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우스칩 합류. >
아프리카 중서부.
가봉 공화국의 열대 우림.
피에르 운게마, 아니 레지키쓰론의 근거지.
워낙 숲이 우거져 인공위성에도 잡히지 않을 열대 밀림의 깊숙한 심처, 지하로 파 내려간 벙커, 자가 발전 시설, 식량과 식수도 자급이 가능하다.
이곳 지하 벙커에도 20개의 캡슐이 설치되어 있었다.
웃돈을 주고 사들인 중고 제품.
벌컥, 벌컥, 벌컥.
열리기 시작하는 캡슐.
“구, 군주시여!”
“···며, 명을 수행하고 왔나이다.”
“군주께 영광을!”
.
.
.
20명의 사도 플레이어들이 음습한 침식의 기운을 풍기며 비틀비틀 캡슐 바깥으로 나왔다.
“수고했노라.”
만족한 얼굴의 레지키쓰론.
이들은 배달부다.
자신의 힘을 안전하게 바깥으로 가지고 오는 짐꾼들.
대륙의 생명체들이 세상에서 이곳으로 나올 수 있는 건 오직 영혼뿐, 레지키쓰론도 그렇게 나왔다.
그 강력한 육체와 힘, 끝도 없이 샘솟는 마나의 샘을 가진 드래곤의 본체는 두고 와야만 했다.
그 아까운 걸 그냥 두나?
최소한 드래곤 하트라도 가지고 나와야지.
그러나 게임 속에서 얻은 힘을 현실로 반영해서 가지고 올 수 있도록 허락받은 이들은 오직 지구인 플레이어들 뿐.
그래서 레지키쓰론은 자신의 수많은 사도들 중 25명의 플레이어를 선발하여 레어로 보냈다.
자살로 이뤄지는 새로운 탄생.
하지만 서둘러야 한다.
감당하지 못한 힘을 받아들인 사도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육체의 붕괴가 시작될 것이고, 그러면 이 아까운 침식의 기운이 공기 중으로 흘러나와 퍼뜨려질 터, 그전에 흡수해야지.
레지키쓰론은 사도의 목덜미에 이빨을 가져다 댔다.
콰악!
“아아아아아아···,”
세상에 남겨져 있던 드래곤 하트의 힘, 입을 통해 빨려오는 혈액, 그 안에 담긴 침식의 기운, 흡수당한 사도 플레이어는 바싹 말라갔다.
그럼에도 고통이 아닌 환희의 표정.
자신이 모시는 군주께 바치는 희생이다.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좋군.’
하트의 힘이 되돌아왔다.
그래봐야 한 명당 겨우 1%지만.
누군가 하트를 통째로 삼키고 자신의 앞으로 왔다면 흡수할 수 있는 양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
하찮은 인간이 침식의 기운을 품은 드래곤 하트의 힘을 감당해낼 수 있나?
그건 불가능하다.
별수 없이 드래곤 하트를 쪼개야 했다.
모두 25조각으로.
그걸 25명의 사도 플레이어들이 먹었고.
하지만 온전한 하나를 쪼개면 기운이 소실된다.
절반가량 하트의 힘이 손실되고 남은 힘은 50%.
그리하여 25명의 사도들이 흡수한 양은 전체 힘의 2%씩.
이것도 완전한 양이 아니다.
2%를 온전히 바깥으로 가지고 올 수 있느냐?
‘빌어먹을 반영률.’
사도 플레이어들의 반영률 때문에 또 절반으로 깎여 총 25%.
그래도 이게 어딘가!
또 한 명, 목을 물어서.
콰직!
“아아!”
“군주님! 반드시 대업을 이루시길.”
“마침내 군주님과 하나가 되나이다!”
.
.
.
차례대로 말라비틀어지는 사도들의 육신.
모두 20명, 한 명당 1%, 합쳐서 20%.
사실 이마저도 버겁다.
지금 자신의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 피에르 운게마도 인간이기에.
‘그릇의 육신에 강화, 불요불굴, 재생···, 온갖 마법진을 문신으로 덕지덕지 새겨넣었기에 망정이지.’
