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3) >
변화(3)
서울 동부 구치소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저 아직 잠자고 있는 교도관들과 죽어있는 수감자 시체들, 그리고 쓰러진 상태로 꿈틀꿈틀, 경련하는 여인.
그러나 여인에게서 침식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알몸 전체가 마법 문양같은 문신으로 덮여있을 뿐.
‘한국 사람인가?’
국적이 뭐든 이대로 놔두면 곧 죽는다.
찬웅은 잠시 고민했다.
‘죽여? 살려?’
진혈의 군주 렐리스가 한 짓이지만 이 여자도 책임이 있다.
분명 렐리스의 사도일 터.
‘아무튼 침식은 사라졌···, 음?’
아니다.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뭔가 남아있다.
여자는 아닌데, ···어디지?
순간!
‘저건···,’
반짝반짝.
바닥에 떨어진 금목걸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침식의 기운.
여자의 것이 틀림없다.
찬웅이 그녀의 가슴을 도끼로 찍었을 때, 줄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나 보다.
집어서 살펴보니.
‘확실해. 침식의 기운이야.’
평범한 목걸이가 아니다.
금색의 목걸이 줄과 거기 달린 보석 장식, 그리고 전체에 새겨진 깨알 같은 문양들.
‘마법 아이템인데, 용도가 뭐지?’
예사롭지 않다.
문양만 봐도 그렇다.
게다가 목걸이에 어린 침식의 기운은?
‘뭐, 일단 넣어두자.’
찬웅은 목걸이를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아이템의 용도야 차차 밝히면 된다.
게임 안으로 가져갈 수만 있다면 마법사나 마도 공학자의 도움을 받아 분석이 가능했을 텐데.
지구에서도 현재 진(眞) 아이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터라 언젠가는 마법 문양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살려줄까?’
여자에겐 포스와 침식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한 일반인.
구태여 죽일 필요도 없고.
‘하급 치유 물약이면 충분하겠지.’
찬웅은 인벤토리에서 물약을 꺼내 그녀의 알몸에다 부었다.
치이익!
금세 아물어가는 가슴팍의 상처, 동그란 형태의 아름답고 큰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천천히 눈을 뜨는 여인.
“아, 아나타···?”
“일본?”
“나니?”
“후우,”
찬웅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아, 팀장님. 접니다. 빨리 서울 동부 구치소로 와주셔야겠네요.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니 구급차도 보내주시고, ···아뇨, 상황은 끝났습니다.”
여인은 그런 찬웅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체는 가릴 생각도 안 하고.
자신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걸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통역시스템을 이용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만···,
‘그냥 사람 올 때까지 기다리자.’
어쨌거나 렐리스는 퇴치했다.
그 과정에서 사용한 능력들.
포스나 강기는 그렇다 쳐도,
‘플레이어 킬이라니.’
분명히 기술이 먹힌 걸 느꼈다.
역으로도 적용되는 건가?
아마 그런 듯하다.
플레이어 킬은 일반 액티브 스킬이 아니라 앙증맞은 머리 따개에 붙은 특수 능력, 자신의 사도에게 빙의된 군주를 바깥에서도 처리 가능하다는 의미.
‘이렇게 생각하니 더 아깝네.’
렐리스를 놓친 것이 말이다.
뭐, 타격은 입었겠지?
‘그건 그렇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공격이라.’
두고 보면 된다.
어떻게 나오는지.
※ ※ ※
진혈의 군주 렐리스는 자신의 거처인 헤스티아 성국 북쪽 침식지 성채 안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아아아악!!!”
영혼이 찢겨나갈 것 같다.
렐리스는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 위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켜 비틀비틀 걸어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대체 뭐지?
영혼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물리력이라고?
포스가 침식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영혼 자체를 소멸, 삭제하는 힘.
“하아, 하아, 조, 조금만 늦었어도.”
필사적으로 연결을 끊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영혼이 소멸당해 세상에서 삭제되었을지도 모른다.
놈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시, 심지어 매, 매혹에도 걸리지 않았어.’
렐리스의 특기.
발현되면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종족 특유의 권능.
교도소 전체에 뿌려놓은 정신계 마법, 부족한 힘을 보충하기 위해 그릇의 알몸에다 매혹 마법진 문양까지 그려놓았는데···,
“아흑,”
타격이 크다.
이 만들어진 가짜 육체가 아니라, 이 허상의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진짜, 자신의 영혼이 말이다.
영혼이 치유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진 될 수 있으면 놈을 만나지 말아야 해.’
놈의 처치는 다른 존재에 맡기자.
마침 그 임무를 위해 밖으로 나가있는 존재가 있으니.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
‘목걸이를 파괴하고 연결을 끊었어야 했는데···.’
