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위 계승전(1) ( 편수 수정 완료) >
황위 계승전(1)
듀플렉스 스페이스 가상현실 게임은 흔한 판타지 소설과 완전히 다르다.
달달한 판타지 영지물 시도는 초반부터 막혔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이곳에서 지구의 과학 문명을 이식한다고 가정해보자.
NPC들에게 과학 이론을 설명한다거나, 지구의 과학이 적용된 발명품을 함께 만들어 본다거나.
그러나 불가능하다.
NPC에게 이론조차 이해시킬 수 없다.
플레이어가 직접 물건을 만들어도 작동 자체가 안된다.
처음부터 시스템이 막아뒀기 때문이다.
이 세계 문명의 수준을 발전시키는 건 온전히 NPC의 몫.
그런데 화약 비슷한 물질도 없는 세상에서 파워 스틱 밤이란 폭탄이 만들어졌다. 이건 거의 혁명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
듀플렉스 스페이스 세상에선 오파츠 같은 물건, 지구의 폭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강력한 위력이라, 경험하지 못한 NPC들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데우스칩이 케이를 통해 소개장으로만 폭탄을 판매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
그런데 중국도 그렇고, 러시아도 그렇고, 제 눈앞의 욕망에만 눈이 멀어 NPC를 죽이는 데 폭탄을 사용해?
그래서 판매 제한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찬웅도 데우스 칩을 직접 찾아가 소개장을 들고 와도 파워 스틱 밤을 당분간 판매하지 않도록 요청했다.
러시아에만 국한하는 건 부족하다.
다른 나라도 알아야지, 왜 판매 중단 조치가 내려졌는지.
찬웅을 만나 보고하는 최기병.
“전부 통보했습니다.”
“반응은 어때요?”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미국은 매우 놀라는 눈치입니다.”
이해가 간다.
폭탄을 사용해 가장 먼저 단독 침식지 공략을 성공시킨 나라가 바로 미국.
슬슬 다음 침식지를 공략하려던 시점에서 판매가 중단되었으니.
“이유는 말해줬습니까?”
“슬쩍 흘렸습니다. 콕 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카시우스 제국 황위 계승 분쟁에서 폭탄이 사용됐다는 정황이 있다, 이 정도로만.”
“그 정도면 다 알려준 거 아닌가요? 걔들도 슬라브 전사의 주 활동 지역이 어딘지 알고 있을 텐데.”
“뭐, 그렇긴 합니다.”
이번 긴급 조치로 인해 침식지 공략에 문제가 생겨도 어쩔 수 없다.
초반에 잡아두지 않으면 같은 상황이 계속 발생할지도 모른다.
※ ※ ※
[남작 슬라브 전사] 미하일 두가예프는 대륙 최고 상단, 포밀턴 상회 상단주 에드 포밀턴을 만나고 폴른스타에 임시로 마련한 거처로 돌아왔다.
“별일 없었지?”
“삼황자 쪽은 조용합니다. 하지만 무척 우왕좌왕하고 있을걸요?”
“흐흐흐, 그럴 수밖에 없지. 크게 한 방 먹었으니까.”
어리석은 놈들이다.
그래봐야 NPC 아닌가?
아무리 인공지능이라도 미리 입력된 자료에 의해 행동하는 데이터 쪼가리.
반면 자신들을 아니다.
냉전 시대를 거쳐 그 노하우가 차곡차곡 축적된 러시아 정보국.
현실 러시아 정보국보다 게임 속 요원들이 더 뛰어나다.
정예 요원들을 모조리 듀플렉스 스페이스 플레이어로 투입해 오히려 실제 현실 러시아 정보국은 수준이 현저하게 낮아져 있었다.
“참! 혹시 폴른스타에서 활동하는 정보 길드가 있나?”
“몇 개 있는 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한번 알아봐. 그들이 접촉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조사가 끝나면 자료 정리해서 보고하고.”
“무슨 일이신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
식당 2층에서 정보국 플레이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두가예프는 분명 인기척을 들었다.
