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뜻밖의 일본행(1) >
뜻밖의 일본행(1)
플레이어들이 헤스티아 성국 대신전에 출입하는 건 어렵지 않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니까.
대형 성당에서 예배도 드리고, 좋은 말씀도 듣고, 코인으로 헌금도 하고.
그러나 성황을 만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초대권.
성황 알스테어는 또 다시 자신을 찾아온 케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좀 천천히 오라니까. 미안하지만 신성력이 바닥났어요. 그대에게 축복을 내릴 힘이 없다는 말이에요.”
“축복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다행입니다.”
안도하는 성황에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말해주는 찬웅.
“흐음···, 성수(聖水) 이백만 톤이라,”
고개를 끄덕이는 성황.
그도 기록을 봤다.
약 5백 년 전, 전전전대 성황이 드워프 왕국에 성수를 하사해준 일.
“재고가 없는 건 아니겠죠?”
“재고? 성수는 공장에서 만드는 것처럼 대량으로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럼?”
“5백 년 전, 드워프가 가지고 간 것은 성수(聖水)가 아니라 성물 중 하나인 성배(聖杯)입니다. 그것도 빌려준 거지요.”
“아!”
하긴,
이백만 톤이 애 이름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옮겨오나.
“성배(聖杯)는 성수를 만들어 냅니다. 저장도 하고. 그 저장된 양이 이백만 톤이었을 뿐.”
“음, 지금 저장된 양은 어느 정도인지.”
“그거야 알 수 없지요. 하지만 5백 년이 지났으니 이백만 톤쯤은 충분히 저장되지 않았을까요?”
성배는 성수 생성기이자 아공간 아티팩트인 성물.
“저에게도 빌려주실 수 있나요?”
“해드려야죠.”
“···네?”
이렇게 쉽게?
“그대는 충분히 자격이 되니까요. 침식지를 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성배 빌려드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됐다.
빌릴 수 있다.
“다만···,”
“무슨 문제라도.”
“헌금이 필요합니다.”
대놓고 헌금을 요구하는 온화한 표정의 성황 알스테어.
성직자가···, 돈을 달라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이긴 하다.
현실이나 게임 안에서나.
“···얼마나?”
“흐음, 드워프들이 낸 금액은 받아야···, 우리도 돈 나갈 데가 많아요. 당장 고아원 운영에 빈민 구제, 대륙에 흩어져있는 신전들 보수도 해야 하고요.”
1억 코인 달라는 말.
“외상은? 하, 할부로는 안 될까요?”
“죄송하지만 성물을 외부로 반출하려면 대신전 사제들을 설득할 명분이 있어야 해서.”
“···.”
하는 수 없다.
“준비해올게요.”
“하하하, 기다리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1억 코인을 어디서 마련하나?
다음으로 간 곳은 드워프 왕국 스톤포지.
드워프들은 거대한 산맥이 두 개나 교차 된 장소에, 동굴을 파고 들어가 도시를 건설했다.
건축 토목의 달인 드워프가 아니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대형 지하도시.
광산을 개발하고 철길을 놓아 기차로 이동하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광산도 무수하게 많다고 하니.
대장장이의 왕, 썬더 스틸해머가 반색을 하면서 케이를 맞이했다.
“오! 어서 오시오. 이방인 케이. 자주자주 들리시지. 그건 그렇고 다음 침식지 정화는 언제···,”
찬웅이 스틸해머를 찾아온 이유는 다음 공략 침식지 선정을 위해, 그리고 그 대가로 광산 하나의 소유권을 또 줄 수 있는지.
광산 요구가 드워프 왕국에 부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맞는 대가를 제시하면 된다.
이런 뜻을 국왕에게 전달하니.
“···최소 10개의 침식지를 정화할 예정입니다. 그중에 하나를 제게 주시면.”
“두 개, 아니 세 개라도 괜찮소. 어차피 정화되지 않으면 쓸모없었을 광산이었소.”
흔쾌히 승낙하는 스틸해머.
사실 하나면 된다.
성배에 저장된 성수의 양이 얼마나 될지 모른다.
양을 나눠서 골고루 뿌리면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다가 효율이 떨어지면?
‘하나에 올인하는 게 편해.’
남은 건 광산의 종류.
가능하다면 미스릴, 오리하르콘 같은 희귀 광물이라면 좋겠지만···.
마법 금속인 진은(眞銀) 미스릴과 진금(眞金) 오리하르콘은 마정석과의 궁합이 좋다.
“흐음···, 죄, 죄송하지만 금속은 좀, 대신 마정석 광산은 안 되겠소?”
“또?”
스틸해머는 다소 난감한 표정이었다.
하긴, 금속 광물에 대한 드워프들의 사랑은 유명하다.
한발 물러서자.
금속이야 지구도 많다.
그러나 마정석은 그 비슷한 것도 없고.
“좋습니다. 그럼 마정석 매장량이 많은 곳을 골라주시죠.”
“여긴 어떻소? 113번 광산이요. 마정석을 채 캐내기도 전에 침식이 되어버렸소. 아직 거기에 얼마나 많은 양의 마정석이 묻혀있는지 우리도 모르오.”
