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리 스탁턴. >
오래전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앞으로 일어날 범죄를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끔찍한 현장에선 더더욱 절실했다.
물론 범죄 예방은 가능하다.
CCTV 같은 감시 체계를 갖춘다거나, 경찰의 인력을 늘려 순찰을 강화한다거나, 잠금장치나 경보장치, 통제구역을 설정하고, 민간경비를 도입한다거나.
하지만 그건 빌런 각성 플레이어가 출현하지 않았을 때나 적용되는 얘기다.
세상은 달라졌다.
빌런 이전과 빌런 이후,
기존의 시스템으로는 절대 빌런을 막을 수 없다.
하얗게 질린 표정의 최기병.
사망자만 해도 32명, 그중 심각한 손상으로 응급 수술을 요하는 부상자 14명, 당연히 모두 검사들, 피해가 너무 크다.
‘딸기씨와 민도연씨가 그나마 빨리 달려와서 망정이지.’
그녀들이 없었다면 대강당에 모인 검사들은 몰살당했을 터.
덜덜덜.
떨고 있는 유송무 검찰 총장.
쇄골이 부러진 고통도 있지만 그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 심했다.
망연자실한 얼굴의 유송무, 넋이 나간 듯, 고저 없는 말투로 최기병에게 물었다.
“혹시 담배 하나 빌릴 수 있겠나?”
“병원에나 가시죠.”
“제발, 한 대만.”
“···네.”
하지만 최기병은 그런 유송무가 마뜩잖다.
그래도 충격이 커 보이니, 하나 물려주고.
“후우···.”
유송무 검찰 총장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자네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나도 알겠네. 결국은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 아닌가.”
싸늘한 눈빛의 최기병.
“왜 그때 거절하셨습니까? 저의 제안대로 대검찰청에 APS 각성 플레이어 경호 인력을 한 명만 배치했더라도 훨씬 피해가 줄어들었을 텐데요.”
“그건···, 아니, 됐네. 이 마당에 더 말해봐야 뭐하겠나.”
쓸쓸한 어조로 말하는 유송무 검찰 총장.
최기병의 말이 맞다.
그는 분명 자신에게 경호 인력 배치를 요청했고, 자신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네. 책임은 져야지.”
책임?
책임이라고?
단단히 화가 난 최기병,
“사퇴하면 끝나는 겁니까?”
“그럼 여기서 내가 뭘 더할 수 있겠나?”
“웃기지 마세요.”
“자네 말이 너무 심하군.”
“참 편하네요. 뻔뻔하게 도망치는 주제에 책임? 솔직히 화가 납니다. 그 알량한 법으로 당신을 처벌하지 못해서.”
“···.”
유송무는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참담한 마음.
최기병은 미련 없이 유송무에게 등을 돌렸다.
더 말할 이유도 없고,
‘제기랄! 경호 인력이 한 명만 있었어도,’
빌런 범죄가 다 심각하지만 이번 건은 특히 그랬다.
국가기관에 대한 공격.
그것도 치안 시스템이 세계 최고라고 인정받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
당연히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성과는 있었다.
대검찰청이 테러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각성 플레이어들에게 출동 지시를 내려, 진압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0분 정도.
다른 여타 국가에서 벌어졌던 참극과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보면 한국 APS의 신속한 사건 처리가 돋보이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까.
‘결국 케이가 없었으면···.’
케이가 목숨을 구해내, 케이 때문에 APS에 들어온 민도연과 신여은.
두 사람이 사건을 해결해버렸다.
※ ※ ※
일본 후쿠시마 자위대 기지.
시커먼 연기를 뿜어대며 아직도 불타고 있는 게임 접속 캡슐 센터를 뒤로하고 찬웅은 본부로 보이는 건물로 몰래 진입했다.
‘아무도 없겠지?’
다 불 끄러 나갔을 터.
목적지는 죽은 혼죠의 집무실.
수천 개의 게임 캡슐을 운영하면서 권력을 휘둘러왔던 놈이다.
아마 지금까지 모아뒀던 진(眞) 아이템도 다수 있을 것이다.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로그드라실 이벤트를 기점으로 꽤 많은 양이 풀렸었다.
또 하나, 마정석으로 만든 마약.
모조리 압수해서 폐기 처분하자.
‘어디지? 집무실은 보통 1층 아니면 맨 꼭대기에 있을 건데, 일본어로 쓰여서 읽지를 못하겠어.’
[동시통역 시스템 가동합니다.]
찬웅이 일본어를 바라보면 그걸 즉시 번역해주는 허리띠 에고 시스템.
모퉁이를 돌아서자 정면으로 보이는 커다란 문.
‘여기네.’
문에 붙은 부대 지휘관 실이라는 일본어.
찬웅은 문손잡이를 잡았다.
‘잠겨있구나.’
그러나 걱정 없다.
