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2) >
카리브해 외딴섬 리조트.
언뜻 보기엔 그냥 휴양지 같아 보이지만 사실 조금 특별한 곳이다.
듀플렉스 스페이스 가상현실 게임의 실질 운영자는 인공지능 시스템, 하지만 게임의 특성상 현실에서도 운영자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맡은 이가 바로 게리 스탁턴.
‘운영자라 하기엔 택배 상하차 노동자지만···.’
위잉!
거대한 아공간의 틈, 그곳과 연결된 ‘차원 컨베이어 벨트’에서 작은 상자 하나가 ‘워프 마법진’으로 이동되어왔다.
‘물품 이름은···, 하급 정신 집중의 물약이군. 수량은 하나.’
상자가 배달될 장소는 이미 입력되어 있었다.
‘어디 보자, 밥 잘 안 주는 국가군.’
택배가 워프할 예정인 국가는 스웨덴 스톡홀롬.
마법진에 올라오자마자 사라지는 상자.
스팟!
‘배달 완료.’
자동화 시스템으로 육체노동의 부담은 줄였다지만 확인과 검수 작업은 직접 해야 한다.
자칫하면 아이템이 엄한 플레이어의 집에 배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르르륵, 착!
너무 길어서 무더기로 쌓인 전자 영수증 종이.
배달 완료된 물품의 목록이었다.
“젠장, 이게 무슨 생고생이야.”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다.
게임이 서비스된 이래 이렇게 물건을 많이 보낸 건 처음.
케이의 크자누이 레이드 성공.
그로 인해 내려진 축복.
엄청나게 많이 나온 진(眞) 아이템들.
진(眞) 마정석 광산에서 빠지는 물량은 단 한 장소로만 배달되지만 랜덤 D박스로 획득한 아이템은 장소가 제각각 다르다.
덕분에 게리 스탁턴의 얼굴이 노랗게 떴다.
솔직히 그도 성공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엘리 년이 카시우스 제국에 볼일이 있다며 출장 근무를 요청했을 때 별생각 없이 승낙해줬다.
‘일 끝났으면 빨리 돌아올 것이지···.’
완전히 속았다.
잘못된 선택으로 진 아이템 반출 검수 작업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되었고.
‘요망한 년.’
앞으로 보너스, 연차, 성과급, 이런 달달한 건 하나도 없다.
돌아오기만 하면 차원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세워두고 종일 일만 시켜야지.
그때였다.
띠링! 띠링! 띠링!
찌지직, 치직! 치지지지···,
“음?”
작업장 벽면에 붙은 거대 모니터.
잡음이 섞인 경고음과 함께 주르륵 올라가는 문자열.
게임 내 보안 관리 기록들.
게리 스탁턴은 급하게 다가가 눈을 게슴츠레 좁히며 경고 메시지 문자열을 해독했다.
“어? 미, 미친 새끼들이···?”
군주라 불리는 침식지 보스들, 요주의 감시대상 NPC들이 한곳에 모였다.
썩어버린 레비아탄, 타락한 다크 엘프 샤이날, 부정한 물의 정령왕 헬리오파, 진혈의 흡혈마 렐리스.
놈들은 시스템 내에서도 엄청난 양의 자체 데이터를 가진 놈들, 조금만 움직여도 감시 프로그램에 포착될 수밖에 없다.
그런 놈들이 당당하게 모인 이유는 뭘까?
당연히 서로 소통하기 위함, 예전 같았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행동을 너무나 태연하게 하고 있다.
‘확실히 시스템이 약해지긴 했군. 예전 같았으면 바로 제재가 들어갔을 텐데,’
상황이 심각해졌다.
‘변화가 생겼어.’
게리 스탁턴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
바로 케이,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망령의 침식지 정화, 따라서 다른 군주들도 가만히 있지는 못할 것이다.
“흐음,”
연이어 모니터에 나타나는 경고 메시지.
그리고,
찌직, 치지직! 치지지···,
갈수록 크게 들리는 잡음.