“괜찮네요. 여기로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113번 광산 침식지로 결정.
‘그래, 마정석이 차라리 나아.’
현재 급한 건 희귀 금속이 아니다.
마정석 물량이지.
그리고 혹시 알아?
랜덤 D박스에서 진(眞) 미스릴 주괴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올지.
※ ※ ※
찬웅은 APS 본부 캡슐 접속 센터에서 로그아웃했다.
레이드가 예정되어 있어 매일 출근하고 있기 때문에 집보다는 본부 캡슐을 애용하는 편.
성배도 빌릴 수 있다고 확답을 받았고, 공략 예정 침식지도 결정되었기에, 남은 건 최기병에게 알려주고 준비에 들어가는 것.
휴게실로 나와보니 APS 소속 각성 플레이어들이 함께 모여서 TV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찬웅씨, 언제 왔어?”
“오! 지금까지 게임 했었구나? 참 열심히 하네.”
“그러니까, 그렇게 강하지.”
“하하, 아이템 좀 정리하느라.”
몇 번의 레이드 공략을 같이하면서 제법 친해진 플레이어들이었다.
민도연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찬웅아! 이리 와. 여기 앉아.”
“···어, 아, 알았어.”
조용해진 휴게실.
갑자기 민도연이 강찬웅에게 반말? 그리고 강찬웅도.
“···.”
“···.”
“응? ···찬웅아, 라고?”
“둘이 언제···,”
물론 휴게실엔 상큼한 딸기 신여은도 있었다.
꿈틀,
미세하게 위로 움직이는 그녀의 눈썹, 커피잔을 손에 든 딸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지만,
민도연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친구 하기로 했어요. 나이도 같고, 한동네 살고.”
“오! 친구···,”
“좋겠다. 동갑이라서 친구도 할 수 있고.”
“뭐, 처음엔 보통 친구로 시작하지.”
“···.”
찬웅은 난처했다.
갑자기 표정이 사라진 딸기를 보니 더 그랬다.
하는 수 없이 대화의 주제를 돌려.
“근데 뭐 보고 있었어요?”
민도연이 대답했다.
“뉴스 보고 있었어. 지금 일본 상황 무척 시끄럽잖아.”
일본에서 일어난 빌런의 난동.
찬웅도 잘 알고 있었다.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인터넷과 SNS에도.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난리도 아니야. 그것도 바로 옆 나라에서.”
“저것들 한국으로 넘어오면 어떡하지?”
“최기병 팀장 이야기로는 일본에서 지원 요청이 왔다던데?”
“에이, 뭐하러 일본까지 가? 우리가 자리를 비우면 한국은?”
“거절해야지.”
하나둘씩 말을 꺼내는 플레이어들.
찬웅도 대화도 끼어들었다.
마침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고 해서.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음? 말해봐요. 찬웅씨, 뭐가 이상한지.”
“아무리 우리보다 인구가 많은 일본이지만, 저렇게 빌런들이 많다니···.”
사실 너무 심하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빌런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찬웅이 의문을 제기하자 다른 플레이어들도 동조하며 나섰다.
“원래 일본 애들 심성이 조금 음습하잖아. 자기보다 강한 놈에겐 비굴하게 고개 숙이고, 자기보다 약하면 철저하게 짓밟고.”
“그렇긴 하지만 이건 거의 국가 전복 수준이야.”
“맞아. 아예 대응도 못 하고.”
“찬웅씨 생각은?”
찬웅이 말을 받았다.
“저 중에 몇 개는 돌발 상황이 아니라 미리 계획된 거 아닐까요?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느낌도 들고.”
“···조직적? 빌런들이 계획을 짜서 움직인다고?”
“예를 들어 군주의 사도라든지.”
우현수가 손가락을 튕기며 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우리 첫 공식작전, 부상 팔성파 백상억 일당.”
그때 참가했던 고유섭, 마태길, 봉춘섭도 기억났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팔성파 백상억이 일본으로 탈출하려고 했었지.”
“맞아요. 최팀장님에게 들은 기억이 나요. 일본에도 레지키쓰론의 사도가 있다고. 그래서 백상억도 그쪽으로 합류하려 했다고,”
“이해가 가. 사도들은 평범한 빌런이 아니지.”
“그럼 일본에 있는 사도들이 혼란을 틈타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
찬웅은 확신했다.
사도들이 개입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당시 자신이 직접 백상억의 스마트폰을 분석해 최기병에게 알려줬었다.
백상억이 일본의 사도와 소통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지만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다. 실명이 아닌 가명, 그리고 쓰였던 폰도 제 명의가 아니어서.
놈의 이름만 알 수 있다면 바로 밝혀냈겠지만.
“일본으로 지원 가야 해?”
“그래도 안 돼. 괜히 끼어들었다간 우리가 위험해져.”
“난 안 가. 한국 지켜야지.”
“나도.”
모두들 부정적.
일본이야 망하던 말든.
또한 한국 사정도 괜찮지 않다.