[진(眞) 암살자 루인의 섬세한 살색 장갑]
[등급 : 전설]
[장비 종류 : 장갑]
[귀속 여부 : 습득 시 귀속]
[장비 기술 : 만능열쇠 / 공격 속도 20% 상승.]
철컥!
포스를 불어넣자 자동으로 열리는 문.
찬웅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오!’
역시 금고가 있었다.
그것도 매우 큼지막한.
‘지문인식인가?’
이것도 만능열쇠가 작동하려나?
엄지를 갖다 대보니.
쓱, 철컥!
이번에도 자연스레 열렸다.
금고 안에 있는 물건들.
예상대로였다.
날카로운 칼, 단검, 둔기 같은 장비 아이템, 자원 재생 물약, 가속 물약, 마법 스크롤, 다수의 마정석, 그리고 약물이 들어간 주사기도.
‘이게 그 마약.’
아이템 말고도 일본 엔화 현찰에, 회계 장부, 금괴와 보석 같은 귀중품도 있었다.
그리고 서류 같은 것도,
‘···인체실험 결과?’
개새끼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과거 저질렀던 간악한 행위를 그대로 답습하는 놈들.
희생자들의 이름도 그대로 나와 있었다.
대부분 일본인, 자위대에 지원한 젊은이 중 뒤탈 없는 이들만 골라서 실험을 한 모양.
‘폭로해야겠군.’
일본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가 알아야 한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군대가 얼마나 천인공노할 짓을 자행했는지.
‘한국이 나서는 건 그렇고···,’
미국이 좋겠지?
찬웅은 닥치는 대로 물건을 쓸어 담았다.
자위대는 당분간 진(眞) 아이템은 구경도 못 할 것이다.
캡슐이 다 파괴되어 당분간 게임도 못 할 텐데.
순간!
저벅저벅,
복도에서 들리는 발걸음.
‘누가 오나?’
스르륵, 철컥!
찬웅은 금고 문을 닫고, 은신막을 발현한 채, 조용히 벽에 붙었다.
시끄럽게 들리는 음성,
‘번역시스템 가동하고 있지?’
[현재 가동 중입니다.]
사망한 혼죠의 부관, 시마모토 헤이치는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전화 통화를 하면서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당장 게임에도 접속할 수 없단 말이야!!!”
씩씩대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시마모토.
“어이, 나카타 총리, 죽고 싶나? 강제 징발이라도 해서 캡슐을 긁어와! 숫자를 맞추라고! 아니면 더 사들이던가.”
놈의 입에서 나온 총리라는 말.
아마 일본 내각 수상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완전 콩가루야.’
게임을 못 하게 생겼으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터.
“분명 케이, 그놈이 틀림없어. 더러운 조센징 새끼, 자랑스러운 대일본의 군대가 공격당했는데 정부는 뭐 하고 있는 거야?”
···어떻게?
혹시 폭탄 던질 때 들켰나?
“증거? 칙쇼! 증거 같은 것이 뭐가 중요해! 그딴 건 조작하면 그만이야. 딥페이크 영상이라도 하나 만들어 내서 뒤집어씌우라고.”
그러면 그렇지.
증거도 없이 억지를 부리려고 한다.
그렇다면 만들어준다.
증거를 말이다.
그 와중에 시마모토는 전화를 끊은 후, 금고 앞으로 다가갔다.
혼죠 소장이 죽자마자 그의 시체를 이용해 지문인식 장치를 자신의 것으로 대체했다. 진 아이템을 보유하는 것도 권력이니까.
정 급하면 아이템과 물건을 팔아 캡슐 살 돈을 마련한다.
슥, 철컥!
금고가 열렸다.
“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텅 비어버린 금고 안.
“···,”
불과 한 시간 전에 확인했었다.
그러던 중 폭발 소리에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을 뿐인데.
“설마 이런 짓을 한 놈이···.”
뭔가 깨달은 듯 시마모토는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 진짜 그놈이야? 어떻게?”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텅 빈 금고 안을 바라보던 시마모토, 갑자기 뒤통수가 간질간질하다.
‘뭐지?’
콱!
순간! 자신의 머리통을 위에서 눌러오는 손.
“윽! 누, 누구···?”
스으으윽!
목 뒷덜미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촉감.
“쉿!”
서걱!
뜨끔.
툭!
뭔가 떨어진 것 같은데···,
“헉!”
사람의 귀.
얼마나 깔끔하게 잘렸는지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혹시?’
오른쪽 귀를 더듬어보니 맨들맨들한 살갗, 그리고 이제야 묻어 나오는 피.
자신의 귀였다.
‘이, 이런!’
그런데 왜 귀가 아프지 않지?
얼마나 날카로우면.
···의료용 메스?
“미친!”
시마모토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크윽!”
