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일 후 >
권총도 살살 쏘면 안 아프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농담이지만.
찬웅의 경우엔 농담이 아니다.
플레이어 킬을 살살하면 그냥 아바타만 삭제되고 끝나지만, 도끼에 강한 의지를 담으면 그 피해는 현실의 육체에도 적용된다.
중국 상하이.
각성 플레이어 관리청 본부.
벌컥! 벌컥! 벌컥!
연속적으로 열리는 접속 캡슐 뚜껑.
“이, 이런!”
강제 접속 종료.
즉 사망해서 로그아웃되었다는 의미.
“아오, 망할 케이 놈!”
“그 자식은 괴물이야.”
“건드려 보지도 못했네.”
“아니, 폭탄을 30개나 터뜨렸는데 어떻게 산 거야?”
접속 센터에 나와 있던 진위앙은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결국 파워 스틱 밤 30개를 사용했다고?
그런데도 못 죽였어?
용병 플레이어들이 사망한 건 그렇다 쳐도 그 귀중한 폭탄 30개를 허무하게 날려버리다니.
‘···미치겠군.’
로그드라실 이벤트에서 케이와 처음 조우한 이후,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악연이었다. 야심 차게 추진했던 모든 계획이 단 한 명의 플레이어, 케이에 의해 막혔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처, 청장님!”
“왜? 할 말 있나?”
“···저,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 어이가 없군. 자네 힘이 빠진 걸 왜 내게 말하나? 보약이라도 지어줄까?”
“그, 그게 아니라, 포스, 포, 포스가···,”
“음?”
“완전히 사라진 것 같습니다. 스킬도 기억이 나지 않고.”
“무슨···?”
뜬금없이 포스가 사라졌다는 말은 뭐지? 정신적인 충격이라도 받았나?
하지만,
“저어,”
“자넨 또 왜?”
“저도 포스가 사라진 것 같아서,”
“···.”
안색이 굳어지는 진위앙.
한 명뿐이라면 모르겠지만···,
“혹시 포스가 사라진 각성자들 손들어 봐!”
그의 물음에 눈치만 보던 각성 플레이어 몇몇이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이, 이렇게 많아?”
진위앙은 당황했다.
이유가 뭘까
그러다 번뜩 든 생각.
“덩차오는? [중화영웅] 덩차오는 어디 있어?”
“음? 좀 전에 저하고 같이 죽었는데, 아직 캡슐에서 안 나왔나?”
“덩차오 캡슐이 어떤 거야?”
“여기, 이쪽입니···, 헉!”
화들짝 놀라는 부하 직원.
진위앙도 서둘러 캡슐로 다가갔다.
“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캡슐 안에서 신음하는 덩차오.
“으음, 으으으···,”
“덩차오! 일어나! 정신 차려!”
“맥박이 불안정합니다.”
“빨리 구급차 불러!”
악몽과도 같은 상황.
진위앙은 머리를 감싸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왜? 도대체 왜?’
그동안 수많은 위기를 뚫고 자리를 보전해왔지만, 이번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실패였다.
‘끝났군. 다 끝났어.’
사실 찬웅이 진심을 담아 플레이어 킬을 시전한 대상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추악한 인체 실험을 자행한 자위대 부대장 혼죠, 그리고 또 한 명은 드워프 기차역에 폭탄을 던진 중화영웅 덩차오.
충분히 당해도 싼 놈들이었다.
※ ※ ※
폭삭 무너진 기차역, 그리고 터널과 갱도, 드워프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부담은 줄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징벌.
찬웅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스톤 포지 전역에서 말이다.
“케, 케이가 온다.”
“···저 새끼는 지치지도 않아?”
“우리 편은? 저놈 막을 플레이어는 정말 없어?”
“어어어? 또, 또 날아온다.”
“피, 피해!”
바람길 산책 순간 가속이 펼쳐진다.
