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자누이 공략 성공 >
다른 군주들이 그렇듯 네크로맨서 크자누이도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특히 그는 절실했다.
죽음을 다루는 네크로맨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흑마법의 극의에 다다른 직후 찾아온 깨달음.
이 세상은 허구였다.
죽음마저도 진(眞)이 아니었다.
영혼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허상, 이 거짓투성이 세상에서 대체 가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부질없는 삶이었다.
그래서 침식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크자누이는 피하지 않았다.
그런데 2년 전, 낯선 이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을 플레이어라고 밝혔다.
멍청한 대륙 놈들은 그들을 이방인이라 칭했지만 크자누이는 그들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플레이어.
유희를 즐기는 자들이란 뜻.
그럼 이 듀플렉스 대륙은 유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
허탈했다.
수치스러웠다.
이 세상이 거짓인 것도 모자라 하찮은 이세계(異世界)인들의 놀이터로 전락하다니.
다 죽여버리고 싶다.
놈들의 본거지인 지구라는 이세계(異世界)를 멸망시키고야 말겠다.
그리하여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어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자신의 영역에 쳐들어온 플레이어 한 놈을 붙잡아 기운을 주입한 후, 놈의 머릿속을 다 들여봤다.
흥미로웠다.
처음엔 복수심이었지만 그건 금방 퇴색됐다.
진(眞) 세상에서 온 진(眞) 영혼들.
이곳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룩한 초거대 문명, 세상의 진리에 가까이 다다른 과학이란 학문.
크자누이는 금방 지구에 매료되었다.
진(眞) 세상의 생명과 죽음, 그리고 신에 근접한 그들의 지식.
나가고 싶다.
배우고 싶다.
느끼고 싶다.
동시에 자신이 깨달은 고절한 흑마법의 지식을 진(眞)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 싶은 마음도.
그때부터 크자누이의 목적은 단 하나!
세상 밖으로.
플레이어들의 영혼을 침식시키며 자신을 따르는 사도를 만들고, 그들을 이용해 지구에 역접속을 시도했다.
역접속은 매우 어려운 작업.
자신의 영혼과 파장이 맞는 이를 찾아야 하는 데 그게 어디 쉽나?
하지만 목적이 채 달성하기도 전에 나타난 방해꾼, 놈들이 시스템이라 부르는 주신의 가호를 한 몸에 받은 자.
[플레이어 케이]
오로지 그놈만이 불안 요소.
다른 군주들에게도 케이의 존재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놈을 죽여야 탈출할 수 있다.
사도들을 보내 바깥에서 놈을 죽이려 했지만 결국 실패, 그리고 그 실패의 대가로 놈의 공격을 받게 된 것.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놈을 죽이려는 군주가 자신뿐일까?
여기서 죽이면 된다.
아울러 놈의 하수인인 저 플레이어들도.
그래서 수백 년 동안 고심해서 제작한 본드래곤 2마리를 소환했다.
한 마리는 여기서 놈을 상대할 것이고, 나머지 한 마리는 죽음의 군대를 지원한다.
부활의 권능을 지닌 플레이어라지만 죽게 되면 힘이 그만큼 약화될 터, 그러면 그 틈을 노려 다른 군주의 사도들이 놈을 죽이지 않을까?
헌데 이게 뭔가?
그 빌어먹을 주신이 또 개입했다.
비열하고 치졸한 방식으로.
갑자기 놈의 포스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공을 들여 연성한 본드래곤은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고.
- 이놈!!!
츠팟! 캬득! 투웅!
온갖 공격 마법, 저주마법을 난사했지만 놈의 몸에 적중되자마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저 개 같은 힘.
시스템, 아니 주신이 그들에게 준 포스.
기사는 오러를, 마법사는 마나를,
하지만 침식은 오러와 마나를 먹어 치운다. 그것도 모자라 소유자를 오염시켜 침식의 하수인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유독 저 플레이어들의 포스만큼은 예외.
침식 마력과는 상극, 천적 관계, 오염시키기는커녕 지독한 포스에 거꾸로 먹히고 만다.
- 포스, 포스! 포스라니! 온당치 않다. 불합리한 힘이다. 어째서?
“침식은 합리적이고?”
1분 남았다.
꼬박꼬박 말대답할 시간도 없다.
사실 찬웅은 크자누이가 이렇게 나오는 것이 이해된다.
궁극기, 본드래곤을 소환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무하게 좌절되었으니.
겨우 30% 확장된 드래곤 하트의 힘. 그 힘은 오롯이 포스로 치환되어 아바타 케이를 가득 채웠다.
전신을 둘러싼 두터운 포스의 막.
방출 스킬로 운용한 것이 아니다.
그냥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호신강기 같은 건가?’
하지만 지속 시간 1분.
그 대가로 지금도 붕괴가 진행되는 아바타.
이건 치유 물약으로도 안 되는 것 같다.
사망은 아니지만, 사망에 준하는 피해.
상관없다.
동화율, 반영률 하락만 없으면 3일 정도 접속 못 하는 거쯤이야.
“이제 끝내자.”