그렇게 레지키쓰론은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드래곤 하트의 힘을 5분의 1정도 되찾았다.
‘충분해.’
적어도 이 지구에서 자신을 당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케이?
그 정도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인다.
그런데 레지키쓰론이 처음에 보냈던 사도들을 25명이다.
여기서 흡수한 이들은 20명.
그럼 나머지 5명은
5%의 힘은 어디로?
그들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침식의 기운을 세상 밖으로 소개하는 매우 중요한 임무.
※ ※ ※
시간이 너무 없었다.
서버 다운까지 남은 시간 불과 몇 분.
그래서 개발자 엘리와 긴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당신도 대륙민이죠? 바깥으로 나온 존재이고.”
[부인하지 않을게요.]
“왜? 목적이 뭐길래, 침식지 정화인가요?”
[맞아요. 지구인은 유희를, 우린 정화를.]
“그쪽은 진짜 어떤 형태의 세상이죠? 게임 맞나?”
[답변할 수 없는···.]
“아, 됐습니다. 시간도 없고.”
[어차피 저도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렇게 많지 않아요. 레지키쓰론이 바깥으로 나왔다는 것 말고는]
[그리고 군주들이 소통하고 있어요. 서로의 능력들이 공유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드래곤이 흡혈의 능력을 얻고, 흡혈귀가 브레쓰를 쓸지도 모르는···.]
왜애애앵! 앵앵!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고 날갯짓만 하면 개발자 엘리.
“아무튼 대책은?”
[긴급 점검 동안 데이터 압축 프로그램이 아바타 케이의 드래곤 하트 흡수율을 30% 이상 상향할 거예요.]
“30%씩이나? 아바타가 붕괴할 것 같은데.”
[관리 프로그램이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총동원해서 최대한 케어할 거예요. 그래서 점검에 들어가는 거고.]
[게임 상에선 시스템 자원, 듀플렉스 대륙에선 신력(神力)이 아바타가 붕괴하지 않도록 관리할 겁니다.]
“흐음,”
그때였다.
[데이터 압축 프로그램이 GD – H1PW, 드래곤 하트를 관리합니다.]
[시스템 권한으로 데이터 압축 프로그램이 아바타에 개입합니다.]
[한시적으로 드래곤 하트 흡수율을 30%까지 개방합니다.]
“으윽!”
폭발적으로 솟아오르는 포스의 힘.
하지만 참을 만하다.
예전보다는.
[그럼 전 이만, 다음에 봐요.]
“지구에서 보면 안 됩니까?”
[···기회가 되면, 하지만 아직은.]
“뭐, 그럽시다. 만나기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도 없으니까.”
[무운을 빌어요.]
스슷!
사라지는 개발자 엘리.
[1분 후에 서버를 다운합니다.]
이제 1분 남았다.
게임이 중단되는 판국에 시스템이 드래곤 하트 흡수율을 30%나 상향한 이유가 뭘까?
‘상태창.’
[이름 : 케이]
[직업 : 용병(랭커)]
[포스 : 335,172]
[액티브 스킬 : 비열한 습격(11단계), 바람길 산책(MAX), 별빛 가르기(MAX), 강타(10단계), 슬립(2단계), 강기(5단계)]
[패시브 스킬 : 방출(MAX), 듀얼 스트라이크(MAX), 마법 저항(5서클), 약점 포착(9단계), 고무 신체(9단계)]
[동화율 : 187%]
[반영률 : 67%]
[드래곤 하트 : 흡수율 30%]
많이도 올렸다.
최근에 동화율과 반영률 돌파는 무려 6%.
크자누이를 잡아 3% 올렸고, 마그누스 기간트를 잡아 또 3% 올렸다.
포스 335,172, 드래곤 하트 흡수율 30%.
반영률이 67%라는 걸 고려하면···.
‘현실에서 흡수율 20%, 포스도 10만이 넘네.’
이 힘을 그냥 줬겠나?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아니 반드시 일어나게 될 지구의 침식을 막으라는 시스템의 의도.
듀플렉스 스페이스에서 이방인이자 플레이어, 즉 지구인의 역할은 필수적, 그쪽 세상의 침식을 막아야 하니까.