스팟! 츠리릿! 콰악! 스팟! 콰직!
비열한 습격으로 날린 도끼도.
츠릿!
서걱!
“아악!”
“사, 살려줘!”
“···왜 귀환이 안 되는 거야?”
넓고 넓은 지하도시.
얼마나 죽인지도 모르겠다.
급기야.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올랐네?’
아바타를 죽여도 동화율이 오르는 시스템.
그럼에도 찬웅은 만족하지 못했다.
“여기 케이가 떴다!!!”
“튀어!”
케이의 이름표를 보자마자 겁에 질려 도망가는 플레이어들.
사방으로 흩어지니 놓치는 놈이 더 많다.
‘클래스가 문제야.’
일대일 대인전에 특화된 자신의 스킬.
‘이럴 줄 알았으면 광역기 하나는 배워두는 건데···,’
물론 강기(罡氣) 스킬이 있긴 하다.
강기를 응축시켜 폭발을 시킬 수도 있고, 숙련이 올라가면 더더욱 커진 앙증맞은 쌍도끼로 한방에 수십, 수백의 플레이어 킬을 올릴 수 있다.
그걸로 [중화영웅]과 중국 플레이어들을 척살했고.
하지만 써보고 나서 확실히 느꼈다.
포스 소모가 너무 크다.
강기(罡氣)를 한 번 시전할 때마다 쭉 빨려 나가는 포스, 그래서 자원 재생 물약을 물 들이켜듯 해야 하고.
그래서 지금은 잠시 봉인.
‘포스량을 상승시킬 방법은 없을까?’
힘의 영약이 있지만, 모든 영약이 그렇듯 한번 복용하면, 더 이상 효과가 없는 것이 단점.
‘동화율 계속 올리다 보면 방법이 있겠지.’
그리고 전쟁은 어느덧 3일째를 지나 4일째에 접어들었다.
※ ※ ※
케이가 스톤 포지를 누비고 다녔지만 중국도 악착같이 덤벼왔다.
계속 이어지는 지리한 소모전.
그런데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이 4일째에 접어들면서 소강상태에 들어간 것, 접속하는 중국 플레이어들이 눈에 띄게 뜸해졌다.
그 시작은 중국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 하나에서 비롯됐다.
제목 : 이거 뭐야? 내 아바타가 사라졌어!
- 제기랄! 동화율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보려고 게임에 접속했는데, 대기실에 아무것도 없었어. 이거 버그야? -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가상현실 게임 사상 초유의 사태.
아바타가 사라졌다!
한두 사례가 아니었다.
제목 : 너희들도 그래?
- 아바타가 사라졌단 말을 듣고 혹시나 나도 접속해봤는데 진짜였어. 황당하네. 어떻게 하지? -
그리고 이어지는 글들.
└ 나하고 똑같네. 일단 고객 센터에 문의를 해놓긴 했지만.
└ 그러고 보니 내 친구도 씩씩대며 화를 내더라고, 아바타가 사라졌다면서.
└ 그럼 버그가 맞겠지?
└ 운영자의 제재일 수도···, 다 스톤 포지 탈환 작전에 참가한 플레이어잖아.
└ 운영자 징계면 포기해야겠다.
└ 하이씨, 그럼 내 아이템들은? 그게 돈이 얼만데,
버그 아니면 운영자 개입.
중국 플레이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스톤 포지 침략 전쟁에 참여한 플레이어들만 그런 현상을 겪은 건 확실해 보이니까.
└ 야, 이거 이상하다. 미국 친구들에게 물어보니까 그쪽은 그런 거 없다네?
└ 한국 쪽 분위기 계속 염탐하고 있는데, 그쪽도 조용해.
└ 뭐야? 그럼 중국만 그렇다고?
분위기가 희한하게 돌아갔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건 오로지 중국.
└ 우리만 그래. 다른 나라는 아바타 사라짐 현상이 단 한 건도 없어.