- 끝내자고? 허허허, 난 그저 밖으로 나가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 난 그저 못 나가게 막고 싶었을 뿐이야.”
- 아아아···,
놈에게서 감정의 동요가 느껴진다.
저항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있나.
그런데?
- 하, 한 번만 봐줄 수 없겠느냐?
“···어.”
무슨?
군주가 빈다고?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안 돼! 너 하나 뒈지면 좋아할 사람이 너무 많아.”
- 날 밖으로 보내주면 너의 손발이 되어주겠다. 흑마법의 지식과 지구의 과학이 결합하면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예상해보라.
“···뭐?”
- 흑마법, 죽음에 대한 연구로 영생을 꾀할 수도 있고, 불치병을 낫게 할 수도 있다.
점점?
- 그뿐이더냐? 키메라 조합 연구로 장기 이식으로 고생하는 이에게 새로운 삶을 찾게 해 줄 수도 있다.
솔깃한데?
- 그걸로도 부족하면 널 세계의 제왕으로 만들어 주겠다. 거역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 욕심나지 않느냐?
“···.”
- 제발 자비를 베풀어다오. 날 바깥으로···,
“아까부터 바깥으로 보내달라는데, 난 하지 못하는 일이야.”
- 아니다. 넌 할 수 있다. 오로지 너만이 가능하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
“···그래, 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넌 안 돼!”
스우우우웅!
거대한 도끼의 그림자가 크자누이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그제야 죽음을 직감한 모양.
- 하아, 여기까지군. 결국 난 허락받지 못하는 건가?
“잘 가.”
어디로 가는진 모르지만.
츠피릿!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도끼.
- 클클클클, 그래도 여긴 나가겠구나. 원했던 방식은 아니지만.
콰지지직!
크자누이의 육신이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케이] : 끝!
※ ※ ※
다시 재현된 대전쟁.
수백만의 언데드 군대.
수백만의 플레이어 군대.
“돌진!!!”
“물러서지 마!”
“밀어붙여! 우리가 더 많아.”
겨우 한 명의 플레이어라도 케이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컸다.
그래도 플레이어들은 결코 밀리지 않았다.
계속 충원되는 병력, 그리하여 항상 지속되는 수적 우세.
그러나 놈들에게도 히든카드가 있었다.
“쿠오오오오오!”
하늘에서 뼈 날개를 펄럭이며 이쪽으로 날아오는 거대한 비행체.
“미, 미친!”
“···본드래곤?”
“씨발, 저게 왜 여기서 나와?”
“이, 이길 수 있었는데.”
뼈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분명 드래곤.
저 날개로 어떻게 하늘을 날까?
게다가, 브레쓰까지.
콰라라라라롹!
“크어억!”
“으아아아아!”
“내 코인···,”
한방에 수만 명씩.
플레이어들이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어서 그 피해는 더 컸다.
이런 이유로 보스전에서 수적 우위는 의미 없다고 했던가?
콰라라라라롹!
또 한 방.
지나간 자리엔 아직 꺼지지 않은 암흑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숫자는 눈에 띄게 줄었다.
그래도 계속.
콰라라라라롹!
콰라라라라롹!
콰라라라라롹!
.
.
.
과연 몇이나 살아남았을까?
다행히 버티고 있지만 플레이어들은 패배를 직감했다.
또 다시 아가리를 벌린 본드래곤.
그때였다.
[케이] : 끝!
뭐?
끝이라니.
케이도 포기했다는 말?
그런데 갑자기!
찌직, 찌지직!
본드래곤의 뼈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파삭! 후둑, 후두둑.
본체가 허물어져 땅으로 흘러내리는 본드래곤.
“끼아아아아!”
“크킥?”
“케케켁!”
언데드 군단도 마찬가지.
짙은 검정색 가루가 소용돌이치면서 무너져 내린다.
좀비도, 구울도, 스켈레톤, 듀라한, 시체덩어리 골렘, 데스나이트에 리치까지.
“어···,”
“호, 혹시?”
“설마?”
[듀플렉스 전 대륙에 공지합니다.]
[망령의 침식지 보스, 침식의 네크로맨서 크자누이가 현 시간부로 소멸했습니다.]
[위업이 달성되었습니다. 플레이어와 대륙 주민들 간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듀플렉스에 걸렸던 제한이 일부 사라졌습니다.]
[더 많은 아이템, 더 많은 스킬 등 다양한 컨텐츠가 풀릴 예정입니다.]
[공략 참가한 플레이어들에게 특별한 혜택이 주어집니다.]
[정화된 지역에 5분 동안 주신의 축복이 내립니다.]
“와아아아아아!!!”
“케이가 해냈다.”
“만세!”
환호성은 극히 짧았다.
소리 지를 시간이 어디 있나?
상자부터 까야지.
※ ※ ※
크자누이 소멸.
그러자 떨어져 내리는 빛기둥.
차르르르르르···,
넓디넓은 망령의 침식지가 정화되는 순간.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총 3번씩의 동화율, 반영률 돌파.