그런데 이쪽, 지구마저 침식당하면 어떻게 될까?
여기가 망하면 그쪽도 망한다.
‘지구가 우선이야.’
지구가 살아야 듀플렉스가 산다.
그러기에 시스템도 찬웅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서버를 종료합니다.]
※ ※ ※
벌컥!
자동으로 열리는 캡슐 뚜껑.
집에서 접속하면 늘 혼자였는데.
“응? 다녀왔나?”
캡슐 옆에서 찬웅을 기다리는 데우스칩.
“네, 갔다 왔습니다만···,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라니?”
“서버 긴급 점검이래요. 그래서 당분간 저쪽으로 못 넘어가겠네요.”
“그래? 확인해보지.”
데우스칩은 능숙하게 마우스를 클릭했다.
이젠 노트북과 한 몸이 된 그였다.
“그렇군. 게임 커뮤니티도 난리가 났어. 게임사 4대 명검 중 하나가 떴군.”
“3대 명검 아니었나? 그건 그렇고, 어떻게 그런 것까지?”
“게임에 대해 파고들다 보니 우연히 알았지. 정기 점검, 임시 점검, 긴급 점검, 연장 점검이 바로 4대 명검 아닌가.”
“···.”
완전 지구인이 다 됐다.
하긴, 여기 온 지 무려 5일이 넘었다.
“저쪽 세상에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군. 잠시 기다려 보게. 내 갔다 올 테니.”
“그러실래요?”
“마정석 남는 거 없나? 상급이면 더 좋고.”
“여기.”
찬웅이 건넨 진(眞) 마정석을 가루로 만들어 거실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는 데우스칩.
“아무렇게나 막 그리는 것같지만 사실은 달라. 에고가 전이될 대응 골렘의 종류에 따라 마법진도 그 모양이 조금씩 다르거든.”
“마법진 원리만 알면 아무나 그릴 수 있나요?”
“그럴 리가! 이건 저 세상에서도 나 아니면 누구도 모르는 비전이야. 아무리 고위급 마법사라 해도 불가능해.”
“드래곤은?”
“드래곤도.”
“신(神)이라면?”
“흐음, 그건 모르겠군. 가능할지도.”
신(神), 즉 시스템은 단수가 아니다.
다른 시스템이 알려줬을 수도 있다.
“다 그렸네. 그럼 다녀오지. 시간이 걸릴 거야.”
“괜찮아요. 기다리죠.”
데우스칩은 자신이 그린 마법진 위에 섰다.
하지만,
“흐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막혔나 보군. 그러고 보니 허리띠 에고 시스템도 작동이 안 돼. 긴급 점검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어떡하죠?”
“어떡하긴! 여기 계속 있으면 되지.”
“고향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으면?”
“여기가 고향이 되는 거고.”
“···.”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데우스칩.
“사실 여기가 더 좋아. 저쪽은 너무 지루했거든.”
한치의 불안감도 없어 보인다.
“참! 혹시 자네 주민등록 번호 알 수 있나?”
“···왜요?”
“정보를 알려고 사이트 방문했더니 가입을 하라더군. 그런데 주민번호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고, 성인 인증도 못 하니···.”
“성인 인증은 왜, 혹시 이상한 사이트 방문하고 그러는 거 아니죠?”
그러자 버럭 화를 내는 데우스칩.
“날 뭘로 보고, 내가 포르노허브라도 가입할 줄 알았나?”
“···포르노허브는 어떻게 아셨나?”
“그, 그게, 그냥 이상한 배너가 떠서 호기심에 마우스를 크, 클릭했더니···, 절대 의도하지 않았어.”
“네네, 알겠습니다. 실수겠죠.”
뭐 어때?
나이가 5백 살이 넘는데.
“아무튼 전 외출 좀 해야겠어요. 금방 다녀올게요.”
“외출? 어딜?”
“제가 일하는 직장에.”
APS에 가야 한다.
긴급 점검 문제도 논의하고, 침식지 탐색 상황도 알아보고.
특히 침식.
최소한 대한민국이라도 한 바퀴 돌아보자.
