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전히 고통받는 최기병 >
벌써 소문이 퍼졌다.
카쟌에 이은 위트리아 침식지 공략 성공.
미국에 쏟아진 어마어마한 양의 각종 진(眞) 아이템들.
정부에서 직접 공격대를 운영하는 나라들은 모두 각자의 정보망을 움직여 어떤 식으로 침식지가 공략되었는지 탐색에 나섰다.
‘또 케이랍니다.’
‘상큼한 딸기도 큰 역할을 했다고.’
‘엄청난 신무기를 선보였다던데.’
‘마키나 공화국 산(産) 폭탄? 당장 코인 준비해.’
‘이미 문의해봤는데 플레이어 케이를 통해서만 판답니다.’
‘또 케이? 이제 별명이냐? 와, 또케이?’
‘마탑은? 7서클 쉴드 스크롤이라도 사와.’
‘이미 누군가가 싹 긁어가서, 남은 것이 하나도,’
아직 더 남은 것이 있다.
대신전 축복이 어떤 성과를 만들어낼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었고.
현재, 검찰로 출두 중인 최기병의 스마트폰에도 연신 울려대는 무수한 메시지 알림음.
한국의 두 번째 공략은 언제인가?
케이는 확실하게 참여하는지.
공략 장소가 어디인지 귀띔이라도,
이번에도 투자를 받을 건지.
‘어우, 머리가 다 아프네.’
검찰 출두하는 와중에 이게 다 뭐야?
스마트폰 꺼두자.
최기병은 공무원, 그래서 근무하는 동안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바로 검찰.
이번 출두는 피의자 신분이 아니라 증언을 위한 참고인 자격이라 괜찮긴 하지만 그래도 검찰은 검찰이다.
‘빨리 끝내고 일이나 해야지.’
안내를 받은 최기병은 검찰 조사실이 아니라 차장 검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차장 검사 진종설입니다.”
“최기병입니다.”
서글서글한 미소로 악수를 청해오는 진종설, 중년의 나이인데도 20대라 여겨도 될 만큼 젊어 보였다.
“공무에 바쁘신 분을 이렇게 불러내어 송구스럽습니다.”
“검사님만 할까요?”
“하하하, 같은 공무원끼리 서로 이해해주지 못하면 누가 해주겠습니까.”
분위기가 부드럽다.
검찰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솔직히 걱정했는데.
“조만대와 김윤명은 곧 기소될 겁니다. 이 건 말고도 개인 비리 혐의가 수십 건이라, 하지만 위계에 의한 협박도 조사해야 해서.”
“성실하게 증언하겠습니다.”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차장 검사 진종설의 재치있는 말투,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마음, 그러다 보니 조사가 다 끝났는데도 최기병은 여전히 검찰에 있었다.
“차장 검사가 할 일 없어 보여도 굉장히 바빠요. 그래서 하고 싶은 게임도 제대로 못 하니, 빨리 때려치고 개업하든지 해야지.”
“아! 게임도 하세요?”
“당연하죠. 이래 봬도 용병 플레이어인데요.”
“이거 탐나네요.”
“네?”
“차장 검사 그만두시고 APS로 오세요. 능력 있는 분에겐 항상 열려있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진종설.
“스카웃 제안? 어휴, 잘나면 언제나 피곤하다니까.”
“그렇죠? 그 기분 제가 잘 압니다.”
“하하하, 우리 잘난 사람끼리 한잔 어떻습니까?”
“좋죠.”
최기병은 진종설과 함께 룸이 있는 조용한 술집으로 옮겼다.
술이 한병 두병 비워지고 거나하게 취한 두 사람.
“그런데 말입니다. 그 [케이]라는 플레이어와 함께 게임도 하고 그러십니까?”
“당연하죠. 캬잔 공략도 같이했는데.”
진종설은 선망의 눈초리.
“어이쿠! 부러워 미치겠네. 이거 진짜 APS라도 들어가야 하나?”
“뭐가 그렇게 부럽다고.”
“제가 케이의 팬이라서요.”
그러더니 은근하게,
“저, 각성 플레이어 말입니다. 진 아이템도 진 아이템이지만 전 각성이 제일 신기합니다. 진짜 현실에서 아바타가 가진 포스를 사용할 수 있나요?”