놈이 목걸이를 발견했을까?
발견했으면 어쩌라고.
지구의 인간들이 어떻게 목걸이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까?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최소 10년 이상은 걸릴 것이다.
뭐, 그걸 가지고 마탑이나 마키나 공화국에 간다면 모를까?
※ ※ ※
아프리카 가봉 공화국.
피에르 운게마, 아니 그린 드래곤 레지키쓰론은 열대우림, 자신의 근거지에서 태블릿을 실행했다.
피에르 운게마의 영혼은 이미 자신과 합일을 이루었다.
그가 자신이고, 자신이 그다.
“쯧쯧, 멍청한 년.”
진혈의 군주 렐리스의 역접속.
하지만 금방 연결이 끊어졌다.
아마도 케이에게 된통 당한 모양.
그녀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자는 그놈밖에 없으니까.
“섣불리 만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원래부터 그런 년이었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그래도 정신은 차렸겠지.”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케이 그놈을 자극했으니 이제부터 관심은 렐리스에게 쏠릴 터, 그럼 자신이 움직이기 편하다.
“흐음,”
이제부터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실행할 때.
현실과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 딱 적기.
‘어디부터 할까?’
지구, 특히 미국이란 나라가 타국과 전쟁할 때 자주 사용하던 전술이 있다.
충격과 공포.
그걸 고스란히 느끼게 해줄 터.
자신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침식의 기운이 지구에 퍼지면 퍼질수록 군주와 사도들의 힘이 더더욱 강해지겠지.
“게임은 무슨···,”
지구 놈들이 즐겨하는 게임.
굳이 캡슐에 접속하지 않아도 되게끔 해준다.
“어디 한번 신나게 즐겨봐라.”
※ ※ ※
서울 동부 구치소 학살 사건.
총 5명의 수감자가 살해된 중대한 사건이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 누가 했지? 박수라도 쳐 주고 싶네.
└ 착한 범죄자들이 5명이나 생겼습니다.
└ 솔직히 불쌍하지도 않다. 치매 걸린 자기 엄마 죽이고, 미성년자 강간에, 음주 살해범···.
└ 이 정도면 현상금 줘야지.
└ 게다가 교도관들은 한 명도 안 죽였다며?
아마 한동안 떠들썩할 것이다.
이로 인해 사형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고,
찬웅은 3일 동안 접속 제한이 풀려 게임에 접속했다.
카시우스 제국 폴른 스타로 가는 강철문을 열고.
화아악!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케이가 나타나자마자 팡파레가 울린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잎.
황궁 정문에서부터 그를 기다리는 카라카스 공작.
“어서 오시오. 기다렸소.”
“저 빼고 하셔도 되는데,”
“허허, 천만의 말씀. 아무튼 빨리 갑시다.”
오늘은 황제 대관식이 있는 날.
전대 황제의 장례식도 끝났고, 오랫동안 비어있던 권력의 공백을 채워야지.
이제 카시우스의 황제는 브랜든 스타리아.
제국의 모든 귀족이 모였다.
그리고 찬웅이 황궁 대전에 들어서자.
“이방인 케이는 위대하신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으시오.”
찬웅은 무릎을 꿇었다.
스러렁.
찬란한 금빛 검을 꺼내든 브랜든 스타리아 황제.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와,
“망령의 침식지 정화의 공로를 인정하는바, 이방인 케이에게 공작의 작위를 수여하노라. 반역자 에일워스가 가졌던 영지로 하사할 것이며, 봉신으로서 주군에게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선 강요치 않겠다.”
공작 작위와 영지는 그렇다 쳐도 봉신의 의무를 강요하지 않겠다라는 의미는?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말.
그리고 영지에서 나오는 이익은 고스란히 찬웅에게 돌아갈 터.
작위 수여식이 끝나자 슬쩍 다가와 말을 건네는 [와치맨] 최기병.
“축하드려요. 의무없는 영지를 받으셨으니, 공왕이 되셨네요.”
“너무 큰 걸 받았나?”
“천만에요. 망령의 침식지였던 정화된 땅을 제국에게 선물해주셨는데 그 정도는 받아야죠.”
엄청난 혜택이었다.
의무는 없고 권리만 인정 받았다.
“에일워스 공작의 영지는 제국 남부에 있었죠?”
“네, 넓고 비옥해서 곡식 생산량도 엄청나고 특히 질 좋은 포도가 자라 대륙에서 가장 커다란 와인 양조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모두가 찬웅씨 소유죠,”
그곳에서 벌어들일 수 있는 코인의 양이 얼마인가?
아마 진(眞) 마정석 광산을 능가할 터.
이제 찬웅은 세계 최고 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임 속, 지구 통틀어서,
하지만 별 감흥은 없다.