나가보니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사일런스 결계 마법 스크롤을 사용하길 잘했어.’
현실이든, 게임 속이든, 불리한 전황을 뒤엎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정보전,
그건 자신 있다.
명색이 러시아 정보국인데.
“겨우 한 번의 성공일 뿐이야,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신중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두가예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나?
이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특히 플레이어가 NPC와 인연을 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케이라는 이레귤러가 있긴 하지만
병에 걸려 2년째 누워있는 현 황제, 카인 스타리아가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회는 언제나 혼란 상황에서 만들어진다.
두가예프는 은밀하고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카시우스 제국 황위 계승 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힘이 약한 사황자 세력에게 접근해, 그들의 무력 기반이 되어주는 동시에 정치적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플레이어가 무력 기반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물론 NPC에 비하면 플레이어는 약하다.
그러나 그것도 기사들이나 마법사들 같은 강한 자들에게 국한될 뿐, 보통 NPC들에겐 플레이어의 무력도 제법 효과가 있다.
수적인 우세와 불사의 능력도 한몫했고.
그런데 얼마 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이게 다 케이 덕분.
고의로 영지전을 유도해 삼황자의 무력 기반 중 하나였던 루카스 몬테규 후작 휘하 정예 기사단 100명을 몰살시켜 버린 것.
파워 스틱 밤을 지닌 러시아 정보국 플레이어들이 자폭 공격을 감행한 결과였다.
자폭해도 플레이어는 3일 후에 다시 살아난다.
당연히 NPC는 영영 죽는 거고.
그런 면에서 파워 스틱 밤은 침식지 공략 이외의 용도가 하나 더 있었다.
대(對) NPC용.
‘정말이지 이걸 팔아줘서 너무 고마워.’
카시우스 제국을 삼키면 막대한 코인이 매년 들어올 터, 전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경제제재로 고통받는 러시아를 위해 두가예프는 뭐든 할 수 있었다.
그깟 진(眞) 마정석?
코인으로 사버리면 되지.
그런데,
똑똑
“국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들어오는 플레이어.
게임 속 활동보다는 현실에서 주로 활동하는 요원인데···,
“말해봐! 무슨 일이야?”
“그게···, 한국 APS에서 파워 스틱 밤 보유 현황을 공개하라고 통보가 왔습니다.”
“뭐?”
갑자기?
“현황을 공개하라니, 어떤 식으로?”
“만나서 눈으로 확인시켜 달랍니다.”
“침식지 공략하다가 소모했다고 그러면 되잖아.”
“그, 그것도 영상 증거를 보여 달라면서,”
두가예프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최기병 그놈이 왜?
“영상 같은 거 안 찍었다고 해.”
“이미 그렇게 말했지만 어떤 침식지를 공략 시도했는지 알려달라고 해서, 직접 탐문 조사까지 해보겠답니다.”
“···탐문 조사까지?”
두가예프가 최기병에게 받은 소개장은 두 장, 장당 100개의 파워 스틱 밤을 구입할 수 있다.
그래서 200개를 확보했었다.
그중 30개는 중국에다가 비싼 가격으로 넘기고, 70개는 루카스 몬테규 후작과의 영지전에 소모했다.
그래서 남은 건 100개.
“모른다고 그래! 팔았으면 됐지, 무슨 확인까지?”
“응하지 않으면 소개장을 팔지 않겠다며···, 그리고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마키나 공화국에서도 파워 스틱 밤 판매가 잠정 중단되었답니다.”
“···미친!”
설마?
“파워 스틱 밤 보유 현황 공개 요구는 우리 러시아에게만 왔나?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빨리 알아봐!”
느낌이 쎄하다.
혹시 냄새를 맡았나?
그럴 리 없다.
“제기랄!”
일단 최기병을 만나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한다.
파워 스틱 밤이 100개 정도 남아있지만 대업을 이루기 위해선 턱없이 부족한 수량, 그래서 코인을 확보하는 대로 몇 장 더 사두려고 했는데.