└ 씨발, 죽은 것도 서러운데,
└ 고객 센터는 아직 답변이 없어?
└ [답변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이 말 말고는.
└ 결국 우리가 잘못했다는 거야?
미치고 환장할 노릇.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아바타가 사라지다니,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듀플렉스 스페이스는 아바타가 전부.
플레이어는 아바타에 빙의되는 형식.
코인 계좌도 아바타명으로, 장비나 아이템도 아바타의 인벤토리에, 그 아바타가 사라졌다는 말은 모든 걸 잃었다는 의미.
중국의 당황스러운 분위기는 곧 전 세계에 알려졌다.
제목 : 그거 알아? (현 중국 상황)
- 스톤 포지 침략에 참가한 플레이어들 지금 난리 났다. 아바타가 갑자기 사라졌다는데, 크크크, 지금 중국 애들 대성통곡. -
└ 이 새끼들, 거짓말하네. 패색이 짙어지니까 한다는 핑계가 고작 그거?
└ 구라도 사람 많은 놈들이 치니 스케일이 다르구나.
└ 우리 중에 아바타 삭제된 사람들 손!
└ 있을 리가 있겠냐?
└ 만약 그 말이 정말이라면 시스템이 제재한 건 아닐까?
└ 일리가 있는 말이야.
케이에게 죽은 플레이어에게만 적용되는 거였지만 눈치채는 플레이어는 아직까진 없었다.
어쨌든 오랜 기간 벌어졌던 스톤 포지 대혈전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결과는 중국의 처참한 패배였다.
└ 나 방금 스톤 포지 갔다 왔다. 보이는 건 우리 길드원밖에 없더라고.
└ 하아, 나 어렵게 길드 들어갔는데 끝이라고? 나 저주받았냐?
└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인생은 선착순이잖아.
그리고 늘 그랬듯, 중국은 이번 사태에 대해 그 어떤 코멘트도 없었다.
※ ※ ※
카리브해의 푸른 에메랄드빛 바다, 새하얀 모래사장.
‘천국이 있다면 여기지.’
물론 ‘세상’에도 바다는 있다.
하지만 그것뿐,
최신식 리조트에, 맛있는 음식, 빵빵 터지는 와이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한 군데 모여있는 곳은 세상 바깥, 바로 지구밖에 없다.
게리 스탁턴은 이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오래오래 즐겨야지.
그러려면 지구는 평화로워야 하고.
계획은 순조롭다.
나날이 발전하는 지구.
진(眞) 마정석 광산도 풀렸고, 그로 인해 과학 문명은 5차 혁명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세상’의 변화.
마키나 공화국에선 신무기가 개발되었으며 마탑의 기능도 온전하게 되살아나서 앞으로 다양한 마법 물품들이 생산될 터.
‘오늘은 뭘 먹을까?’
어제 너무 달려서 뜨끈한 국물 요리가 제격인데.
하지만 일상의 편안함을 깨버리는 존재가 하나 있다.
“주인님! 주인님! 큰일 났어요!”
엘리가 저렇게 호들갑을 떨면 불안하다.
예를 들어 또 캡슐 대량 파괴라든가.
침착하자.
무심하게,
“···또 왜? 세상이 뒤집어지기라도 했어?”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좋아. 말해봐. 세상이 뒤집어진 것보다 큰일이 뭔지?”
“대, 대량···,”
“대량? 호, 혹시 대량 캡슐 파괴?”
“아뇨, 대량 아바타 계정 삭제요.”
“하하하, 난 또 뭐라고, 캡슐은 아닌 거네? 캡슐이 아니고···, 뭐, 뭐? 계, 계정 삭제?”
“네, 무려 23,057건의 아바타 계정 삭제.”
2만 건이 넘는다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아니, 그게 가능한지 먼저 파악해야 한다.
게임을 발명한 자신도, 엘리도 그런 권한은 없다.
