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령마 부키와 함께 >
게임 접속용 캡슐 파괴 행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3억이란 비싼 가격을 책정한 이유도 그것 때문, 소중히 여기라고, 사실 원활한 용병 플레이어 유입을 위해 더 싸게 공급할 수도 있었다.
물론 게임 서비스 초기엔 세계 각국 연구진들이 캡슐 한두 대 정도 분해해서 파괴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엄격하게 경고했다.
캡슐 파괴에 관여한 이들의 계정을 삭제하고 재생성도 금지하겠다고.
그때 이후로 캡슐이 파괴된 일은 손에 꼽을 정도, 하지만 이번 건은 너무 크다.
거절하면 어떡하지?
초조한 심정의 엘리.
찬웅도 어안이 벙벙하다.
소환수 유령마 부키를 현실화시키는데 드는 수고가 단지 게임 캡슐을 더 이상 파괴하지 말라는 거라고?
“진짜 부탁이 그겁니까?”
[네! 제발···, 캡슐이 없으면 플레이어가 어떻게 게임에 접속해요?]
찬웅은 조금 당황했다.
‘내가 캡슐을 재미로 파괴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나? 이젠 그럴 생각 없는데···.’
아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자신과 악연이 있는 국가가 일본만 있는 게 아니다.
‘중국도 있고.’
또 캡슐 파괴 효과가 생각보다 좋다.
일본만 봐도 자위대 특수초인각성대가 거의 와해 지경까지 왔다.
물론 인체실험 폭로 영향도 있긴 하지만.
찬웅이 침묵하자 엘리는 더더욱 안절부절.
캡슐 대량 파괴범.
일반인이라면 자신이 직접 처리하면 된다.
그냥 죽여도 되고,
하지만 이 플레이어는···,
[캡슐을 어떻게 생산하시는지 모르시죠? 3억이라도 밑지고 파는 거거든요?]
왜앵! 앵! 앵!
빠른 날갯짓으로 호들갑을 떨면서.
[한군데에서 만들지 않아요. 총 160개 국가에서 각각 부품을 생산해요. 그렇게 생산된 부품은 80개 국가로 수출되어 조립되고, 80개의 부품은 40개 국가로 수출, 조립, 그걸 또 20개 국가에서···.]
뭐가 되게 복잡하다.
아무튼 엄청난 수고와 시간, 그리고 돈이 든다는 말.
[다음부터 부수지 않을 거죠?]
“···잠시 생각할 시간을.”
[아, 아니! 제가 약속한 보상은 진짜 특혜에요. 원래는 긴급 패치를 통해야만 가능한데 개발자 권한으로 풀어주는 거예요.]
“진짜···, 요?”
[네, 부키는 NPC잖아요.]
“그렇죠.”
[NPC가 진(眞), 그리고 리얼(real)의 대상이 되는 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요. 하지만 케이님이 약속만 하시면 원칙을 깨서라도···.]
찬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금지?’
금지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NPC도 진(眞)이 될 수 있는 거였다면···.’
엘프 장로 에루인, 마공학자 데우스칩, 마탑의 천재 마법사 브랜달, 이들이 현실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 뿐인가?
그들이 나올 수 있다면 광룡 레지키쓰론도 가능할 터, 예를 들어 군주라고 불리는 침식지 보스들도···.
‘씨발!’
갑자기 소름이 끼친다.
게임 속 괴물들이 현실 밖으로 나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악몽이 벌어질 터.
‘죽일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지구상 모든 무기를 총동원해도 힘들다.
물론 지구도 미사일이나 핵무기 등 압도적인 무기를 갖추고 있지만 놈들도 그에 대응하는 능력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마법.
과연 감당해낼 수 있을까?
대체 뭐 하자는 게임인가?
“물어볼 게 있어요.”
[넵! 말씀하세요.]
“듀플렉스 스페이스 이거, 정말 게임 맞습니까?”