대검찰청 테러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각성 플레이어들이 일본 상황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상큼한 딸기 신여은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둘이 친구?’
나이가 같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동네에 살고 있다는 건 미처 몰랐다.
‘같이 밥도 먹고 그러나?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언젠가 케이와 통화를 했을 때 전화기 너머로 같이 술 한잔 하자던 여자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게 도연 언니였어?’
불안하다.
처음엔 다 친구로 시작하지, 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돈다.
솔직히 케이의 정체를 몰랐을 땐 그냥 같이 게임 하는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실제 그의 얼굴을 보고, 강찬웅이란 실명을 알고, 같이 한 직장에서 근무하게 되니, 조금씩 욕심이 생겨났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걸 어떡해?
신여은에게 한류 스타 민도연은 넘을 수 없는 벽이지만···.
‘아직 확정난 것도 아니잖아.’
그저 친구.
또한,
‘나이도 내가 훨씬 어리고.’
자신에게도 맞서 싸울 무기 정도는 있다.
이제야 살짝 마음이 편해졌다.
※ ※ ※
듀플렉스 스페이스 게임회사 대표 게리 스탁턴도 일본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비서 엘리에게,
“이거, 초록이 권속 새끼들이 들쑤셨지?”
“아마도요. 일본 경시청 수사 기록 몇 개 들여다보니까, 눈을 쳐다보니 무서워서 꼼짝도 못 했다. 총알도 뚫지 못했다. 라는 내용이 나오는 걸 보면···,”
“피어와 드래곤의 비늘?”
“맞는 것 같아요. 레지키쓰론의 사도.”
“하아,”
골치 아프다.
“이러다가 초록이가 현실 밖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어.”
“그래봤자 영혼이잖아요. 우리처럼.”
“그 영혼이 케이 같은 플레이어에게 들어가면?”
“설마, ···케이 같은 사람이 또 있을 리도 없고.”
“살짝 모자라도 문제야. 재능있는 플레이어에게 ‘역(逆) 접속’하면 충분히 세상을 망하게 할 수 있다고.”
싹을 잘라야 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직접 현실 세상에 개입하는 건 불가능하고.
“이참에 세상으로 접속해서 레지키쓰론 처리하시면 안 될까요?”
“내 본체로? ···안돼. 놈은 침식지에 있어.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상대하기 어려운 놈이야.”
“접속하기 싫으신 건 아니고?”
“뭐, 부인은 못 하겠군.”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레지키쓰론은 조급해하고 있다.
“케이가 가줬으면 싶은데···, 부탁해보면 안 될까?”
“하지만 이건 부탁의 영역이 아니에요. 시스템이 우릴 제재할지도 몰라요.”
“그런가?”
“캡슐을 파괴하지 말아 달라는 건 시스템의 목적에 부합하는 일이지만 일본 상황 개입은 다른 문제잖아요.”
비서 엘리가 이어 말했다.
“물론 케이가 자유의지로서 일본으로 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러나 케이에게 ‘부탁’해서 그를 일본으로 보내는 행위는 명백한 인과율 위배.
“케이가 일본으로 가는 이유가 우리 때문이어서는 안 돼요.”
“그래, 우리가 직접 개입하는 꼴이 되니까.”
“기다려봐요. 다행스럽게도 일본은 케이가 사는 곳과 가까이 있잖아요.”
“그럴까? 흐음, 아참!”
“왜 그러세요?”
“저기 냉장고에서 맥주 하나만 꺼내줘.”
“···,”
“모, 목이 말라서.”
참으로 한심하다는 표정의 엘리였다.
※ ※ ※
사실 찬웅도 일본에 갈 생각 없었다.
최기병 팀장과 단둘이 만나 이야기를 전까지는 말이다.
침식지 레이드를 위한 브리핑을 끝내고 날짜도 정하고, 이제 퇴근하려는데 조용한 곳에서 만나자고 부탁하는 최기병.
용건은 짐작이 간다.
“거절하셔도 되지만, 알려는 드리려고요.”
“뭔데요?”
“일본 정부에서 요청이 왔습니다. APS로 왔지만 사실은 케이씨가 와주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거절하죠. 일본이 뭐가 이쁘다고···.”
“현찰로 100억 엔을 주겠다고 전해왔습니다만. 물론 케이씨에게.”
“···100억엔?”
가만, 돈이라.
엔화는 필요없다.
찬웅에겐 코인이 필요하다.
“흐음, 선불로 1억 코인 꽂아주면 생각해보겠다고 전하세요. 단! 나 혼자서 간다고.”
1억 코인이면 일본 돈으로 500억엔.
안되면 말고.
1억 코인이야 진(眞) 마정석만 팔리면 언젠간 들어올 돈.
그러나 일본은 매우 급했던 모양.
찬웅의 조건은 바로 받아들여졌다.
‘좀 더 부를 걸 그랬나?’
아무튼 케이의 일본행이 결정되었다.
에고 시스템이 장착된 허리띠에 포스를 불어넣고.
‘일본 경시청이나 정보기관 접속 가능해?’
[답변해드리겠습니다. 가능합니다.]
먼저 정보부터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