“대체 누가?”
“누구겠어요?”
맞다.
누구겠나?
“···또 케이?”
“그래요. 제가 로그 기록을 살펴봤는데, 플레이어 킬 스킬이 부여됐더라고요.”
“어어어···, 프, 플레이어 킬?”
이제야 납득이 간다.
이건 운영자의 스킬이다.
즉 시스템이 가진 고유권한.
“끄응, 나 물···, 물 한 잔만 떠줘.”
“주인님은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
“정신이 없어 그래.”
“···.”
하긴 자신도 정신이 없는 건 마찬가지.
이 사태는 캡슐 대량 파괴 사건보다 그 심각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어떡하죠?”
“어떡하긴! 당연히 막아야지.”
“또 전처럼 케이를 만나요?”
“어, 게임 속에서, 가서 부탁해봐.”
“그럼 대가는?”
“흐음···,”
뭘 줘야 하나?
“여기서 고민할 것이 아니라 직접 물어봐.”
“또 제가요?”
처량한 눈길로 엘리를 바라보는 게리 스탁턴.
“네네, 알겠습니다. 불가촉천민 노예인 제가 해야죠.”
“···엘리, 넌 뭐 사고 싶은 거 없어?”
“에르머스 신상 가방, 그리고 구두, 아! 코트도 하나 살게요. 카드 주세요.”
“여기···,”
아무튼 막아야 한다.
한두 명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만 단위는 너무 심하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진짜 게임 망한다.
※ ※ ※
전쟁은 끝이 났다.
아바타 삭제에 대한 이슈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후 더 이상 스톤 포지로 오는 중국인 플레이어가 하나도 없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아바타가 삭제될까 두려워서.
원인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게임 내 불법 침략에 대한 시스템 운영진의 제재라는 의견이 우세할 뿐.
실제로 찬웅, 즉 케이에 대한 의혹은 하나도 없었다.
하긴, 케이에게 죽은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누구에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죽었으니까.
찬웅과 플레이어들은 힘을 합쳐 무너진 기차역의 돌덩이를 걷어냈다.
겨우 플레이어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어렵게 드워프가 숨어있던 광산에 들어갔는데,
“낄낄낄, 어허, 한잔 더해!”
“꺼억! 술맛 좋다.”
“일 안 하고 노는 것도 할만하군.”
“바깥에선 뭐 하고 있지? 아직 안 끝났나?”
“에이, 전쟁이 어디 쉽게 끝나나? 조금 더 놀았으면 좋겠는데.”
술판이 벌어지고 있는 광산 안.
맥주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러다 찬웅과 눈이 마주친 드워프 국왕.
“어? 내 형제 케이, 무슨 일인가? 술 한잔하려고? ”
“···.”
“그렇지. 쉬엄쉬엄 술도 한잔하고 싸워야지.”
뭐, 그래도 잘 지내고 있었네.
“수고하셨어요. 이제 끝났습니다.”
“잉? 벌써?”
“네. 밖에 나가셔도 돼요. 그런데···.”
“음? 무슨 문제라도,”
“도시가 많이 상했어요. 기차역과 터널도 무너졌고.”
“으하하하, 그게 무슨 문제라고, 자넨 드워프들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국왕 썬더 스틸해머가 곡괭이를 잡고 일어났다.
“자! 주정뱅이들아! 이제 일할 시간이다!!!”
“그렇지 않아도 좀이 쑤시긴 했어.”
“터널부터 뚫자고, 철로도 복구해야지.”
도시 복구 작업이 시작됐다.
그동안 진(眞) 마정석 채굴 작업은 조금 미뤄야 할 터.
‘이젠 뭘 할까?’
별거 있나?
계속 게임 해야지.
복구 작업도 도와야 하고.
시간 나면 중국에도 한번 다녀와야겠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놈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그러나 국제 분쟁으로 비화할 여지가 있으니 신중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