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런인지 아닌지 모호할 땐?(2) >
빌런인지 아닌지 모호할 땐?(2)
빌런의 범주를 어디까지 봐야 하는가?
폭력적인 성향이 의심되어도 살인 같은 강력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빌런이 아닐까?
아니다.
아직 거기까지 가지 않았을 뿐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저지를 테고.
포스라는 수단을 가지고 아무런 죄도 없는 약한 이들을 핍박하고, 강압하며,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하면 빌런이라 칭해도 마땅하다.
정지혁은 애매하다.
빌런인지 아닌지 애매한 게 아니다.
놈은 빌런이 확실하다.
다만 여태까지 한 짓에 대한 처벌.
죽이기엔 아직 지은 죄가 모자라고, 그렇다고 잡아 가두기도 불가능하고.
하지만 찬웅에겐 방법이 있었다.
‘정지혁의 아바타 명이 뭐였지? 한번 봤지만 기억이 안 나네.’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정지혁 플레이어의 아바타 명은 ‘나 혼자 동화율 돌파’입니다.]
플레이어의 명을 특정해서 물어보니 곧바로 대답해주는 에고 시스템.
‘지금 어디 있어?’
[현재 게임에 접속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접속하면 알려줄 수 있어?’
[답변해드리겠습니다. 가능합니다.]
현실에서 처벌이 불가능하다면 게임에서 하면 된다.
‘기다리는 동안 밥이나 먹을까?’
인벤토리에서 음식을 꺼내는 찬웅.
푸짐한 고깃덩어리가 들어있는 쇠고기 스튜, 빨간 토마토 소스에 치즈가 듬뿍 뿌려진 파스타, 갓 구운 빵까지.
이게 다 랜덤 D박스를 까서 나온 진(眞) 아이템.
인벤토리에 넣어두면 신선도가 그대로 보존되어 언제 어디서든 꺼내 먹을 수 있었다.
‘맛있네.’
진짜 그랬다.
기가 막힌 맛이다.
어떻게 음식까지 진(眞) 아이템으로 나올까?
‘그나저나 치유 물약은 몇 병이지?’
레이드 공략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보상으로 주어지는 랜덤 D박스 확률 상승, 그러다 보니 아이템이 꽤 많이 쌓였다.
치유 물약만 40병.
‘이건 아껴두자.’
현실에서 반드시 사용할 날이 있을 터.
그런 이유로 인벤토리의 압박은 여전하다.
동화율과 반영률이 더 상승하면 여유가 생길 텐데.
‘그나저나 요즘 통 돌파를 못 했어.’
현재 동화율은 178%, 반영률은 58%.
위트리아 침식지 공략 성공 때는 꽤 많이 올랐는데, 69번 광산 침식지 공략 때는 단 1%도 오르지 않았다.
‘쉬워서 그랬나?’
하긴 초대권도 2장밖에 주지 않았으니까.
또 동화율이 높아질수록 돌파하기 힘든 이유도 있을 테고.
‘몇 개 더 공략하면 오르겠지.’
그때였다.
[아바타 ‘나 혼자 동화율 돌파’가 게임에 접속했습니다.]
‘어디?’
[로그드라실 서쪽 침식지입니다.]
‘그래?’
슬슬 가볼까.
※ ※ ※
듀플렉스 스페이스 가상현실 게임에서 레벨업을 가장 하기 쉬운 곳을 고르라면 역시 로그드라실 침식지.
몬스터의 종류도 단계별로 다양하며, 한때 이벤트를 거치면서 몬스터 공략법도 널리 퍼져 있고, 코인도 꽤 많이 준다.
“몰고 와!”
정지혁이 명령을 내리자 빠르게 어디론가로 뛰어가는 플레이어들, 모두 화정 그룹 소속 직원들이다.
아바타 명 [나 혼자 동화율 돌파], 정지혁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석궁.
몬스터와 직접 접촉하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단점도 있다.
우선 검이나 칼, 또는 창에 비해 위력이 한참 약하다.