“당연하죠. 보실래요?”
최기병이 오른손으로 유리 술잔을 잡고 그대로 힘을 주니.
파사삭!
손안에서 조각조각 부서진 채 유리가루가 술집 바닥으로 떨어진다.
“헉! 소, 손은 괜찮으십니까? 어디···,”
혼비백산하는 진종설, 최기병의 손을 살피며 다친 곳이 없는지 호들갑을 떨었다..
‘참 괜찮은 사람이네.’
보면 볼수록 진국.
이런 사람은 검찰 총장을 해야지, 누가 하나?
“팀장님도 각성 플레이어였군요. 그럼 APS 각성 플레이어도 모두 이렇게 대단하십니까?”
“전 약한 편이죠. 군 출신인 우현수씨나 고유섭씨는 저보다 훨씬 강하고요. 그 밖에도 봉춘섭, 마태길, 아! 이필동씨도 있고.”
“···생각보다 꽤 많이 있네요.”
“카쟌 침식지 공략 이후에도 각성한 플레이어들 꽤 많습니다. 몇 명인가 하면···.”
거나하게 취한 최기병의 입담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맞장구를 쳐주는 진종설, 반말도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마치 30년 지기 불알친구 같았다.
“APS에 들어가면 나도 각성할 수 있나요?”
“됩니다. 제가 해드릴게요. 대신전 초대권도 있어서 가능성 충분하죠.”
“아! 이거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네요.”
“몸만 오세요.”
진종설은 진짜 심사숙고하는 듯했다.
정말 APS에 마음이 있는 듯.
“APS에 들어가면 케이도 직접 볼 수 있는 겁니까? ···아바타가 아니라 현실에서.”
“뭐, 기회가 있다면?”
진종설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럼 팀장님은 케이의 진짜 신분을 알고 계시는지.”
그러자 정색하는 최기병.
“그건 묻지 마십시오. 아무리 진검사님이라도 이건 선을 넘는 겁니다.”
“···아! 이거 제가 실수했군요.”
“하하,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아닙니다.”
진종설은 한발 물러섰다.
“아무튼 케이님과 함께 플레이해 봤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그런데 그 양반 주로 솔플 한다면서요?”
“항상 같이 다니는 분이 있긴 한데.”
“응?”
“네, 상큼한 딸기라고, 제일 친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아바타 명.
“딸기? 아바타 명이 살짝 유치하네.”
“그건 그분이 딸기를 좋아해서 그런 겁니다.”
“얼마나 좋아하면 아바타 이름까지. 여자분이신가?”
“신여은씨라고, 신광식 변호사 아세요?”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신변호사 딸인데, 얼마 전까지 불치병으로 고생했거든요. 근데 감쪽같이 나았어요. 우리가 판단하기로는 진 치유 물약을···.”
최기병은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마음에 맞는 친구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이게 소확행이지.
※ ※ ※
차장 검사 진종설은 최기병과 헤어진 후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술에 취했으니, 운전은 안 되고, 법을 다루는 검사가 법을 지켜야지.
그래서 걷기로 했다.
천천히, 술도 깰 겸.
‘조금 아깝군.’
진혈의 군주, 렐리스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매혹] 스킬은 각성 플레이어도 저항할 수 없다.
‘케이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아무리 [매혹] 스킬이라도 한계가 있는 법.
절대 비밀이라고 스스로 암시해둔 사실은 자물쇠가 굳게 걸려있어 열기 힘들다. 억지로 열려고 하면 부작용이 일어나고.
최기병은 케이의 존재를 자물쇠 수십 개로 칭칭 감아 둔 것 같았다. 직접 놈의 정체를 알아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걸리긴 했으니까.’
매혹에 걸린 이상 최기병은 걱정할 것이 없다.
매혹과 세뇌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누구보다 친한 친구 사이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은.
군주께서 직접 내리신 지엄한 명.
현실에서 케이를 찾아 그를 제거하라.
‘도마뱀의 사도들이 된통 당한 모양이야.’
하지만 그까짓 도마뱀과 진혈의 군주를 어떻게 비교하나?
