(市) 외곽의 한 별장, 다크엘프 군주 셀라핌께 간택을 받고 나서 사들인 안가(安家)였다.
안가 지하엔 누구도 접근할 수 없게 만들어진 게임 접속 전용 패닉룸이 있다.
두께 1m의 티타늄 합금으로 둘러싸인 곳, 핵이 바로 위에서 터져도 안전한 장소, 당연히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전화기가···, 여기 있군.”
주소를 확인하고 번호를 눌러서.
“나다. 제물이 있는 주소를 알려주지. 텐진시 징하이구 펑샤오 거리···, 다 적었나? 그곳 폐공장 냉동창고에 3명이 있을 거다. 특별히 네 취향 신경 써서 준비했으니 알아서 먹고 시체는 잘 처리해.”
허진량은 전화를 끊었다.
“미친 흡혈귀 새끼.”
하지만 매혹 스킬 빚은 갚아야지.
이제 밀린 일이나 처리하자.
‘오늘은 중국 지도부들이 피신해 있는 충칭으로···,’
순간!
“응?”
스스스스,
어디선가에서 불어오는 바람.
착각이 아니다.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왜···.”
게임 접속 전용 패닉룸은 완벽한 밀실.
따라서 바람이 불어올 리 없는데···.
허진량은 그제야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뻥 뚫려 있었다.
두께 1m의 티타늄 합금 벽이.
마치 칼에 잘린 것처럼 반듯하게 사각으로.
“어, 어떻게?”
캡슐에 들어가기 전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등짝에 흐르는 식은땀.
자연적으로 저렇게 됐을 리가.
잘 생각해보자.
산소 절단기나 레이저 절단기도 아니다.
타거나 녹은 흔적이 없으니까.
‘날붙이로 자른 거야.’
자신은 엄두도 못 내는 일.
‘제기랄!’
누군가 여기 있다.
놈이 왔다.
허진량은 자신이 발현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스르르륵,
유령처럼 나타난 남자.
“네가 허진···,”
휘릿!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진량의 신형이 반듯하게 잘린 구멍을 향해 총알처럼 쏘아졌다.
“어?”
도망간 허진량의 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는 찬웅.
“···빠르네.”
벌써 소문이 났나?
예전에 사도들과 마주하면 최소한 덤비기라도 했는데, 이젠 싸우기는커녕 대화도 하지 않고 먼저 도망부터 간다.
“캡슐에서 나오자마자 죽일 걸 그랬어.”
CIA가 넘겨준 정보는 확실했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진득한 침식의 기운, 허진량은 사도 빌런이 확실했고 현재 기거하는 위치도 틀림이 없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군대를 침식에 헌납한 변절자.
그리고 여기서 알게 된 한 가지 놀라운 사실.
‘게임에 접속한다고? 점검인데···.’
확실히 캡슐이 작동했다.
그건 접속이 되고 있다는 의미.
어떻게?
자신도 하루에 한 번 캡슐에 누워본다.
혹시라도 점검이 풀렸을까 봐.
하지만 여전히 접속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허진량이 접속했다는 건···
‘아마 반(反) 시스템 때문이겠지.’
분명하다.
사도 플레이어들은 접속이 가능하다.
저 새끼들은 아무렇지 않게 접속해서 동화율을 높이고, 정작 각성 플레이어들은 손가락만 빨고 있다.
‘쯧쯧, 이래서 대가리가 두 개면 골치 아프다니까, 한쪽은 필사적으로 막고, 한쪽은 슬쩍 열어주고.’
주신, 시스템은 실패했다.
이러면 긴급 점검이 의미가 있을까?
“···허진량부터 잡고 나서 생각하자.”
기척을 놓치기 전에.
팟팟팟팟!
허진량은 죽으라고 달렸다.
이 별장은 안전한 게임 접속을 위해 마련한 비밀 장소.
패닉룸만 있는 게 아니다.
