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다 올드팩토리(1) >
게임 속에서 사용하는 인벤토리와 실제 현실에서 사용하는 인벤토리는 크기도, 넣어둔 물건도 다르다.
현실에서만 볼 수 있는 콜라.
물론 게임 안에서도 비슷한 음료는 있다.
달콤한 탄산수 같은 거, 카페에서 커피도 팔고.
하지만 이 콜라는 상표까지 달렸지 않나!
‘혹시 다른 것도?’
일단 대기실로 귀환하자.
거기서 확인해보면 된다.
슬쩍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연회장을 빠져나와 대기실로.
퓨슛!
‘인벤토리 확인.’
다양한 물품의 목록이 떠올랐다.
상자 까고 나서 정리한다고 했는데,
각종 물약에 비약, 영약, 스크롤, 잡다한 쓰레기, 무기와 방어구, 공략 성공으로 받은 초대장 15장.···, 그리고 텐트와 캠핑용 의자, 그늘막.
‘···탠트? 이거도 있었어?’
꺼내 보니 진짜 캠핑용 장비.
대체 뭘까?
모든 물건이 다 있는 건 아니다.
두가예프에게서 빼앗은 핵가방도 없고, 타고 다니던 바이크도 없으며, 작전용으로 최기병에게서 받은 권총도 없다.
‘혹시 시간과 관련이 있나? 오래 두면 게임 속으로 옮겨지는 건가?’
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현실 인벤토리에 가장 오래 보관한 물건은 스마트폰, 처음에 최기병과 연락하기 위해 받은 대포폰, 보이지 않았다.
‘하긴! 핵가방과 스마트폰이 게임 속에서 나타난다고 치면···,’
게임의 밸런스가 무너질 터.
콜라나 텐트야 게임 속에서 나타나도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저 신기한 음료와 물건일 뿐.
‘뭐, 혹시 모르잖아. 나중에 핵가방도 게임 속에 나타날 수도.’
침식의 기운이 지구에 퍼지는 만큼 지구의 문명도 게임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고 있다는 예측도 가능하다.
‘···서로 섞인다는 건가?’
그렇다면 동화율이나 반영률과 관계가 있을까?
추측도 지겹다.
직접 물어보자.
“지금 세상과 게임이 섞이고 있는 거 맞아?”
예전 같았으면 답변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라고 하겠지만···.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확실하다.
섞이고 있다.
“침식지가 지구에 생겨날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언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래?”
더 물어볼 것이 많다.
“현재 지구에 있는 침식지 보스나 NPC가 있어?”
[답변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왜지? 그것도 알면 안 되는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정보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
주신이나 다름없는 시스템인데.
“게임 속에서 접근하지 못하는 정보도 있었어? 시스템이?”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시스템은 단수가 아닙니다.]
“···뭐?”
시스템이 둘 이상이라는 말.
“아!”
알 것 같다.
듀플렉스 가상현실.
하나의 세상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침식되지 않은 곳과 침식된 곳.
침식되지 않은 정상적인 세상을 다스리는 주체가 현재 소통하는 시스템이라면···,
“침식된 세상을 지배하는 시스템도 있다는 거?”
[답변해드리겠습···, 치직! 치지지지···,]
“음?”
갑자기 잡음이 들려온다.
“뭐야?”
[답변해···, 치지지지···,]
“시스템? 시스템?”
[치치치치치치치···]
이젠 완전 잡음만.
‘그렇다는 말이지?’
확실해졌다.
‘침식된 시스템’도 있었다.
이것도 무려 시스템.
주신이나 다름없는 존재.
애초에 침식된 시스템이 모든 문제의 근원일 터.
‘이거 재밌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게임이지.
솔직히 스케일이 별로였다.
지금까지 게임 속에서 가장 강한 적은 광룡 레지키쓰론, 하지만 드래곤 따위가 세상을 위협할 깜냥이나 될까?
싸워야 할 적이 정해졌다.
차근차근해 나가면 된다.
‘먼저 이 목걸이부터 뭔지 알아보자.’
게임 밖이라면 최기병에게 넘겼지만 이렇게 안에 있는데, 그럼 진짜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된다.
