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탑의 주인은? >
브랜데인의 이야기가 다 끝났다.
이해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대충 알아들었다.
한마디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NPC.
여기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상이라는 걸 알아버린 영혼.
뭐, 그럴 수 있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오히려 인간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를 고도화된 인공 지능이 깨달음을 얻지 못할 건 뭔가.
어차피 이 게임 자체가 원래 그런 곳이지 않나.
진 아이템이 세상에 나타나고, 아바타의 힘이 발현되고, 침식의 기운도 튀어나왔고.
거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NPC가 추가된들, 이상할 것 하나 없다.
‘그런데 영혼만은 진짜라고?’
브랜데인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사실 영혼이 진짜라면 이 세상이 가짜라고 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나? 허상이라도 실제와 다름없는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건 다 이루며 살 수 있겠지.”
“그런데 왜···?”
“문제는 침식이다. 침식의 저주가 날 내가 아니게 만든다. 지금도 점점 침식되고 있고.”
“아!”
맞다.
깜빡 잊었네.
브랜데인은 침식당했다.
“내 고결한 영혼이 더럽혀지는 걸 원치 않아. 더불어 영혼을 가두는 허상의 틀 안에서도 벗어나길 원한다. 죽음으로서 얻어지는 영혼의 자유! 그게 내가 원하는 한 가지다.”
처연한 브랜데인의 음성.
- 완료 조건 : 봉인된 지하 비고에서 침식의 근원을 제거하세요.(0/1)
- 남은 시간 : 5분
아직 5분 남았다.
“몇 가지 질문할 게 있습니다. 끝나면 원하는 대로 해드리죠.”
“뭐든! 물어봐.”
“이곳이 가상이라는 걸 깨달은 NPC, 아니 그런 존재들이 더 있을까요?”
“난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침식의 영향을 받았다면 더더욱,”
침식이라,
결국 침식이 NPC에게 정체성을 깨닫도록 했다는 말.
“혹시 군주에 대해 들어보신 적은?”
“군주? 처음 들어본다.”
“그럼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힘을 부여해 주는 건?”
“가능하다. 받겠느냐?”
“···사양하죠.”
- 완료 조건 : 봉인된 지하 비고에서 침식의 근원을 제거하세요.(0/1)
- 남은 시간 : 3분
“날 기다렸다고 했는데 이유는?”
“속박의 사슬을 끊어내는 건 오직 너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건 네가 알겠지.”
모르는데···.
죽이면 알 수 있으려나?
“널 보자마자 알았다. 나를 해방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라는 걸. 그러니 어서!”
- 남은 시간 : 2분
이제 시간이 없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드리죠.”
찬웅은 마침내 도끼를 높게 치켜들었다.
“아아아, 드디어!”
츠리릿!
콰악!
암살자 루인의 앙증맞은 머리 따개가 쇠사슬 틈으로 보이는 브랜데인의 가슴팍에 작열했다.
“큭!”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브랜데인.
찬웅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으윽! 뭐지?’
도끼날과 자루를 통해 느껴지는 침식의 기운.
어마어마하다.
이 자그마한 마법사의 몸에 농밀하게 꽉 들어차 있는 기운, 놈이 자신마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미친!’
이런 느낌은 처음.
마치 침식의 호수 안에 들어앉은 기분.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비고로 들어오는 수많은 마법사들을 침식시켰겠지.
- 남은 시간 : 1분.
우웅!
포스의 기운이 움터 오른다.
그래, 포스, 믿는 건 이것뿐.
침식과 상극인 플레이어들만의 힘.
특히 찬웅의 포스는 남다르다.
동화율 100%대부터 홀로 침식지 몬스터를 으깨고 다녔다.
이제 알겠다.
자신의 포스만이 브랜데인의 침식을 물리칠 수 있다.
방출!
찬웅은 도끼를 통해 포스를 무식하게 욱여넣었다.
우우웅!
- 남은 시간 : 30초.
포스에 의해 침식의 힘이 꼬리를 말고 물러난다.