도마뱀을 자신의 브레쓰로 사도들을 늘린다.
아무나, 무작위로.
그분은 직접 선택하신다.
고르고 골라서 조건에 맞아야만 은총을 입을 수 있다.
한마디로 정예 중의 정예.
그래서 받은 스킬도 매우 많고.
‘상큼한 딸기, 신여은쪽으로 집중해봐야겠어.’
현실에서 그녀의 신분을 알아냈다.
항상 붙어 다닐 정도로 친하다고 했으니 케이의 현실 신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기 전에···.’
혹시 모르니 포스를 채우고.
진종설은 조금 빠르게 걸었다.
한참을 걸어서 어느덧 교외 변두리에 버려진 창고에 도착해서.
슥슥,
바닥을 발로 쓸었다.
그러자 나타나는 강철 판대기.
진종설은 바닥의 철판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잘 있었어?”
“읍읍!”
철판 아래 지하실엔 짙게 화장한 젊은 여인이 입과 두 손을 결박당한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탁!
진종설은 지하실 아래로 내려갔다.
“으읍! 읍! 읍! 읍···.”
“어허, 괜찮아, 금방 끝날 거야.”
희미한 빛에 드러난 여인의 가녀린 목덜미.
고르고 고른 제물이다.
유흥업소에 종사하다가 선수금을 떼먹고 도망간 걸로 알려져 없어진다고 해도 찾을 사람 없을 터.
진종설은 서슴없이 여인의 목으로 입을 가져다 댔다.
콰직!
공포에 물든 그녀의 눈, 하지만 곧 쾌감의 눈빛으로.
스킬 [흡혈]
현실의 포스를 늘려주는 효과.
이것만 해도 도마뱀 피부와는 상대도 안 된다.
‘나보다 포스가 많은 플레이어가 아무도 없겠지.’
있다면 같은 사도들 중 한 명일 테고.
쩌거거걱, 쩌걱,
여인의 몸이 쪼그라들었다.
투둑, 투두둑, 피부가 거무죽죽해지더니 껍질이 떨어져 나갔다.
퍼석, 퍼서석.
머리카락이 삭아서 떨어지는 걸 시작으로 여인의 몸이 무너진다.
가루가 되어 사라지면서 시체도 남지 않았다.
마치 아바타처럼 말이다.
만족한 표정의 진종설.
그의 입에서 길게 뻗어 나온 송곳니.
“괜찮군.”
[흡혈] 스킬로 섭취한 피를 포스로 변환시키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다음 날 아침까진 기다려야 할 터.
‘신여은이라고 했지?’
그녀의 피도 딸기만큼이나 상큼할까?
※ ※ ※
다음날 토요일.
휴일임에도 찬웅은 바이크를 타고 APS 본부에 도착했다.
재택근무 종료.
그리고 전체 각성 플레이어 회의.
침식지 공략에 대해 논의하려나 본데···, 현재 한국 언론 상황을 보니 조금 조용해진 것 같기도 하고.
어떡할까? 미국과 한 번 더 할까, 아니면 APS와 해야 하나.
사실 아무나 해도 상관없다. 한국에 살고 있으니까 한국이 낫긴 하겠지만.
“찬웅씨!”
“안녕하세요. 이필동 과장님.”
“이번에도 고생 많으셨어요.”
“뭘요, 이과장님이 계셔서 제가 자유로운데.”
“하하하, 참! 최팀장님 만나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네.”
사실 최팀장에겐 미안한 마음도 있다.
자신의 정체를 숨겨주고, 일상생활에 부족함이 없도록 최대한 지원해주는 사람.
‘그래, 다음 공략은 APS와 하자.’
폭탄을 안겨줘야지.
어마어마한 양의 진(眞) 아이템 폭탄.
“어서 오세요. 찬웅씨, 이과장님.”
“오우, 우리 최팀장님, 오늘따라 신수가 훤하시네. 검찰 조사 잘 받고 왔어요?”
“네, 아주 잘 받았습니다. 좋은 사람도 만나고,”
“좋은 사람? 나 말고 그런 사람 또 있다고요?”
“쯧, 이과장님보다 훨씬 좋으신 분입니다.”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거리는 이필동.