자신의 땅이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일지 몰라도 그만큼 책임질 일이 많다는 의미니까.
‘영지를 내가 어떻게 다스려?’
황도 폴른스타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만 에일워스 공작의 영지도 제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솔직히 귀찮다.
코인을 버는 건 좋지만.
‘대리인을 세워볼까?’
플레이어가 아닌 NPC 중에서.
마침 적당한 인물이 있다.
‘루트에게 부탁해봐야겠네.’
엘프의 나무 길드원들.
‘그중에 몇 명 골라서 행정관으로 임명해 영지로 보내면···.’
정보 길드원들이니 유능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 이 문제는 일단락됐고,’
현재 폴른스타는 떠들썩했다.
망령의 침식지, 새로운 황제 즉위.
플레이어들과 NPC들이 모두 어우러진 축제의 장.
황궁에서도 연회가 열리고 있었고,
하지만 찬웅은 마음이 편치 않다.
게임 속 일도 중요하지만 현실에 위협이 닥쳤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로그아웃하고 싶지만···,
그때였다.
“찬웅씨.”
“아! 이과장님, 접속하셨네요.”
“네, 어우야, 잔치네요. 잔치! 황궁은 처음 들어와 봅니다.”
APS에서 정보를 담당하는 이필동 과장이 게임에 접속해 찬웅을 찾아왔다.
용건은 감옥 안에서 살인을 저질렀던 여자에 대한 정보.
“동부 구치소에서 살인을 저질렀던 여자는 일본인이 맞습니다.”
“그래요?”
“네, 이름은 사에츠키 안나, 직업은 연예인, 일본 그라비아 모델로 데뷔해서 한때 HK48이라는 걸그룹 멤버였습니다.”
“아!”
진혈의 군주 렐리스의 사도였던 일본인 여자.
“근데 수상한 점도 있습니다. 미국 CIA에서 건너온 정보인데, 사에츠키 안나가 일본 총리의 정부(情婦)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정부(情婦)라면 애인?”
“네, 총리뿐만이 아니라 일본 내 대기업 회장과도 스폰 관계를 맺고 있답니다.”
확실히 성진국은 성진국이다.
총리하고 나이 차가 얼만데.
아버지와 딸뻘 아닌가.
그것도 그렇지만.
“확실히 위험하네요.”
“사에츠키 안나가 말입니까?”
“아뇨. 렐리스, 그녀가 거느리는 사도들을 보세요. 한국은 차기 검찰총장으로 확실시되던 차장검사 진종설이었고, 일본에선 총리의 애인, 둘 다 보통 신분은 아니죠.”
“흐음.”
“그리고 사도가 그들 둘뿐이겠어요?”
사도가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큰 위협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둘처럼 현실에서 권력을 가진, 혹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을 자신의 사도로 만들었다면?
“수사를 계속 진행해주세요. 진종설 차장 건도 다시! 혹시 다른 사도들과 접촉이 있었는지.”
“맡겨 주십시오.”
“그럼, 좀 노시다가···.”
“하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연회장으로 녹아드는 최기병과 이필동.
이 기회에 귀족들과 친분을 쌓아두는 것도 좋을 터.
‘아참! 그 얘길 안 했네.’
감옥 안에서 사에츠키 안나가 착용했던 목걸이.
인벤토리에 넣어두고 있었는데.
‘이걸 언제 주지?’
스슷!
무심코 인벤토리 안에서 목걸이를 꺼내는 찬웅.
그런데?
흠칫!
“어?”
찬웅은 깜짝 놀랐다.
‘이게 왜 여기에···,’
그 목걸이가 확실하다.
사에츠키 안나의 물건.
서울 동부 구치소에서 주워 인벤토리에 넣어둔 아이템.
하지만 여긴 게임 속이지 않나?
현실에서 획득한 아이템이 게임 속에서 나타나?
‘무슨?’
지금까진 그랬다.
게임 속에서 진(眞) 아이템을 획득하면 현실에서 그 물건을 받는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는 말이야?
‘미친!’
혹시 몰라 찬웅은 인벤토리 안을 뒤져봤다.
스슷!
그러자 허공에서 나타난 물건.
검정색 액체가 담긴 플라스틱병.
영어와 한글로 적혀진 라벨.
지구에선 흔하지만, 이곳 가상현실에선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 목이 마를 때를 대비해 편의점에서 구입해 넣어놓고 있었는데.
‘···코, 콜라.’
설마?
그것도 있을까?
찬웅은 다시 인벤토리 안을 뒤졌다.
‘···없구나.’
아쉽게도 동해 러시아 상선에서 입수했던 핵가방은 들어있지 않았다.
어쩌면 다행일는지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게임과 현실이 섞이고 있다.
현실 인벤토리와 게임 속 인벤토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