브랜데인이 저항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며 시간이 꽤 걸렸을 터.
멈추지 않고 더.
우우우웅!
그러자,
치직, 치지지직! 치지직!
마치 노이즈가 낀 것처럼 깜박깜박 흩어지는 브랜데인의 육체.
“끄어어어···.”
- 남은 시간 : 10초.
우우우우우우웅!
찬웅은 혼신의 힘을 다해 포스를 방출했다.
- 남은 시간 : 5초.
“케이님!”
딸기가 깨어났나?
하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다.
치칙! 칙! 칙···.
- 남은 시간 : 2초.
결국···.
치치치치치치칙! 치릿! 츳!
모니터 화면이 꺼지듯 순식간에 사라지는 브랜데인.
띠링!
- 완료 조건 : 봉인된 지하 비고에서 침식의 근원을 제거하세요.(완료)
[보상이 지급됩니다.]
‘휴···.’
큰일 날뻔했다.
다음부터는 시간 넉넉하게 잡아야지.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
.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
.
5% 씩이나?
각기 다섯 번의 동화율, 반영률 돌파.
“괘, 괜찮아요?”
“네.”
“근데 무슨 일이···.”
딸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하긴 눈뜨자마자 봤던 거라곤 자신이 쇠사슬에 묶인 노인을 죽이는 모습이었으니.
“딸기씨도 동화율 올랐어요?”
“···아, 네네, 각각 3%씩, 따, 딱히 한 건 없지만.”
딸기는 받을 자격이 있다.
그녀 말대론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그런데 보상 더 없나?
- 보상 : 동화율과 반영률 상승 + 확인되지 않은 보상.
아직 하나 남았다.
확인되지 않는 보상 말이다.
“뭐야? 아무것도 없···, 어?”
대마법사 브랜카인이 묶여있는 자리.
그곳엔 쇠사슬만 남아있는 게 아니었다.
‘지팡이?’
맞다.
지팡이.
브랜데인의 초상화에 그가 들고 있었던 그것.
[대마법사 브랜데인의 마계목 지팡이.]
[등급 : 전설]
[장비 종류 : 무기]
[귀속 여부 : 습득 시 귀속]
[장비 기술 : 제어 권한]
‘으흠,’
애매하다.
진(眞)도 아니다.
게다가 장비 기술도 딱 하나.
‘제어 권한이라.’
뭘 제어한다는 거지?
찬웅은 지팡이를 잡고 정신을 집중해봤다.
‘아하!’
그리고 이 제어 권한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 ※ ※
테라퓨타 마탑.
마탑주 브랜카인과 부탑주 브랜스톤, 그리고 6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이 모였다.
“놈이 언제 다시 여길 오지?”
“추정하기론 내일이면 올 듯합니다. 이방인들이 죽고 나서 세상에 재출현하게 되는 기간이 3일 정도니.”
“그렇군.”
케이는 무조건 죽었을 것이다.
브랜카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슬며시 물어오는 부탑주 브랜스톤.
“그런데 진짜 마탑에 지하 비고가 있었습니까?”
“그래, 존재하고 있다. 절대로 들어가선 안 될 금역이.”
“그곳에 뭐가 있길래···.”
“나도 모른다. 허나 마탑주도 들어가면 죽는 곳이다.”
“그렇다면 놈이 죽는 건 확실하겠군요.”
“클클클, 확실하다마다! 죽음으로 놈의 기운이 약해졌을 터이니···,”
브랜카인은 그가 몸소 만든 스킬 구슬들을 꺼냈다.
준비한 스킬 구슬은 모두 2개, 그러나 실은 환각 마법으로 정교하게 숨긴 저주 구슬.
사실 스킬 구슬을 만드는 건 극히 어렵다.
마정석이 많이 필요하고, 긴 제련 기간과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 것.
현재 마탑의 기술로는 7서클 이상의 스킬 구슬을 만들 여력도, 그리고 보유하고 있지도 않다.