살짝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
“이거 배신당한 느낌이네. 이 양반이 첫 만남에 누구 좋다고 할 사람이 아닌데, 그쵸? 찬웅씨, 찬웅씨? 왜 표정이···.”
심각한 표정의 찬웅.
그리고 스슷!
인벤토리에서 루인의 앙증맞은 머리 따개를 꺼냈다.
“헉!”
“···도, 도끼?”
흠칫 놀라는 최기병과 이필동.
강찬웅, 아니 케이가 도끼를 꺼냈다.
도끼를 꺼낸 이유가 뭐겠나.
“···설마?”
“호, 혹시 미, 미국으로 떠나기로 한 겁니까?”
이필동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전에도 최기병과 이야기 나눈 바 있었다.
비밀을 지키려면 가장 좋은 방법,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사실 찬웅의 목적은 그게 아니다.
비슷할 수도 있고.
“이과장님.”
“네, 네?”
“잠깐 비켜보세요.”
도끼를 든 채로 최기병에게 걸어가.
“최팀장님.”
“···왜 그러시죠?”
바짝 긴장한 최기병, 대체 케이가 왜 이럴까?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사도입니까?”
사도?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최팀장님 몸속에서 침식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요?”
“어···,”
찬웅의 말에 이필동이 기겁했다.
“저, 정말? 최팀장님이 침식됐다고요?”
“···미세하지만 분명 침식입니다.”
이번 공략 성공으로 높아진 동화율과 반영률, 침식을 잡아내는 감각은 더더욱 예민해졌다.
만약 진짜 침식되었다면···.
“저, 전 결백합니다. 요근래 게임에 접속하지도 못했습니다, 어젠 검찰 조사도 받았고.”
“그리고 나선요?”
“으흠, 좋은 사람 만나서 술 한잔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것뿐입니다만.”
갑자기 이필동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 최팀장님, 아까부터 좋으신 분, 좋으신 분, 하는데 대체 누굴 만났길래.”
“어, 진종설 차장 검사님인데, 호탕하고, 배려심도 깊고, 무엇보다 저랑 잘 맞아서···.”
“수상하네. 사람 만나면 의심부터 하는 분이 최팀장인데.”
뭔가 있다.
찬웅은 도끼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최기병을 유심히 살폈다.
‘침식의 기운은 확실해. 다만···.’
기운이 매우 적긴 하다.
너무 미세해서 느끼기 힘들 정도.
침식이 아니라 침식의 기운에 영향을 받았다면.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스며들었다면?
‘정신 공격인가?’
가능성 있다.
글로리 오브 쓰론의 신도들도 세뇌를 당했으니까.
세뇌, 현혹, 최면···.
사도들의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치료를 해봐야겠군.’
최기병이 사도가 아니라면 침식의 기운만 소멸할 것이고, 사도라면 가루로 변해 사라질 터.
찬웅은 최기병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동시에 슬며시 포스를 집어넣었다.
“아, 아니 왜?”
침식과 상극인 포스의 힘.
“으윽!”
살짝 얼굴을 찡그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침식된 건 아니야.’
그렇다면?
포스를 조금 더 밀어 넣으니.
파직!
너무나 허무하게 사라지는 침식의 기운,
“···어?”
순식간에 최기병의 표정이 달라졌다.
“괜찮아요?”
“으음, 네. 괘, 괜찮긴 한데···, 희한하네요. 머리가 맑아진 느낌도 나고,”
“그럼 말해봐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그러니까 어제 제가 검찰 조사를 받으러···.”
순간!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어제의 기억들.
진종설 차장 검사와의 만남, 그와 함께한 술자리, 그리고 나눈 대화들.
“마,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정신이 나갔나?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다행히 케이의 존재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지만.
“딸기···.”
갑자기 나온 이름.
“네? 딸기가 어쨌다고요?”
“그, 그놈에게 따, 딸기씨에 대해서 다 말했어요. ···신여은씨가 위험할 수도.”
찬웅은 스마트폰을 꺼내 신여은의 번호를 눌렀다.
뚜우, 뚜우, 하지만 받지 않는다.
‘이런···,’
팟!
잔영만 남기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찬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