[네, 고객님. 게임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게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게임입니다. 뭐, 조금 특이한 컨텐츠가 있긴 하지만.]
“···.”
컨텐츠가 조금 특이한 수준이라고?
“그래서 게임의 최종 목적이 뭡니까?”
[아, 으음, 그, 그게···, 자세한 건 저도 알려드릴 수 없어요.]
“간단하게라도.”
[···침식을 막고 오염지역을 정화하는 거? 그리고 현실과 가상세계의 동반 성장? 그게 최종 엔딩이죠.]
목적은 알 것 같고.
“긴급 패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향후 게임에 변화를 가져올 패치가 예정되어 있나요?”
[현재로선 없습니다. 패치는 최후의 수단이라, 그리고 그렇게 되어선 안 되겠죠?]
다행이다.
“최후 수단이라는 말의 뜻이, 그리고 왜 안된다는 거죠?”
[답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모든 해답은 게임 안에 있습니다. 열겜! 즐겜! 하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더 이상 말해줄 기미는 없는 듯하고···, 그래. 하다 보면 알겠지.
[빨리 확답을 주세요. 저도 이곳에 오래 있을 수 없는 몸이라.]
찬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두 번 다신 캡슐을 부수지 않을게요.”
[와!!! 약속하시는 거죠?]
“네.”
[그럼···, 탈것을 소환해보실래요?]
시키는 대로 했다.
손을 바닥에 짚자 손등에 새겨진 소환 문신이 빛을 발하고.
쑤우우욱,
유령마가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히이이잉! 푸르르르.”
기다렸다는 듯 날개를 비벼 요정 가루를 유령마 곳곳에 뿌려대는 요정 엘리.
뾰로로로롱! 뾰로롱! 뾰롱!
[자, 다 됐어요. 바깥에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도록 반영률을 성장시켜드렸어요. 이건 서비스! 그럼 전 이만, 다음에 봐요!]
팟!
인사할 새도 없이 사라졌다.
“···갔네.”
그럼 소환수 정보를 확인해보자.
[이름 : 부키(케이의 소환수)]
[진(眞) 건국왕 알라마의 유령마]
[등급 : 전설]
[액티브 스킬 : 뒷발차기(10단계), 환영(10단계), 활강(10단계)]
[패시브 스킬 : 지칠 줄 모르는 체력(10단계), 쾌속(10단계)]
[동화율] : 200%
[반영률] : 50%
“어!”
소환수 상태창이 달라졌다.
이름에 자신의 소환수라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었고.
‘진(眞)이구나.’
진(眞) 건국왕 알라마의 유령마, 등급 전설.
스킬로 모조리 10단계씩.
하지만 무엇보다 상태창 하단에 떡 하니 박혀있는 두 개의 스탯.
‘···동화율이 200%?’
동화율은 플레이어가 얼마나 게임상에서 적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
유령마는 원래 여기서 살던 놈이다.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고.
‘그럼 반영률은 지구에서의 능력?’
그런 것 같다.
50%면 절반의 힘을 보여준다는 의미.
‘이거 대박인데.’
캡슐 파괴를 하지 않겠다는 맹세로 받은 보상치고는 엄청나다.
‘시험해볼까?’
즉시 로그아웃을 하고 캡슐에서 일어나보니.
‘···손등에 소환 문신이 진짜로 생겼어.’
즉시 적용.
이건 택배 시스템이 아닌가 보다.
찬웅은 아무도 없는 옥상으로 올라가 손바닥을 바닥에 댔다.
쑤우우욱,
어느새 날개를 펄럭이며 나타난 유령마, 이름답게 형체도 자세히 봐야 보일 정도로 반투명한 모습이었다.
“푸르르르,”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연신 투레질을 하는 유령마 부키, 그리고는 찬웅에게 다가와 머리를 비벼대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그래, 좋아? 우리 한번 날아볼까?”
소환수라서 찬웅의 의도를 알아챘나 보다.