화살을 꽤 많이 박아넣어야 몬스터가 죽는다.
물론 헤드샷을 노리면 한방에도 가능하지만.
그러나 그게 어디 쉽나?
다른 여타 게임과는 다르게 명중률 보정이 적용되어 있지 않다.
명중률을 높이려면 스킬을 배워야 하고, 또 숙련도 높여야 올라간다.
그래서 보통 원거리 무기는 견제용이나 호신용으로 사용된다.
“키킥!”
화정 소속 플레이어들이 몰고 온 고블린 한 마리.
“쯧! 징그럽게.”
정지혁은 초대권으로 각성한 플레이어, 아바타도 카쟌 침식지 공략이 계획되었을 때 처음 만들었다.
따라서 전투에 관한 재능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움직이지 못 하게 해.”
“지, 지금입니다!”
푸슛!
정지혁의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
“아악!”
하지만 고블린이 아닌 화정 직원에게 명중했다.
정지혁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쓰러진 직원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이씨, 왜 이렇게 안 맞아?”
화살을 맞아 쓰러진 화정 소속 플레이어도 아무 말도 안 했다.
그저 치유 물약을 꺼내 마실 뿐, 싫은 내색이라도 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야! 저거 치워.”
쓰러진 플레이어를 전투 현장에서 끌어내는 동료들.
‘미, 미안···.’
‘괜찮아.’
레어 등급의 석궁은 단발식.
연발식 석궁은 영웅 등급이 되어야 나온다.
“불편해. 연발식 석궁은 없냐?”
“구, 구해보겠습니다.”
영웅급 무기는 구하기 어렵다.
특히 석궁은 더더욱 그랬다.
정지혁이 쏠 때마다 옆에서 미리 장전된 석궁을 넘겨주는 부하직원.
푸슛! 푸슛! 푸슛···,
거의 10발 가까이 쏘고 나서야 고블린 한 마리를 죽일 수 있었다.
거의 황제 사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래서 동화율이 돌파될까?
“야! 고블린 말고 오크 한 마리 끌고 와.”
“네? 쉬, 쉽지 않을 텐데요?”
“하라면 해! 월급 받는 값을 하라고!”
“···알겠습니다.”
오크가 배달되길 기다리는 동안 정지혁은 랜덤 D박스를 오픈했다.
“어우, 씨발, 누구는 잘도 뽑는다더니만.”
죄다 쓰레기.
물약 종류, 음식, 최하 등급의 아이템들.
정지혁에게 가장 절실한 건 진(眞) 아이템 장비와 진(眞) 스킬 구슬.
‘대신전 한 번만 더 갔다 오면 금상첨화인데.’
어제오늘만 랜덤 박스 까는데 10억이 들었다.
“좆같은 확률 똥망 게임···,”
이 정도 썼으면 뭐라도 나와야 하지 않나?
순간!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
“그렇게 게임 하면 재밌어? 떠 먹여줘도 못 먹네.”
“···어떤 놈이야?”
난데없는 비아냥에 매서운 눈초리로 뒤를 돌아봤는데, 한 명의 아바타가 서 있었다.
“인성은 둘째치고 넌 진짜 게임 하면 안 되겠다.”
“이런 건방진 새끼가 내가 누군 줄 알고. 너···,”
그때!
정지혁의 눈에 들어온 아바타 이름.
“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케이?”
확실하다.
동명이인이 아니라 그 케이였다.
한 번 만난 적이 있으니까.
“케이님? 우, 우리 전에 카쟌에서···,”
“어, 그때 만났었지.”
“오, 오랜만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꼭 한번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날 왜?”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머리를 숙이며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다가와서.
“흐흐, 우리가 인연이 보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하고도 그렇고,”
“글쎄, 난 별로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널 보니 더 그래.”
정지혁은 살짝 긴장했다.
왜 이렇게 싸늘하게 나오지?
어쩔 수 없다.
게임, 아니 현실에서도 케이는 철저한 갑의 위치.