마탑의 기능을 온전하게 이용하면 만들 수 있지만 지금으로선 불가능, 브랜데인의 실종으로 완전한 마탑 기능 활용 방법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환각 마법은 완벽하다.
이건 7서클 부탑주 브랜스톤도 분간하기 힘들다.
하물며 이방인 따위가?
바로 그때.
“저어···,”
우물쭈물,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서는 꼬맹이 마법사 브랜달, 마탑이 인정한 천재, 처음 마나를 깨달아 3서클까지 다다른 기간이 불과 1년 정도.
“뭐냐? 브랜달, 좋은 생각이라도 가지고 있느냐?”
“어, 그거, 그냥 대화로 잘 풀어서 넘겨받으면 안 되나요?”
“대화?”
“네, 정당하게 거래하는 거요. 그 케이라는 이방인이 말이 안 통하는 자도 아니고.”
철없는 브랜달의 말에 브랜카인이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멍청하긴! 아직 이방인을 믿느냐? 마법사가 꼴사납게 엎드려 빌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렷다!”
“그렇다고 치졸하게 속이는 건 마법사로서···.”
“닥쳐라! 내가 지금 당장 널 벌하지 않는 건 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건방지게 나선다면 후계의 지위를 박탈하고 테라퓨타에서 널 추방하겠다.”
“아···.”
단호하게 못을 박는 브랜카인.
“모두 잘 들어라. 이방인들은 교활하다. 욕망에 눈이 먼 자들이지. 부유석을 대가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뻔하지 않나? 이건 우리에게 와야 할 부유석을 넘겨받는 과정일 뿐이야.”
브랜달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잘못된 것.
자신도 마법사이긴 하지만,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죄다 고집불통에 꼰대들, 오만함은 극에 달해 있었고,
어쩌면 테라퓨타라는 폐쇄적인 공간에만 안주하며 살다 보니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브랜달이 가출을 밥 먹듯이 한 이유도 그 때문.
자신은 다르게 살고 싶었다.
마법사들의 사고는 고여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다.
마법보다 가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은 모르고 있다. 아니 알면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지도.
그때였다.
쾅!
마탑주 실을 박차고 들어온 마법사 한 명.
“탑주님!”
“응? 무슨 일인가?”
“노, 놈이 나타났습니다.”
“누구?”
“그 이방인 케이 말입니다.”
“뭐?”
이렇게 일찍?
아직 하루 더 남은 것 같은데.
“지금 놈은 어디 있느냐.”
“마, 마탑 정문 앞에 있습니다.”
“그래? 그럼 끝을 내자꾸나.”
브랜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줄줄이 그를 따르는 마법사들.
예상보다 일찍 왔긴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놈은 오늘 부유석을 토해내고 죽을 테니까.
※ ※ ※
찬웅은 거대한 마탑 앞에 홀로 서 있었다.
딸기는 이미 로그아웃했고,
자신도 로그아웃할 생각이지만 그전에 처리할 건 처리하고.
‘오는구나.’
잔뜩 굽은 허리로 지팡이를 짚으며 나타난 마탑주 브랜카인, 그 뒤를 따르는 마법사들.
“허허허, 신의 의지를 행하는 이방인이여. 어떤가? 그대의 일은 순조로웠소?”
“덕분에.”
“하하, 그럼 전에 끝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해도 되겠군.”
“뭘···.”
“부유석 말이오.”
“아!”
브랜카인이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대에게 줄 선물이 있소이다.”
“선물이라니?”
“그렇소. 우리의 진심이 담겼소. 부유석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브랜카인이 눈짓하자 마법사 한 명이 구슬 두 개를 화려한 접시에 담아 가지고 왔다.
“이건?”
“우리가 그대에게 줄 게 뭐가 있겠소? 스킬 구슬이지.”
“아하.”
찬웅은 접시에 담긴 구슬을 모두 집었다.
[스킬 구슬 : 퓨리 오브 라이트닝(8서클)]
[스킬 구슬 : 앱솔루트 배리어(8서클)]
“오! 8서클 스킬.”