‘혹시 중국 놈들 때문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두가예프도 스톤 포지에서 파워 스틱 밤이 사용됐다는 사실을 들었다.
‘멍청한 칭챙총!’
순조롭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래도 아직 100개는 남아있으니까···,’
이거 가지고 어떻게 해봐야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물량을 구하든가.
※ ※ ※
카시우스 제국에서 가장 권세 있는 귀족 가문을 꼽으라면 누구나 카라카스 공작가를 가리킬 것이다.
오백 년 전, 카시우스 제국의 검, 전설의 그랜드 마스터, 검신(檢神) 롤랑 카라카스 공작을 배출한 가문, 그러나 최근 성세는 예전만 못하다.
그래서 이번 황위 계승전에서도 카라카스 공작가가 밀고 있는 황자가 있었지만 그다지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실정.
현 공작가의 가주, 알폰소 카라카스 공작은 요즘 심기가 편치 못했다.
최근 벌어진 영지전에서 삼황자 세력 루카스 몬테규 후작의 기사단이 전멸당한 사건 때문에, 그것도 이방인 출신의 귀족, [슬라브 전사]라는 남작에게 말이다.
물론 [슬라브 전사]도 카시우스 제국에서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 신분, 그래서 서로 동의하에서 벌어진 영지전은 합법이다.
수상한 건 영지전 결과.
이방인들이 기사단 100명을 몰살시켰다는 것, 이게 말이 되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알아봐야 한다.
제국 내부가 아닌 외부의 세력이 개입했다면?
비록 삼황자가 자신이 밀고 있는 쪽은 아니지만, 제국의 기강을 위해 공작가가 직접 나설 것이다.
제국 정보국이 있지만 그곳도 정치에 오염된 곳, 각 황자들의 심복이 바글바글한 곳이라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터, 그래서 민간 정보 길드에 조사를 의뢰했다.
나름 유명하다는 엘프의 나무 길드.
오늘은 그들과 만나 결과를 듣기로 약속한 날.
그런데 직접 찾아와 달란다.
때문에 알폰소 카라카스의 기분은 더더욱 좋지 않았다.
빈민가의 어느 허름한 집 거실 테이블에 앉아 정보 길드의 수장과 마주한 카라카스 공작.
“날 여기까지 부른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있습니다. 공작님.”
“그렇겠지.”
뼛속까지 귀족인 카라카스.
오만한 듯하지만, 자연스레 나오는 위엄, 절제된 말투.
“하지만 그전에!”
알폰소 카라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찔, 경계하는 루트.
“왜 갑자기···.”
“쥐새끼는 처리하고!”
검집에서 뽑혀져 나오는 은빛 미스릴 롱소드, 발검과 동시에 우윳빛 검강으로 덧씌워졌다.
그리고 서슴없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벽을 향해 냅다 검을 휘두르는 카라카스 공작.
츠피릿!
“감히 내 앞에서 은신을 해? 건방진!”
“헉! 자, 잠깐!”
길드장 루트는 깜짝 놀랐다.
알폰소 카시우스,
비록 오백 년 전 그의 선조인 그랜드 마스터 롤랑 카라카스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지만 알폰소도 소드 마스터.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는 자르지 못하는 것이 없다. 게다가 경지를 뛰어넘은 검술까지 더하면···,
순간!
퍼엉!
집 전체를 울리는 강렬한 파공음.
“음?”
카라카스는 깜짝 놀랐다.
‘···오러 블레이드가,’
막혔다고?
그럴 리가,
동시에 스르륵, 모습을 드러낸 찬웅, 쌍도끼를 교차해서 검을 막고 있었다.
‘은신막이 이렇게 쉽게 발각되다니.’
일종의 실험이었다.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황궁으로 몰래 잠입한다고 가정했을 때 은신막이 효과가 있을까?
알아채지 못한다면 잠입을 시도해볼 참, 하지만 금방 들켜버렸다.
다짜고짜 검을 날려오는 카라카스,
‘소드 마스터가 거저 얻은 건 아니었어.’