타기 좋게 몸을 옆으로 돌리며.
“히이이잉!”
찬웅은 유령마 부키에 올라탔다.
“가자!”
타앗!
유령마가 하늘을 난다.
환영이 발동되니 반투명이 완전한 투명 상태로 변하고,
쾌속!
쐐애액!
빛살처럼 나아가,
활강!
아름다운 두 날개로 양력을 받아 멀리, 저 멀리.
“하하하!”
서울에서 출발했는데 어느새 인천, 백령도, 다시 기수를 돌려 동북 방향으로, 그러자 휴전선을 넘어 북한 땅.
‘저긴 개성이야?’
비행체가 이쪽 지역을 통과하면 어떻게 되지?
하지만 한참을 날아도 조용하다.
레이더에도 걸리지 않는 모양.
‘동쪽은 어떨까?’
찬웅은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허리띠 에고 시스템에 포스를 불어넣어.
‘일본 오사카까지 안내해 줄 수 있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소환수와 내비게이션 에고 시스템을 연동합니다.]
‘그런 것까지?’
“푸르륵! 히이잉!”
유령마 부키가 뭔가 느꼈는지 힘차게 울음을 터뜨리며 방향을 꺾었다.
쐐애액!
‘···이거 생각보다 훨씬 괜찮아.’
자율 주행 시스템이나 진배없다.
가고 싶은 곳 정해서 의식만 하면 목적지까지 그냥 간다.
세계 어디든 말이다.
‘시간을 재보자.’
비행기를 탄다고 가정하면 인천공항에서 오사카 간사이 공항까지 약 1시간 30분 소요.
발밑으로 보이는 동해 바다.
그리고 상선과 어선들.
군함들도 눈에 들어오고.
점차 어둑어둑해진다.
한참을 날아가니 땅이 보이고, 발밑으로 보이는 도시들.
[오사카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벌써?’
딱 3시간 걸렸다.
여객용 비행기보다 두 배 느리다.
‘반영률이 50%인데 이 정도 빠르기라면···.’
유령마는 오사카 상공을 한 바퀴 돌았다.
역시 아무 일 없었다.
한적한데 내려서 유령마를 소환 해제하고.
‘배고픈데 라면이나 먹고 가자.’
혼죠의 집무실에서 털어온 엔화도 있으니.
일본이란 나라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음식은 죄가 없다.
※ ※ ※
지구는 듀플렉스 스페이스라는 가상 현실 게임에 의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빌럼 범죄라는 역기능도 있지만, 순기능도 분명히 있다.
진(眞) 아이템으로 얻은 물약을 연구해 신약도 개발되고 있고, 산업 전반에서 가히 혁명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게다가 가장 많은 숫자의 진(眞) 아이템인 마정석,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 연구되고 있고.
수량이 부족한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그래서 각국 정부는 침식지 정화에 온 힘을 쏟고 있는 상황, 미국과 유럽, 러시아, 중국,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
밤새도록 유령마 드라이브를 하고 난 후, 찬웅은 아침에 APS 본부로 왔다.
그런데 오늘은 본부 입구가 한산하다.
‘기자들은 다 어디로 갔지?’
최기병에게 가서 물어보니.
“속초로 갔습니다. 우리 측 각성 플레이어 4명도 출동했고요.”
“왜요? 무슨 일 터졌나요?”
대검찰청 테러 사건이 있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걸 보십시오.”
최기병은 리모콘으로 TV를 틀었다.
그러자 뉴스에서.
- 설악산에 나간 오대기 기자 불러보겠습니다. 현재 상황은 어떤가요?
- 네, 보시는 것처럼 흔들바위가 있던 장소가 텅 비어있습니다. 어젯밤 누군가가 흔들바위를 움직여 밑으로 굴려버린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저게 무슨 일?
- 오기자, 주변 상인들 충격이 말이 아니겠네요. 복구는 진행되고 있습니까?