그리고 군데군데 깨어져 의미를 알 수 없어진 텍스트.
현재 감시 프로그램은 정상이 아니다.
그래서 저놈들이 모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당장 사도 플레이어들의 정보도 막혀있는 판국에.
“퍼킹! 시스템!”
게임 속 운영체제는 시스템 하나가 아니다.
숨겨진 시스템이 하나 더 있었다.
침식의 주범, 인간의 표현으로 규정하면 악신(惡神).
시스템과 반(反) 시스템, 나가려는 걸 막는 존재와 나가는 걸 부추기는 존재.
현재 들리는 잡음과 뒤죽박죽 깨진 글자는 반(反) 시스템의 방해 행위 일터.
‘···급하긴 급했군.’
원래대로라면 듀플렉스 스페이스 세상에서 조금 더 영향력을 키워 밖으로 나가려 했을 것이다. 그래야 온전한 힘을 가지고 현실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케이의 성공적인 공략 때문에 궁지에 몰린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는 것을 보면.
“주인님? 뭐 하세요? 아이템 검수 작업은 다 끝났···, 응?”
어느새 일을 마치고 돌아온 가디언 엘리가 모니터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이런 뻔뻔한 새끼들이···, 얘들 지금 모여서 작당 모의하고 있는 거 맞죠?”
“그래, 얘들도 다급해 하고 있어.”
“시스템 제재는요?”
“보시다시피, 그냥 적발만 해냈을 뿐이야.”
“혹시 반(反) 시스템?”
“어, 그쪽이 개입한 것이 틀림없어.”
“하아, 곧 뭔가 일어나겠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 앞에 선 게리 스탁턴과 엘리.
“방화벽이 점점 약해지고 있네요.”
“그래, 그쪽도 사활을 건 거 같아.”
“이러면 곧 탈출 러시가 일어날지도···,”
“이미 누군가는 탈출했을지도 모르지.”
변화는 시작됐다.
그럼?
“경고가 필요하겠군.”
“케이에게요?”
“아니, 이건 전 세계 국가가 공동으로 대응해야 할 문제야. ”
“그럼 누구?”
“미국 대통령, 조셉 라이든과 미팅 잡아줘.”
“네, 당장 연락할게요.”
케이는 그냥 놔두면 된다.
그는 안과 밖, 두 세계의 주인공.
가만히 내버려 둬도 모든 시나리오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일 테니.
※ ※ ※
3일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찬웅은 주요 광역시에 자신만의 개인 접속 거점을 마련했다.
폴리모프와 만들어진 신분으로, 될 수 있으면 보안이 잘 된 고급 아파트 맨 꼭대기 층에, 전세 혹은 매매 계약을 해서.
‘갑자기 다주택자 됐네.’
집집마다 캡슐을 설치하고, 문도 새로 달고 자물쇠는 여러 개를 달았다.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
무슨 일이 생겨 접속을 못 하게 되면 안 되니까.
바이크를 타고 자정이 넘는 시각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본집, 고급빌라 현관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찬웅.
그런데 갑자기 스마트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띠링!
이 밤에 누구지? 잠도 안 자나?
확인해보니.
[민도연] : 찬웅, 언제 시간 돼? 우리 한번 만나야지.
“···.”
난감하네.
그래, 한번 만나서 밥 먹기로 약속했으니까.
읽씹하는 것도 그렇고.
‘이럴 때 여배우와 밥 한번 먹는 거지.’
그래서 답장을 보내려는 순간!
“어?”
파르륵.
갑자기 느껴지는 음습한 기분.
“···무슨.”
여긴 서울.
자신의 집 앞이다.
그런데 여기서 침식의 기운이 느껴져?
파르륵, 파륵, 파다닥!
게다가 허공에서 날갯짓 소리까지 들린다.
침식의 기운을 가진 무언가가 하늘을 날고 있다는 의미인데···.
찬웅은 고개를 들어 올려봤다.