“우리의 역량을 총집합해서 만든 마법 스킬 구슬이오. 테라퓨타의 친구를 위한 선물이니 부디 사양치 말고···,”
“이것과 부유석을 바꾸자?”
“천만에! 이건 어디까지나 선물이오.”
브랜카인의 미소는 부드러웠다.
“지금 먹어도 되나요?”
“당연하지. 이제 그대의 것이요.”
찬웅은 조금 주저하다 구슬을 입으로 가져갔다.
브랜카인의 속으로 환호했다.
먹는다.
놈이 구슬을 먹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 안 돼요.”
브랜달이었다.
구슬을 먹으려는 찬웅을 막고 나서는 꼬맹이 마법사.
‘음?’
찬웅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브랜달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그, 그게···,”
“그러니까 이유를 말해봐.”
“아무튼 그거 먹지 마세요.”
“흠.”
전부터 느꼈지만 괜찮은 놈이다.
하지만 마탑주를 비롯한 다른 마법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보다.
악귀 같은 눈빛으로 브랜달을 매섭게 노려보는 그들.
찬웅이 없었으면 그대로 찢어 죽였을 그들의 표정.
“그래, 안 먹을게. 넌 착한 마법사였구나.”
“···아, 설마?”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니?”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찬웅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브랜카인! 마법사의 명예를 걸고 대답해라. 이게 진짜 스킬 구슬이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소?”
“웃기는군. 마탑주가 명예도 모르는 마법사였을 줄이야.”
찬웅의 말에 안색이 일변하는 브랜카인.
“···알고 있었나?”
“내가 그렇게 멍청한 사람으로 보였어?”
“허어, 철딱서니 없는 어린놈 때문에 대계를 망쳤어.”
마침내 브랜카인은 본색을 드러냈다.
“이렇게 된 이상 모조리 죽여주마. 너도, 저 멍청한 어린놈도.”
“부유석은 포기하는 건가?”
“마법사를 우습게 보지 마라. 이방인들이 죽을 때 간혹 물건도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모를 거라 생각했나? 오늘 이후로 든 테라퓨타의 마법사들이 오직 너만 쫓을 것이다. 죽이고 또 죽여주마. 부유석을 떨어뜨릴 때까지.”
“와! 진작 그렇게 나오지 그랬어? 그럼 고민도 안 했을 텐데.”
브랜카인은 허리를 곧게 펴면서 찬웅을 노려봤다.
“허허, 8서클 대마법사가 네놈에게 하찮게 보였군.”
“그래. 하찮아. 넌 브랜달만도 못한 놈이야.”
“클클클, 허세도 작작 부리거라. 우리가 침식의 기운에 취약할 뿐이지, 네까짓 이방인 하나 어찌하지 못할까?”
“알았어, 보여줄게.”
찬웅은 인벤토리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그건 또 뭐냐?”
“이거 몰라?”
알 리가 없다.
사라진 지 500년이 훨씬 넘는 물건.
대마법사 브랜데인의 마계목 지팡이, 이 지팡이가 가지는 기술은 딱 하나.
바로 ‘제어 권한’.
찬웅은 지팡이를 바닥에 힘차게 꽂았다.
파악!
그리고.
찌이이이이잉!
거대한 마탑 표면이 아래서부터 위로, 차례차례 불이 들어와 빛나기 시작했다.
탁! 타타탁! 탁! 탁! 탁! 탁···.
난생 처음 보는 모습에 경악하는 마법사들.
“허!”
“저, 저런?”
“뭐야?”
“···이럴 수가! 왜 마탑이?”
브랜데인의 지팡이는 마탑의 모든 기능을 제어할 수 있는 마스터 키였다.
그 말인즉슨,
마탑의 주인은 바로 케이라는 의미.
“안티 매직 필드!”
마탑 꼭대기에서 찬란한 빛이 솟아올라 테라퓨타 전체를 뒤덮었다.
8서클 마법사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궁극의 9서클 마법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