이곳을 지키는 경비병과 심지어 군 소속의 각성 플레이어들도 배치했다.
그런데 모두 자빠져 자고 있어?
졸려서 잠을 잘 리는 만무하고.
그놈, 케이가 수를 썼을 것이다.
‘여기서 죽으면 안 돼!’
부활이 약속되었지만 그것이 언제 실현될지 기약이 없다.
영생이 이루어지려면 우리 쪽이 승리해야 한다.
게임에서도, 그리고 지구에서도.
휘리릿!
허진량은 다리가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다크엘프의 여왕, 군주 셀라핌의 스킬, [대지의 도약]
발바닥이 땅을 박차면 대지가 밀어주고 이끌어준다.
‘놈을 상대하는 건 무리야. 무조건 탈출한다.’
올드팩토리와 베이징 침식지를 홀로 공략하는 놈을 어떻게 감당해?
휘리리릿!
점점 가속화되는 빠르기.
‘이 정도 거리라면 절대 못 쫓아와.’
그럼 다음 계획을 생각해야 할 때.
놈에게 발각되었다면 한국 정부도 알게 될 터, 미국도.
그렇다면 중국에 있어선 안 된다.
‘···알바토레, 그놈에게.’
그동안 여자들을 제공해준 대가를 갚으라고 요구하면 놈도 어쩔 수 없겠지.
‘이탈리아로 간다.’
그런데 바로 그때!
스스스슷!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
“···뭐.”
팟팟팟팟!
흡사 귀신처럼 간격을 순식간에 좁혀오는 놈.
“미, 미친!”
순간이동?
블링크?
저게 인간인가?
순간!
츠리리릿!
뒤에서 날아오는 섬뜩한 예기.
“이런!”
가까스로 몸을 뒤틀어 피했지만,
츠피릿!
콱!
“끅!”
허진량은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깜빡 잊었다.
놈의 도끼는 두 개.
“으아아아아! 사, 살려···.”
찬웅은 성큼성큼 걸어가 도끼자루를 쥐었다.
“할 일이 많다. 빨리 끝내자.”
도끼를 통해 흘러들어가는 찬웅의 포스, 영혼까지 소멸시키는 플레이어 킬.
“끄아아아아악!”
파스스스스,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놈의 육신.
허진량을 해치운 후 찬웅은 스마트폰으로 최기병에게 연락했다.
“접니다. 영상 하나 보낼 테니까 번역 좀 부탁해요. 허진량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데, 그 내용이 뭔지 알고 싶어서.”
빨리 시스템이 정상화되어서 통역 기능을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또 한명.
수신자는 엘리.
내용은 긴급 점검에도 여전히 게임에 접속하고 있는 사도 플레이어에 관한 것이었다.
※ ※ ※
알바토레는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다.
원래는 후발대로서 중국 베이징 침식지에 참여하려 했지만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멍청한 중국 놈들.’
바로 옆나라에 케이라는 대적을 두고 있으면서 놈이 올 것을 예상 못 해?
미리 준비해두고 놈이 오면 피했어야지.
침식을 뿌려주는 디바인 아티팩트라도 챙기든가.
‘그게 안 되나?’
놈과 마주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듣자 하니 케이는 어디에나 있고 언제든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건 패배한 놈들의 변명.
자신은 그런 멍청한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어쨌든 오랜만이군.’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흡혈의 욕구.
이탈리아에선 해소하기 어렵다.
보는 눈도 많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 탓에 움직임도 제한적, 하지만 중국이라면?
14억의 인구.
중국 서부 외진 시골에서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몰려오는 순박한 여자들, 그중에서 몇 명 사라져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허진량은 권력자.
사라져도 괜찮을 여자들만 골랐겠지.
일단 급한 욕구부터 채우고, 중국에 머물면서 몇 명 더 먹고 간다.
알바토레는 허진량이 일러준 주소로 찾아갔다.