어떻게 보면 이건 기회다.
케이와 단둘이 만날 수 있는 기회.
“하하하, 호, 혹시 시간 되시면 현실에서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밖에서 날 만나시겠다?”
“네! 극진하게 대접해드리겠습니다. 풀코스로!”
피식, 웃으며 말하는 찬웅.
“밖에서 날 만나면 진짜 죽을 텐데.”
“···네?”
“여기서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야.”
“뭘···.”
정지혁은 도무지 영문을 몰랐다.
여기서 죽는다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카쟌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
“잘 들어!”
“···.”
“넌 앞으로 게임 하지 마라. 그리고 아바타도 다시 만들지 말고.”
“아바타를 다시? 무, 무슨 뜻인지···.”
“대신전에 아무나 보내면 안 되는 거였어. 뭐, 나름 교훈도 있었으니까.”
스슷.
어느새 케이의 양손에 나타난 조막만 한 도끼.
“헉!”
“꼭 기억해. 게임은 안 돼! 말 안 들으면 현실에서 날 만나게 될 거다.”
“자, 잠깐!”
서걱!
찬웅의 도끼가 휘둘려졌다.
“커헉! 왜···,”
플레이어 킬.
정지혁의 아바타 [나 혼자 동화율 돌파]의 목에 그어지는 실선, 혼죠를 죽일 때와는 다르게 조금 힘을 뺐다.
툭!
데구르르르···,
“사, 상무님!”
부하직원들이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스스스스스···,
이미 아바타는 가루로 변한 뒤였다.
“모두 화정 그룹 직원들이시죠?”
“어음, 네네.”
“그, 그렇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상사 잘못 만나서 이런 일까지.
하지만.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 반드시 정규광 회장에게 보고하세요.”
“···.”
“이건 경고일 뿐이라고, 선을 넘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꿀꺽.
화정 직원들도 케이가 누군지 안다.
그래서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 ※ ※
진(眞) 마정석을 이용한 화력 발전 실험 계획안이 무사히 통과됐다.
하지만 한국의 기술로는 파이어 마법 가열기를 만드는 건 아직 부족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번에 빌런 대응 안보 참모로 승진해 백악관에 입성한 마이클 피트와 통화 중인 최기병.
- 파이어 마법 가열기라, 당연히 제공해드려야죠. 앞으로 우리도 부탁할 것이 너무 많은데···.
최기병은 마이클 피트의 부탁이 뭔질 안다.
미국의 레이드 공격대에 케이를 합류시켜 달라는 것일 터.
“언제쯤 받아볼 수 있습니까?”
- 당장 수송기에 실어서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실험을? 어차피 마정석 수급이 불안정해서 대체 에너지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진(眞) 마정석 공급이 지속적으로 가능하다면요?”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최기병은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너무 빨리 말해버리면 재미도 없고.
이필동이 옆에서 물었다.
“물건 보낸대요?”
“당장 실어 보내겠답니다.”
“역시 미국 놈들은 이런 부분에선 화끈해.”
“천만에요. 걔들이 공짜로 이러겠습니까?”
“하긴···.”
한국에게서 얻어낼 게 많으니까 자기들도 통 크게 쏘는 척하는 거지.
“참! 정지혁 문제는···.”
“그렇지 않아도 민도연씨에게 연락이 왔어요.”
“···왜요?”
“집까지 찾아와서 치근덕대더라고, 그리고 신여은씨 부친에게 화정 그룹 고문 변호사 자리를 약속하며 접근한 정황도 있고.”
“이런 미친 새끼가.”
속셈은 알겠다.
APS에 발을 걸쳐보겠다는 수작.
“그럴 거면 차라리 APS로 들어올 것이지.”
“그럴 깜냥이나 될까요? 게임 안에서도 몬스터가 무서워 부하직원 동원해서 황제 사냥이나 하는 새끼가.”
“어떻게 할까요?”
“감시 수준을 높이죠.”
그때였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정지혁은 이제 괜찮을 겁니다.”