파닥파닥!
‘박쥐?’
매우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날아가는 박쥐.
팟팟!
찬웅도 움직였다.
침식의 존재를 그냥 둘 수 있나?
동시에 뽑아든 쌍도끼.
비열한 습격으로 날리려고 했지만.
‘···사라졌어.’
사라졌다기보단 멀어졌다.
침식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니까.
팟팟팟팟!
몇 번 앞으로 움직이자 박쥐가 다시 보인다.
‘뭐야? 지금 날 따라오라고 하는 거?’
그런 것 같다.
놈은 자신을 유인하고 있었다.
집에서 자신이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하,”
웃기는 놈이네.
서울 한복판에서 무슨 짓을 꾸미려고.
‘함정을 꾸민 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관없다.
무조건 따라간다.
함정이 있으면 부순다.
음모는 힘으로 분쇄한다.
자신이 복용한 드래곤 하트에 대한 예의.
영약 중에 영약을 먹어놓고 함정이나 음모 따위에 겁을 먹으면 되나!
찬웅은 도끼를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안내해봐.”
팟팟팟팟!
찬웅은 바람길 산책으로 박쥐를 따라갔다.
어느덧 커다란 건물 꼭대기로 날아오른다.
‘여긴?’
꽤나 유명한 장소.
건물들이 사방을 막고 있지만 중앙은 뻥 뚫려있는, 마치 요새와도 같은 곳.
서울 동부 구치소였다.
침식의 기운은 구치소 안쪽으로 이어져 있다.
‘들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결론은 가보는 걸로.
구치소답게 통로마다 철문이 잠겨있었지만 그것이 장애는 되지 못한다.
철컥!
만능 열쇠.
포스의 기운이 잠금장치 안으로 스며 들어가 강제로 열어버린다.
기계식이든, 디지털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잠그는 건 물리적인 방식이니까.
내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쓰러져있는 교도관들.
‘이런!’
살며시 다가가 목덜미에 손을 대어보니.
‘후우, 다행이야.’
살아는 있다.
잠시 정신을 잃은 모양.
‘그런데 이 피 냄새는 뭐지?’
공기 중으로 타고 들어오는 짙은 혈향.
찬웅은 피 냄새를 따라갔다.
철컥!
또 열고.
철컥, 철컥, 철컥!
감방 안의 풍경이 보인다.
죄수복을 입고 바싹 마른 미라처럼 드러누운 수감자.
이번엔···,
‘죽었어.’
교도관은 살아있지만 죄수들은 죽은 모양.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여기도 시체, 저기도 시체.
‘대체 누가···.’
빌런?
아니면 사도 플레이어?
그때였다.
“수감번호 4589, 죄목은 존속살해, 아내와 함께 치매에 걸린 자신의 어머니를 아파트 베란다에서 밀어버린 놈이야.”
갑자기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여성의 음성이었다.
“옆방에 있는 2267번은 음주운전으로 아직 어린 청년을 차로 쳐 살해했지. 차로 박은 걸 알고 다시 돌아와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한 번 더 쳤어. 살아있는 게 더 골치 아프다나?”
어디서 들려오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목소리는 사방에서 울렸다.
침식의 기운도 구치소 전체에 퍼져있었고.
“다른 방, 수감번호 1518번은 미성년자 약취유인, 강간 상해범, 항소해서 형이 줄어들었는데 아직도 뉘우치지 않고···,”
찬웅은 끝까지 듣지 않고 말을 끊었다.
“누구야?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인사차, 사람을 보러왔는데 선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사람 죽이는 게 선물이라···.”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고.”
“누군지 먼저 밝혀.”
대답하는 순간에도 찬웅은 목소리의 위치를 찾았다.
“봐! 이 새끼들, 세상을 어지럽히는 진짜 몬스터를 말이야.”
“닥치고, 누군지 밝히라니까.”
“세금으로 이 쓰레기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애초부터 잘못되지 않았어?”
집중하자.
놈은 분명 가까운 곳에 있다.