하지만 머리를 눌러오는 엄청난 힘, 가공할 압력,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느새 목에 대어진 날카로운 날붙이.
시마모토는 목격했다.
도끼였다.
자그마한 손도끼.
도끼까지 본 이상 모를 리 있나?
“너, 넌?”
“입 다물어. 말하면 죽는다.”
“···.”
“숨소리가 들려도 죽는다. 움직여도 죽는다. 그리고 내가 기분이 나빠져도 넌 죽는다.”
꿀꺽.
시마모토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뭘 하라는 거야?
“내가 누굴까?”
“···케, 케이.”
“말하지 말랬잖아.”
서거거걱!
툭!
이번엔 왼쪽 귀.
하지만 처음과 다르다.
맨살이 떨어져 나가는, 참을 수 없는 고통,
“끄어어어···.”
“어? 또 말을 하네?”
“읍···.”
공포에 질려 입을 꾹 다무는 시마모토.
우우웅!
도끼가 진동했다.
살벌한 포스의 기운.
입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반격이 가능할까?
‘턱도 없어.’
정면으로 싸워도 안 된다.
하물며 이런 식으로 언제 어디서 모습을 나타낼지도 모르는 플레이어를 어떻게 당해?
“그래, 그렇게 듣고만 있으라고.”
“···.”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경고한다. 만약 강제 각성 인체실험을 시도하는 순간 넌 죽어.”
“···.”
시마모토는 이 끔찍한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날 자극하지 마. 플레이어답게 게임에나 집중해. 알았어?”
“···.”
“명심해, 한국과 일본은 가까워. 또 허튼수작 부리면 날 만나게 될 거야. 궁금하면 시험해봐. 언제 어디서든 널 찾아갈 테니까.”
“···.”
시마모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존감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지독한 열패감.
그리고 공포.
제발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았으면.
잠시 후.
목에서 느껴지던 살기가 사라졌다.
머리를 짓누르던 압박감도,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지만 집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 ※ ※
카리브해 바하마 제도의 한 섬, 아름다운 해변가.
게리 스탁턴은 선베드에 앉아 시원한 모히또 한잔을 빨대로 쪽 빨았다.
듀플렉스 스페이스 게임 회사 대표로 알려진 그였다.
금발의 금색 눈동자, 나이를 알 수 없는 외모.
사실 듀플렉스 스페이스는 처음부터 게임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공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듀플렉스 스페이스는 하나의 ‘세상’으로 설계됐다.
허상이지만 허상이 아닌 곳,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곳.
NPC라 부르는 인물들, 시나리오라고 불리는 설정들, 마법과 정령, 신화, 용들의 이야기, 그것은 실제 역사의 기록이었다.
침식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100년이고 1,000년이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뒀을 하나의 ‘세상’
그러나 원인 모를 침식 때문에 상황이 달라졌다.
침식은 세상의 오류를 만들어 냈다.
그 때문인지 NPC들은 스스로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실체를.
그리고 게리 스탁턴은 그 세상을 탈출한 첫 번째 존재였다.
두 번째도 있다.
자신의 조력자로 선택된 비서 엘리였다.
“주인님, 이걸 보세요.”
“음? 엘리, 뭔데···.”
게리 스탁턴의 비서 엘리가 내민 태블릿엔 오늘의 사건 사고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가 띄워져 있었다.
첫 번째 항목.
빌런에 의한 살인사건.
“한국 대검찰청 학살이라, 별로 많이도 안 죽었네. 그리고 검사들이라면 바빠서 게임도 잘 안 하는 애들이잖아. 앞으로 이런 보고서는 작성하지도 마.”
“그거 말고 다음 거요.”
“또 있어? 어디 보자···, 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리.
그러더니 한껏 분노한 목소리로.
“이런 미친놈을 봤나! 캡슐을 3천 개씩이나 부숴 먹어?”
무려 3천 개, 그럼 당분간 3천 명의 플레이어들이 당분간 게임을 못 한다는 의미, 물론 캡슐을 더 생산하면 되지만 그게 어디 쉬울까. 지금도 생산량이 후달리는 판국에.
“짜증이 확 나는군. 이거 누구 짓이야? 각성자 새끼지?”
길길이 날뛰는 게리 스탁턴.
캡슐 하나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돈이 들어가나.
3억도 밑지고 파는 건데.
“누군지 알아내서 그 새끼 아바타 당장 데이터에서 삭제시켜.”
“플레이어 케이로 추정됩니다만.”
“이 개 같은 놈이···, 음? 누구?”
“케이, 플레이어 케이요.”
“···정말?”
“네.”
“후우.”
이러면 난감하다.
케이는 아무리 게임을 만든 자신이라 해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
고작 캡슐 3천 개와 비교될 플레이어가 아니다.
“어떻게 할까요?”
게리 스탁턴은 곰곰이 생각했다.
진짜 어떡하지?
만나볼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