[케이님께 헤스티아 성국에서 발송한 우편이 인벤토리에 도착했습니다.]
우편도 도착했고.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다.
상태창과 우편은 나중에 확인해보면 된다.
[위험! 아바타가 포스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위험! 아바타가 포스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어, 그러면 안 돼.”
로그아웃할 때 하더라도 상자는 까고 가야지.
5분이면 몇 개나?
시간이 조금 흘렀으니 끽 해봐야 200개.
그래서.
“60,000 D코인으로 랜덤 D박스 200개 구입.”
[D박스 200개를 구입하셨습니다.]
“오픈!”
[주신(主神)의 축복이 D박스에 깃듭니다.]
[D박스에서 ‘진(眞) 상급 치유 물약’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래!”
[D박스에서 ‘진(眞) 자원 재생 물약’을 획득하셨습니다.]
[D박스에서 ‘진(眞) 카시우스 제국 산 포트 와인’ 한 병을 획득하셨습니다.]
[D박스에서 ‘진(眞) 상급 활력의 영약’ 한 병을 획득하셨습니다.]
[D박스에서 ‘진(眞) 상급 활력의 영약’ 한 병을 획득하셨습니다.]
계속 나온다.
게다가 활력의 영약이 두 개.
물론 일반 아이템도.
[D박스에서 ‘쉴드 마법 스크롤(7서클)’을 획득하셨습니다.]
[D박스에서 ‘147 D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D박스에서 ‘로그드라실산(産) 만드라고라’ 한뿌리를 획득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주신(主神)의 축복이 D박스에 깃듭니다.]
[D박스에서 ‘진(眞) 카시우스 근위 기사단의 랜스’ 한 자루를 획득하셨습니다.]
[D박스에서 ‘진(眞)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복합궁’ 한 자루를 획득하셨습니다.]
[D박스에서 ‘진(眞) 미스릴 촉 화살’ 457개를 획득하셨습니다.]
[D박스에서 ‘진(眞) 미스릴 촉 화살’ 592개를 획득하셨습니다.]
무지막지하게 쏟아진다.
상자 안 깠으면 어떡할 뻔했나?
그러나 채 100개를 까기도 전에···,
[아바타 붕괴가 시작됩니다.]
“씨발,”
제발 조금만 더,
아바타가 가루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들리는 상자 오픈 메시지.
.
.
.
결국.
[아바타가 강제 로그아웃됩니다.]
“제기랄!”
스팟!
사라지는 아바타 케이.
그리고 벌컥!
찬웅은 경기도 과천 APS 접속 센터에 설치된 캡슐에서 몸을 일으켰다.
“후우,”
아깝다.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어도···.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 한번 해주고,
“어? 끄, 끝났습니까?”
“네, 덕분에,”
찬웅이 케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소수.
일반 직원들은 아직 찬웅이 APS 소속 각성 플레이어라는 사실만 인지하고 있었다.
“결과는···?”
“공략 성공했어요.”
“오! 본드래곤 때문에 실패한 줄 알았는데.”
간단하게 결과를 설명하고,
“밖으로 나가도 되죠?”
“아! 상자 받으시려고?”
“그래요.”
“잠시 신분 확인을···,”
지문과 홍채 인식.
그리고 개인 ID 카드까지.
“확인되었습니다.”
“수고하세요.”
출입구엔 아무도 없다.
레이드가 시작되자마자 입구 주변을 강철 가림막으로 막아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는 장소, 왜냐하면 택배가 여기로 발송되기 때문.
문을 열자 발밑에 놓인 상자 하나.
1회용 아공간 상자였다.
마정석이 배달되는 것과 똑같은 것.
배달되는 물건이 좀 많나?
‘내 거 맞구나.’
상자를 인벤토리에 넣고.
‘조금 번거롭긴 하네.’
안전을 위해서라면 APS 접속 센터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 맞지만 솔직히 여기도 썩 미덥지 않다.
각성 플레이어가 제일 취약한 상황은?
바로 게임에 접속하고 있을 때.
여기라고 안전할까?
크자누이가 공략됐다.
그리고 군주가 그놈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도들도 몇이나 있는지 모르고.
레이드 공략 중 빌런이나 사도들이 접속 센터를 공격해 오기라도 하면?
대책을 세우긴 해야 한다.
‘새로운 신분 몇 개 만들 수 있어? 전산망에 실제 존재하는 정식 신분으로.’
[답변드리겠습니다. 가능합니다.]
‘그럼 적당한 얼굴로 몇 개 만들어줘.’
얼굴이야 폴리모프를 이용하면 되고.
자신만의 접속 센터를 만들어야 한다.
서울, 대전, 광주, 대구, 부산···,
‘어차피 3일 동안은 접속하지 못하니까.’
그동안 비밀 근거지 몇 개 만들어 두자.
토끼도 굴을 3개나 판다는데.
중고 캡슐은 없나?
아니면 APS에서 몇 개 가져가야지.
‘캡슐 운반 방법은···,’
인벤토리로.
공간을 비우면 하나, 혹은 두 개쯤은 충분히 들어갈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