찬웅이었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워낙 귀가 좋아서 어쩔 수 없었다.
‘APS에서도 정지혁을 감시하고 있었구나.’
이들도 능력 있는 사람.
“그럴 필요 없다는 말씀은?”
“나중에 보면 아시게 될 거예요.”
누가 하는 말인데.
정규광 회장은 케이라면 끔벅 죽는 사람이었다.
그럼 정지혁 문제는 해결된 것 같고.
“아직 출근할 때가 아닌데 일찍 오셨네요.”
“볼일이 있어서. 캡슐 좀 사용할게요.”
“네!”
찬웅은 헤스티아 대신전으로 갔다.
목적은 성수(聖水) 때문.
이번에도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성수 재고량이 충분했으면 좋겠네.’
헌금도 해야 한다던데, 얼마나 해야 하나.
※ ※ ※
찬웅이 헤스티아 공국 대신전에 있을 무렵,
정규광 회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아들 정지혁이 케이와 갈등을 일으켰다고? 게다가 뻔뻔하게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이런 망할 놈이···. 회사를 망치려고 작정했구나.”
“저, 전 진짜 억울합니다.”
“시끄러워!”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APS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아들이 하는 짓이 심상치 않다고, 관리 잘하라는 권고.
현재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국가 기관이 바로 APS, 밉보이면 큰일 난다.
더군다나 진(眞) 마정석을 이용한 화력 발전 실험도 진행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마정석 수급 때문에 거의 폐기된 계획.
그러나 APS도 바보가 아니다.
분명 믿는 구석이 있겠지.
누구겠나?
당연히 케이일 터.
그런데 그 케이에게 아들이 죽임을 당했다니, 물론 게임 안이긴 해도.
“저도 미치겠습니다. 진짜 아무 일도 한 것이···,”
“그래서 표환욱이를 힘으로 겁박했냐?”
“그, 그건···,”
“민도연은 왜 찾아갔고?”
“그냥 만난 것뿐입니다. 맹세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신여은의 부친인 신광식 변호사에게도 접근했다지?”
“우, 우리 그룹을 위해···.”
“허허.”
의도는 알겠지만 참 한심하다.
특히 신여은은 APS에서 최고 보호 대상.
그런데 겁도 없이 그녀의 가족에게 접근해?
“포스가 사라졌단 말은 또 뭐냐?”
“케이, 그놈에게 죽고 나서 포스를 눈곱만큼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흐음.”
게임 안에서 죽었는데, 그 영향이 현실에서 나타났다는 말, 희한한 일이지만 정규광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케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사후 처리가 중요하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아들이 케이에게 경고를 받았다는 것.
“지혁아.”
“네, 아버지.”
“네가 가진 그룹 지분 지은이에게 모조리 넘겨. 그리고 모든 직을 내려놓고 당분간 해외로 나가 있어.”
“···어, 왜, 왜요?”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해. ”
“하, 하지만···.”
“닥쳐! 앞으로 그룹엔 얼씬도 하지 마.”
정지혁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룹 지분을 동생에게 넘기라니.’
승계 지위를 박탈하겠다는 말 아닌가.
이건 숙청이나 다름없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시선은 냉정하다.
이미 자신에게서 마음이 떠났다.
모든 것이 사라질 판.
창창한 미래도, 권력도, 포스도.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정규광은 그런 정지혁을 쳐다보지도 않고 옆에 있는 딸, 정지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은아.”
“네, 아빠.”
“APS에 들어가라. 너도 각성 플레이어니까 받아 줄 거다.”
“알겠어요.”
옆에서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지켜본 정지은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가서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잘하고.”
“열심히 할게요.”
아들의 죄는 분명하다.
멍청하고 아둔하다는 것.
그깟 알량한 힘을 얻었다고 분수도 모르고 날뛰었다.
그래서 케이에게 경고를 받았으니 자신도 액션을 취해야지.
그리고 이런 덜떨어진 놈에게 어떻게 화정 그룹을 맡기나?
자식은 하나만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