- 그렇습니다. 현재 APS에서 파견된 각성 플레이어 2명이 흔들바위를 원위치까지 옮기는 작업을 수행하는 중이며 늦어도 30분 안에 복구가 완료될···.
기가 막힌다.
만우절 때나 볼 수 있는 뉴스 아닌가.
“저거 각성 플레이어 짓이죠?”
“보시는 바와 같이, 하지만 빌런 성향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저도 가봐야···.”
“괜찮습니다. 마태길 플레이어와 봉춘섭 플레이어가 흔들바위 복구 작업 중이고, 이필동 과장과 구종수 형사는 범인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인원은 집에서 대기하고 있고요.”
단순한 장난처럼 보이긴 하다.
사람 안 죽은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일까.
최기병이 태블릿을 찬웅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아참, 마침 잘 오셨습니다. 여기 파워 스틱 밤의 소개장을 요청한 국가 명단입니다.”
침식지 공략 난이도를 확 떨어뜨릴 수 있는 폭탄.
마키나 공화국, 중앙 연구소에서 살 수 있지만 플레이어 케이의 소개장이 있어야 한다.
“흐음, 몇 군데 안 되네.”
“워낙 비싸니까요.”
하긴 하나에 백만 코인.
이전에 게임 안에서 데우스칩에게 소개장 양식을 받아서 대량으로 써뒀다.
그걸 모두 최기병에게 넘겨줬고.
“최팀장님이 알아서 소개장 배분해주세요.”
253개의 침식지.
혼자서는 절대 못 한다.
무조건 같이해야지.
그래야 실력 있는 플레이어들도 늘어날 테고, 그러다 보면 지성체 침식지 보스, 혹은 군주들을 상대할 힘도 갖추게 되고.
“우리도 슬슬 다음 공략할 침식지 준비합시다.”
“그 말 언제 하시나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찬웅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어 말했다.
“이번 사태에서도 경험했듯이 언제 빌런들이 나타나 범죄를 저지를지 몰라요.”
“맞는 말씀입니다.”
“전국 각 주요 지역에 APS 지부 창설하는 건 어떻습니까? 최팀장님.”
“···지부?”
“네, 각 광역시, 수도권, 도청 소재지, 그리고 인구 30만 이상의 대도시에,”
범죄가 서울에서만 일어나나?
“어음, 이,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긴 하지만 인력이 모자랍니다.”
인력이 문제지.
지부 창설을 위해선 최소 30명 이상의 새로운 각성 플레이어를 확보해야 한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각성은 신중해야 합니다. 통제할 수 없는 플레이어라면?”
빌런을 막기 위해 각성시켰는데, 오히려 빌런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의미.
“전에 APS에서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쳐 각성 예정 대상자들을 선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적성 검사 통과 인원이 현재 10명 정도 되고요.”
“그럼 됐네.”
찬웅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최기병은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다.
레이드가 너무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도 문제.
“보통 레이드할 때 200명 정도가 투입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 레이드가 순조롭게 끝나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각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검증되지 않은 플레이어가 각성할지도 모르고.”
“문제없어요. 적은 숫자로 공략 가능한 침식지를 찾으면 되지.”
“네?”
의문을 표하는 최기병.
그런 곳이 어디 있다고.
하지만 있다.
찬웅도 한번 가본 곳이다.
공략에 투입하는 공격대 인원을 줄이고 원하는 대상을, 원하는 숫자만큼 각성시키기에 알맞은 침식지.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마키나 공화국의 파워 스틱 밤을 사용하면 안 되는 곳.
그래서 타국들이 우선 공략 침식지 목록에서 아예 빼버린 곳.
“먼저 답사 다녀와야겠어요. 보고 나서 최종결정하죠.”
“알겠습니다.”
“본부 캡슐 사용해도 될까요?”
“그럼요! 마음대로 쓰십시오.”
가보자.
가서 결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