오러 블레이드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무심하게 위에서 아래로 그어지는 검, 상대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피할 수 없도록, 전 방위를 점하는 신묘한 검술.
‘로그아웃될뻔했잖아.’
그래도 간신히 도끼로 막았다.
우우우우웅!
찬웅의 도끼에서 일어나는 강기, 그리고 카라카스 공작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러 블레이드.
“놈!”
공작의 검이 쭉 늘어나더니 정확히 찬웅의 목젖을 노리고 찔러 들어온다.
파앙!
또 한 번 일어나는 강기의 충돌.
팟!
몸이 풀린 찬웅은 바람길 산책으로 카라카스의 뒤를 점했다.
그러나 뒤에도 눈이 달렸는지,
휘릿!
몸을 반 바퀴 회전해서 베어오는 공작의 검.
팟!
츠피릿!
강기 서린 도끼가 방울뱀처럼 휘어져 날아 카라카스의 관자놀이를 노렸지만,
퍼엉!
그보다 더 빠른 검이 도끼를 걷어낸다.
팟팟!
하지만 찬웅은 그 찰나의 순간에 거리를 좁히고 공작의 정수리를 도끼로 찍자.
파앙!
공작은 검신의 옆면으로 도끼를 막아내면서 동시에 상단베기.
츠핏!
팟팟팟!
루트는 입에서 침이 질질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불과 2, 3초 안에 벌어진 케이와 카라카스의 공방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런 광경은 평생 처음.
소드 마스터와 암살자 루인의 제자 간의 숨 막히는 결투.
“누구냐 넌?”
잠시 숨을 고른 카라카스 공작이 매서운 눈초리로 찬웅에게 물었다.
“왜 너 같은 실력자가 은신 같은 치졸한 수법으로 몸을 숨기고 있던 거지?”
“뭐, 나름 사정이 있어서.”
“사정이 무엇인진 잘 모르겠다만 그냥 넘어갈 순 없게 됐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당했으면 반드시 갚아주는 게 내 성미라.”
급격히 소모되는 포스.
한 번 더 오러 블레이드가 날아오면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호승심이 치솟아 오른다.
소드 마스터 알폰소 카라카스.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그와 대결을 할 수 있다는 건 매우 소중한 경험.
하지만,
“이, 이러지 마시고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길드장 루트가 두 사람 사이를 끼어들었다.
“비켜라!”
“공작님, 이분은 공작님을 뵙고 싶어서 오신 분입니다. 싸우기 전에 대화를 나눠보시는 것이···.”
“대화는 무슨! 그리고 아무리 마스터라도 근본도 없는 자와 이야기를 나눌 만큼 한가하지 않다.”
“자중하십시오. 이분을 해치게 되면 공작가가 위험해질 수도.”
“하! 어이가 없구나. 하찮은 도둑놈이 감히 날 협박해? 그래, 한번 들어나 보자꾸나. 넌 누구냐?”
공작은 검 끝을 찬웅에게 겨눈 채 매섭게 추궁했다.
“나? 이방인.”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스윽, 나타나는 이름표.
“헉!”
[☆케이&스톤포지☆ 케이]
이름표를 멍하니 바라보는 알폰소 카라카스.
그의 검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졌다.
“···케이?”
“맞아. 내 이름.”
꿀꺽,
알폰소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야 이해했다.
공작가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실력도 실력이지만,
만에 하나 저 케이라는 이방인을 죽였다면?
그래서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다면?
‘로그드라실 엘프, 마키나 공화국 중앙연구소, 테라퓨타 마법사들, 그리고 드워프···.’
대륙에서 강하기로 소문난 존재들이 공작가로 밀려올 것이다.
‘큰일 날 뻔했군.’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
알폰소 카라카스는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면서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어서 오시오. 케이, 몰라봬서 미안하군. 아무튼 카시우스 제국에 온 걸 환영하오.”
“별말씀을, 먼저 정체를 숨긴 제가 잘못이죠.”
말투도 바뀌고, 태도도 바뀌고,
그리하여 대치 상황은 순식간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