일어나기 전에 막아야지.
그래서 외출 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세.”
“네?”
“자네 직장 말이야.”
“지금 이 모습으로 가시려고? 사람들에게 들킬지도 몰라요.”
“이왕 지구에 온 거, 들키면 어떤가? 자네와 같이 가서 위험할 일도 없고.”
“어···,”
데우스칩은 자신의 존재를 노출하는 것에 아무런 주저함도 없었다.
오히려 들키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 되겠나?”
“아뇨. 갑시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쓰나요.”
“껄껄껄, 역시 케이야. 시원시원해. 콜택시 부를까? 아참! 차는 있겠지? 슈퍼카 말이야. 자네라면 그 정도는 타고 다녀야지.”
“···바이크는 있습니다.”
“쯧쯧, 역시 가난해. 최소한 슈퍼카 365대를 사서 하루에 한 번씩 갈아탈 정도는 돼야지.”
저 세상 사람 맞나?
넘어온 지 며칠 됐다고, 모르는 것이 없네.
※ ※ ※
경기도 과천 APS 접속 센터.
여기도 비상이 걸렸다.
“접속은?”
“완전히 막혔습니다.”
“제기랄! 언제 복구된다는 말도 없이.”
“긴급 점검 동안 월급은 나옵니까?”
“지금 월급이 문제야? 어우, 갑자기 금단 증상이 오네.”
“어떻게 참지?”
서버가 멈췄다.
그래서 끝까지 버티던 플레이어들도 한 번에 튕겼고.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용병 플레이어들은 모두 퇴근, 센터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최기병을 비롯한 각성 플레이어들이었다.
이들이 남아있는 이유는 하나.
혹시라도 모를 침식의 위협을 대처하기 위해.
“단서는 찾지 못했나요?”
“세계 각국 정부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긴 하지만.”
“한국은요?”
“항공기와 위성을 총동원했습니다. 그리 넓은 땅도 아니니까, 만약 침식이 일어난다면 곧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침식의 위험한 점.
인력을 투입할 수 없다는 것.
만약 게임 속 침식과 현실의 그것이 같다면 살아있는 생명체는 반드시 오염된다.
포스를 가진 각성 플레이어를 제외하고 말이다.
“침식이 발견되면 즉시 소집할 거니까, 반드시 비상대기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그때!
“여기 다 모여계셨네요.”
각성 플레이어들이 모인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찬웅, 그리고 코트와 모자, 선글라스, 마스크를 덮어쓴 골렘, 데우스칩.
“찬웅!”
“찬웅씨, 어서 와요.”
“와! 진짜 섭섭하다. 올드팩토리 혼자서 공략하다니.”
“슬쩍 언질이라도 주시지. 버스라도 타게.”
“근데 저분은 누구?”
“우리 직원인가?”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자 데우스칩은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를 차례로 벗었다.
“이제야 살 것 같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기계음.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다.
“···로봇?”
“설마? 로봇이 저렇게 행동이 자연스러울 리 있나.”
“그럼 아이언맨 코스프레야?”
“생긴 게 꼭 마키나 공화국 인간형 골렘 같네.”
찬웅이 말했다.
“소개해 드릴게요. 이분은 마키나 공화국 뉴팩토리 중앙 마공학 연구소 최고 선임 연구원 데우스칩입니다.”
“에?”
“네?”
“어···.”
“무, 무슨?”
“···.”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데우스칩이란 이름을 왜 모를까?
게임 속 NPC, 하지만 플레이어들도 만나기 힘든 거물 중에 거물.
그런데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장난치는 건가?
데우스칩이 직접 나섰다.
“왜들 다 놀라는지 모르겠군. 진(眞) 아이템도 나오는 판국에, 진(眞) NPC가 나타난들 대체 무슨 문제가?”
하긴, 이상하지는 않지만.
“뭘 어떻게 해줘야 믿을까? 마도 공학의 기초 이론이라도 읊어줘야 하나? 난 틀림없이 마도 공학자 데우스칩이야.”
“아···,”
“맙소사!”
“···저, 정말?”
모두가 경악했다.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