“나한테 감사해야 해. 세금을 아껴줬잖아. 갱생의 여지가 없는 몬스터들을 죽인 거. 그로 인해 놈들이 풀려났을 때 생겨날 재범의 위험도 줄였고.”
슬슬 좁혀진다.
방향은 오른쪽, 거리는···.
“이런 놈들은 방치하면서 아무런 죄도 없는 세상 속 주민들에겐 왜 그렇게 분노하는 거지?”
“···.”
“분노의 방향이 잘못된 거 아냐?”
세상 속 주민이라.
이제 알겠다.
지금 말하는 존재가 누군지.
“난 공존을 원해. 그러려면 실제 세상이 깨끗해지길 원하고. 어떻게 보면 너와 나의 생각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지구가 망하는 걸 바라지 않아.”
스르릇.
찬웅은 쌍도끼를 꺼냈다.
조금 더 말을 시켜보자.
“너 말고 다른 군주들도 같은 생각인가? 렐리스?”
“···.”
잠시 흐르는 침묵.
이윽고.
“어떻게 알았지?”
“시체를 보고, 하나같이 창백하잖아. 피 냄새는 나는데, 혈흔이 없고, 그럼 빨렸다는 소리겠지. 흡혈귀에게.”
“아하!”
“네가 보낸 사도도 만나봤고, 결국 내 손에 죽었지만.”
진종설 차장 검사.
놈이 바로 진혈의 군주 렐리스의 사도였다.
“감히 인간보고 쓰레기라고? 데이터 쪼가리 주제에.”
“깔깔깔, 인간이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그러는 넌 왜 자꾸만 바깥으로 튀어나오려는 건데?”
“말했잖아. 난 깨끗한 세상을 원해. 깨끗한 피가 더 맛있거든. 이런 쓰레기보다.”
“잘도 먹어놓고서는,”
“아아, 때로는 맛없는 음식이라도 먹어야 할 때가 있어.”
어디 있는지 알겠다.
남은 건 급습.
“사실 난 선전포고를 하러 온 거야. 이젠 널 죽이지 않고서는 탈출이 불가능하거든.”
팟!
“넌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공격을 받게 될 거야. 우리가 네가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같은 인간들에 의해 배신을 당하고 뒤통수를 맞아서···.”
팟팟팟팟!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순간 가속, 구치소 안을 바람처럼 휩쓰는 찬웅의 신형, 그리고!
“찾았다.”
“음?”
츠피릿!
동시에 루인의 앙증맞은 머리 따개가 하얀 알몸을 그대로 드러낸 나체 상태의 젊은 여자 가슴팍을 파고 들어갔다.
콰악!
“까악!”
콰직!
“계속 지껄여봐.”
찬웅은 앙증맞은 머리 따개를 여인의 몸체에 더 깊게 박아넣었다.
사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쏟아 넣었다.
침식을 먹어 치우는 포스, 드래곤 하트로 더욱 짙어진 강기, 그리고 여기서 통할지는 모르지만 플레이어 킬도.
그로 인해 렐리스, 아니 렐리스가 역접속한 사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 어째서?’
자신의 위치를 찾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들킬 거라 예상했으니까.
죽어도 상관없다.
이 여인은 단지 자신의 영혼을 담는 그릇.
하지만 그대로 느껴지는 격렬한 고통, 이건 육체에 전해지는 통증이라기보다는···,
‘아파.’
영혼을 긁어대는 소름 끼치는 기운.
“꺄아아아아악!!!”
사도가 지르는 비명이 아니다.
진혈의 군주, 흡혈귀의 여왕, 렐리스가 지르는 영혼의 비명이었다.
“그, 그만! 머, 멈춰.”
절대 안 되지.
조금만 더, 조금만,
“꺄아아악! ···아, 아파.”
순간!
툭!
하고 끊어지는 침식의 기운, 소멸의 느낌은 아니다.
연결 단절 같은데···.
‘놓쳤나?’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