‘마법 문양은 마도 공학과 관련이 있으니까 마키나 공화국으로 가면 되겠지.’
※ ※ ※
조셉 라이든 미국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매우 진보적이었다.
그가 특히 관심 있어 하는 분야가 전 국민 국가 의료보험 체계 완성과 온실가스 배출 최소화.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울까?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다 한 번씩 건드려봤지만 죄다 실패한 정책이었다.
엄청난 예산이 필요한 사업들.
어디서 돈을 빼오나?
그런데 해결책이 있었다.
취임 초기부터 서비스되기 시작한 듀플렉스 스페이스 가상현실 게임.
그곳에서 나오는 일명 리얼(real) 아이템.
인류가 접하지 못했던, 신비한 힘을 가진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 이걸로 필요한 재원을 마련한다.
그때부터 백악관의 역량이 가상현실 게임에 집중됐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각성 플레이어, 빌런, 사도라는 문제점들이 발생하긴 했지만···, 그것도 앞으로 인류가 가지게 될 과실에 비하면 사소한 수준.
그리고 오늘.
미국이 또 한 단계 발전할 기회가 찾아왔다.
듀플렉스 스페이스 가상현실 게임 본사 CEO 게리 스탁턴이 제 발로 백악관을 찾아온 것.
가상현실 게임의 발명자이자 운영자, 그래서 이 신비한 현상에 대한 비밀을 쥐고 있는 자.
그동안 얼마나 부러워했나?
동아시아 작은 나라 한국.
그곳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 케이.
하지만 미국에도 있었다.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수 있는 이레귤러가 말이다.
똑똑똑,
집무실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미스터 프레지던트.”
“그래, 말해봐.”
“그가 찾아왔습니다. 게리 스탁턴, 몸수색은 끝냈습니다. 깨끗합니다.”
“들어오라고 해. 경호원은 밖에서 대기하고.”
진짜 만나고 싶었던 인물이다.
그를 찾기 위해 국가 안보국, CIA, FBI, 주 경찰까지 총동원했지만 실패했었다.
그리고 백악관까지 들어온 이상 절대 놓치지 않는다.
“어서 오시오. 게리,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마찬가집니다. 조셉.”
“그동안 어디 있었소? 얼마나 찾았는지 아시오?”
“날 왜?”
“몰라서 물으시오?”
“···아니, 알만합니다.”
집무실 소파에 앉은 게리.
쪼르르르,
조셉 라이든 대통령이 크리스탈 유리잔에 위스키 한 잔을 따르면서.
“한잔하시겠소?”
“온더록스로.”
게리 스탁턴은 대통령이 따라준 위스키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자자, 궁금한 것이 많소. 먼저 게임에 대한 건데, 대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말씀해보시오. 필요하다면 전문 지식을 가진 학자들을 불러줄 수도 있고,”
“이상하군.”
“음? 뭐가···.”
“왜 내가 그걸 말해줄 거라고 생각하죠?”
“그러려고 온 거 아니었소?”
게리 스탁턴은 피식, 조소를 지은 후 말했다.
“당신은 자격이 없어.”
“···무슨?”
“물론 접근 가능한 정보는 있지. 그걸 알려주기 위해 내가 온 것이고.”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조셉 라이든, 즉시 주머니에 든 비상 신호기를 작동했지만···.
“소용없어. 여긴 아무도 오지 않을 거야.”
“가, 가까이 오지 마.”
“괜찮아. 금방 끝날 테니.”
우우우우웅.
휘몰아치는 기운.
“···당신도 각성 플레이어였군.”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그럼 혹시 외계인인가?”
“외계인은 무슨, 난 지구인이야.”
쿡!
게리 스탁턴은 미국 대통령의 이마를 검지로 찍었다.
“변화가 일어날 거야.”
“아!”
“눈으로 직접 봐. 그리고 생각해 내! 어떻게 지구를 구할지.”
이제 대통령도 알게 될 것이다.
닥쳐올 지구의 미래를.
‘이들이라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자신들은 실패했다.
하지만 지구는 또 모르지.