한적한 폐공장, 이와 같은 폐공장이 널렸다. 이 주위가 다 그렇다.
한때 지구의 공장이라 불리었던 중국의 제조업이 경기침체로 인해 몰락한 결과.
‘나야 상관없지. 먹이만 조달해주면···,’
공장의 문은 자물쇠와 쇠사슬로 잠겨있었다.
뚜둑,
가볍게 손으로 뜯어버리고.
‘냉동창고라고 했지?’
마침 저기 보이는 창고.
두꺼운 철문이 잠겨있지만.
우지직!
삐걱, 문이 열렸다.
쿵쾅쿵쾅.
욕구 때문에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댄다.
‘3명이 있다고 했으니까···,’
한 명은 목을 잘라서 꾸역꾸역 한입에 마시고, 한 명은 목을 깨물어 맛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나머지 한 명은 깨끗이 씻긴 후에 오래 데리고 놀다가···,
마침내 먹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한구석에 벌벌 떨면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3명의 젊은 여인.
그런데 묶어두지도 않았네?
입도 안 막았고,
허진량, 이 새끼, 저렇게 허술하게 둬서 뭐 하자는 거야?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자! 누구부터···,”
그때였다.
“어!”
눈앞이 번쩍하더니.
서걱!
“꺽!”
툭!
팔이 떨어진다.
‘···왜?’
너무 순식간이라 대응도 못 했다.
‘설마···.’
스스륵.
그제야 알바토레는 발견했다.
섬뜩한 도끼를 들고 있는 한명의 남자를.
그리고 보자마자 누군지 알았다.
“···케, 케이? 어, 어떻게?”
덥석!
비명을 지르느라 크게 벌려진 알바토레의 턱이 케이의 손에 붙잡혔다.
“으각! 으갸갹!”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
알바토레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놈의 손에서 흐르는 기묘한 포스의 힘, 군주께서 주신 힘은 움직이지도 못했고.
“흐음,”
찬웅은 놈의 입을 확인했다.
“흡혈귀 맞네.”
길게 삐져나온 송곳니.
진혈의 군주라는 흡혈귀 년의 사들이 가진 표식.
“걔는 그냥 둬선 안 되겠어.”
동부 구치소 사건도 그렇고.
게임이 다시 열리면 렐리스부터 우선적으로 처리한다.
아무튼 희생이 생기기 전에 제때 도착해서 다행.
최기병이 빠르게 통역을 해줘서 여기로 올 수 있었다.
알바토레라는 놈이 당도하기 전에 말이다.
허진량 잡으러 왔다가 마주한 의외의 소득.
이렇게 하나하나 굴비 엮듯 잡다 보면 언젠간 깨끗해지겠지.
찬웅은 도끼로 놈의 정수리를 찍었다.
우우웅!
폭발적으로 흘러 들어가는 포스의 힘.
공포로 물들어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눈동자.
“널 위한 세상은 없어.”
여기서도, 게임 안에서도.
‘납치된 여자들은···,’
스슷,
도끼를 집어넣고.
뭐라고 말한다?
“으음, 혹시? 제 말 알아들으시는 분?”
···한국말은 못 알아듣겠지.
진짜 허리띠 에고 시스템 마렵네.
그런데.
“저, 우, 우리, 가, 가도 되나요?”
“한국말 하시네?”
“···드라마를 좋아해서.”
“아하!”
역시 한류 열풍.
중국 젊은 층도 맨날 한국을 욕하면서 K팝과 K드라마엔 열광하고 있는 것이 현실.
“가세요. 나가서 공안에 꼭 신고부터 하시고.”
“고, 고맙습니다.”
흡혈귀 놈의 육체가 사라진 자리.
옷가지와 소지품들이 남았다.
스마트폰만 3개.
찬웅은 그것들을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조사해보면 또 나오겠지.
이번에도 이리저리 엮였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