애초에 여기와 세상은 문명 발전의 양상이 서로 다르니까.
※ ※ ※
마키나 공화국 뉴팩토리 중앙 마공학 연구소.
데우스칩의 개인 연구실은 연구소 최상층에 있다.
워프 게이트를 통해 출입할 수 있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슈슛!
“안녕하세요. 데우스.”
“···음?”
인사를 했지만 살가운 표정이 아니다.
“왔던 길로 돌아가세요. 고귀하신 공작 저하.”
“···네?”
“여긴 공화국, 자넨 제국의 귀족이고, 우린 모든 계급제도를 부정합니다만.”
“왜···,”
삐쳤나?
뭘 가지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좋겠군. 망령의 침식지 정화의 대가로 작위도 받고, 땅도 받고···, 그런데 어쩌나? 우린 줄 것이 없는데.”
삐친 이유를 알겠다.
“우리 올드팩토리는 과연 정화될 수 있을는지. 끊어진 마도 공학의 맥은 영영 이을 수 없을 테고.”
계속되는 푸념.
“망령의 침식지보다 올드팩토리가 훨씬 쉬운데 말이야. 도시 하나가 침식됐는데 커봐야 얼마나 크겠어? 게다가 멍청한 마그누스 기간트가 보스고.”
결국 침식지 정화.
데우스칩이 왜 투정을 부리는지 이해는 간다.
마도 공학의 정화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올드팩토리에 접근도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니 얼마나 속이 탈까.
“엑사급 코어의 견본을 이용해 신무기도 만들었는데···,”
“정화할게요. 지금은 곤란하지만.”
순간! 고개를 획 돌리며 반색하는 데우스칩.
“···어, 언제?”
“글쎄요, 확답은 못 드리겠네.”
그때였다.
띠링!
갑자기 울리는 알림음.
- 올드팩토리 정화.
- 완료 조건 : 올드팩토리 침식지 보스 처치(0/1).
- 보상 : 정화된 올드팩토리.
‘어?’
갑자기 퀘스트?
침식된 시스템이 소통을 방해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튼 시스템의 퀘스트가 도착했다.
보상이 조금 웃기긴 하지만.
‘정화된 올드팩토리 자체가 보상이라.’
하지만 마그누스 기간트를 어떻게.
놈의 등급을 따지자면 드래곤과 같은 신화 등급.
거의 모든 지성체 침식지 보스가 다 그렇다.
물론 네크로맨서 크자누이는 해치우긴 했지만.
“빠, 빨리 말해주게. 어어, 언제 가능한가?”
“그게 사람도 모아야 하고···, 참! 신무기를 또 만들었다면서요.”
“만들었지.”
“뭐죠? 보여주세요.”
데우스칩은 파워 스틱 밤을 발명해 침식지 레이드의 신기원을 이뤄냈다.
그가 만든 신무기가 평범할 리 없다.
“따라오게.”
워프 게이트로 안내하는 데우스칩.
그리고 도착한 지하창고.
“···이거에요?”
“그렇네. 이거지.”
번쩍번쩍, 온갖 금속을 떡칠해서 만든 대형 골렘 3기.
“평범한 강철 골렘 같은데.”
“평범하다니! 그런 섭섭한 말을!”
데우스칩이 강철 골렘 하나를 손으로 쓸어가며 설명했다.
“외갑과 골격은 미스릴과 오리하르콘 합금으로 구성되어 있어. 엔진은 원본엔 미치지 못하지만 새미 엑사급 코어, 그리고 내부는···,”
잠시 뜸을 들이는 데우스칩.
“그 자체로 파워 스틱 밤이지. 골렘 하나당 약 1,000개 정도의 파워 스틱 밤 파괴력을 지닌.”
잘못 들었나?
이 골렘이 폭탄이라고?
“···혹시 이거,”
“자폭용 골렘이야. 코인으로 따지면 개당 100억 코인 정도 되겠군.”
“···.”
“이거 하나면 올드팩토리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야. 다른 하나는 잡몹을 쓸고, 나머지 하나는 보스에 타격을 줄 수 있겠지.”
미쳤다.
300억 코인으로 자폭용 골렘을 만들어?
대륙인들의 침식지 정화에 대한 집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근데 이걸로 침식지를 통과해서 올드팩토리까지 갈 수 있을까요? 이놈마저 침식당하면···,”
“그래서 에고를 집어넣지 않았어. 수동으로 조종을 해야 해.”
“아!”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조종이 안 되니까 되도록 가까이 붙어야 하고. 자폭할 때 빨리 피해야 하는 것도.”
알만하다.
인벤토리에도 들어가지 않는 거대한 크기.
침식지까지 수동으로 조종하고 터뜨릴 때, 빠르게 벗어날 수 있어야 하는 자폭 골렘.
‘나를 염두에 두고 만든 무기구나.’
이걸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존재는 자신밖에 없다.
“여기 조종기네.”
게임 패드처럼 생긴 조종기.
“자폭 골렘, 더 만들 수 있나요?”
“안 돼! 공화국이 보유한 모든 금속 재료와 코인을 갈아 넣었어. 새미 엑사급 코어를 만드는 데도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아나? 실패하면 공화국은 망할 거야.”
“···미치셨군요.”
“그만큼 간절하다고 생각하게.”
아마 파워 스틱 밤을 발명했을 때부터 착안한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죽자고 폭탄을 만들어 대더니.
‘하지만 해볼 만해.’
개당 파워 스틱 밤 1000개 위력의 자폭 골렘 3기, 드래곤 하트가 녹은 무지막지한 포스, 그리고 모든 걸 잘라버리는 강기.
이런 힘을 가지고 뭘 못 할까?
크자누이도 알고 보면 혼자 잡았는데.
“좋아요. 해볼게요.”
“오! 저, 정말인가? 언제?”
“지금.”
“당장 준비하지. 그, 그리고 올드팩토리 전체를 부숴도 되지만 될 수 있으면 옛 중앙 마공학 연구소만큼은 남겨주게나.”
“상황 봐서요.”
더불어 자신이 여기 온 용건도.
“부탁이 있는데, 이 목걸이 용도가···,”
“헉! 뭐, 뭔가! 저, 저리 치우게. 제, 제발!”
깜빡 잊었다.
렐리스가 사용했던 목걸이, 그래서 아직 침식의 기운이 남아있는 물건.
“아! 죄송해요.”
우웅!
목걸이에 포스를 집어넣으니.
파직!
팬던트에 박힌 보석들이 부서졌다.
그리하여 사라진 침식의 기운.
“휴우, 죽는 줄 알았군.”
그제야 데우스칩은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흐음, 여기 박혀있던 보석은 아마도 최고급 마정석 같았는데, 물론 침식된 마정석.”
“그런가요?”
“게다가 목걸이에 새겨진 문양이 낯설지 않아.”
“그럼 용도가···.”
한참을 요모조모 살펴보는 데우스 칩.
그러다가.
“영혼 전이 아티팩트군. ···특정 에너지를 전달하는 문양도 보이고.”
“영혼 전이? 확실해요?”
“흥! 내가 그걸 모를 리 있나? 난 에고 전문 공학자야. 에고가 뭔가? 자아, 즉 영혼이지 않나!”
“아하.”
알고 보면 데우스칩의 몸도 인간형 골렘,
자신의 에고를 골렘에 이식해서 5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니.
“연구가 필요해. 이거 5백 년 전 물건 같군. 이걸 어디서 얻었나? 이런 물건은 올드팩토리에 가야 구할 수 있을 텐데.”
“그냥 우연히···.”
알 것 같다.
게임과 현실이 섞이고 있는 상황.
그 틈을 이용해 게임 안에서 현실로 자신의 영혼을 보낸 것.
그것이 군주가 현실로 강림할 수 있는 방법.
“좀 더 살펴봐 주세요. 올드팩토리는 제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
하지만 데우스칩은 말이 없다.
이미 집중한 상태라 다른 말은 들리지 않는 모양.
그럼 공략해볼까?
마도 공학의 정수가 잠들어 있다는 올드팩토리 침식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