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식의 세례 >
민도연은 이미 깨어났지만 계속 기절을 연기하고 있었다.
배우로서 이 정도 연기쯤이야 너무 쉽지.
그런데,
‘저 남자는 누구지?’
혹시 한편일까?
대화를 들어보니 각성 플레이어에 대한 말 같은데.
물론 들어봤다.
SNS와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떠도는 소문.
게임을 하다 보면 아바타의 힘이 현실에서도 생겨난다는 것. 이미 진(眞) 아이템도 출현했으니 근거도 충분하고.
아니, 민도연의 경우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당사자니까.
각성 플레이어 민도연.
힘을 얻고 난 후에도 사실을 숨겼다.
어차피 배우로 성공한 인생인데, 포스의 힘을 사용한다고 알려지면 좋을 게 있을까?
매니저가 의심스러운 태도로 자신을 클럽에 유인할 때도 태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성실하고 손버릇도 좋지 않아서 자르려고 했는데, 이렇게 스스로 자폭해주니 심지어 고마울 정도.
이홍종의 소문도 많이 들었다.
그래봤자 재벌 3세 망나니지.
적당히 어울려 주다 안 되면 살짝 각성의 힘을 써서 빠져나오면 그만.
그러나 이홍종을 만나 놈의 눈빛을 접한 순간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이유도 없이 무서웠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사자를 마주한 토끼가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
그뿐만이 아니다.
놈이 매니저를 죽일 때 샴페인 병에 어린 포스의 기운, 자신보다 훨씬 강했다.
어쩔 수 없이 일부러 기절했다.
정면 대결로는 턱도 없고, 놈의 방심을 유도해 틈을 노려 뛰쳐나가려 했는데.
‘사도? 광룡 레지키쓰론? ···게임 속 데이터에 불과한 NPC를 모셔? 저 새끼 정말 미친놈이었어? 그걸 또 받아주는 의문의 남자는 또 뭐지?’
한편 이홍종 역시 고민하고 있었다.
‘사도는 아닌데···.’
사도끼리 만나면 무조건 알아본다.
부산에서 만났던 팔성파 그자처럼.
‘이거 고민되네.’
고분고분한 놈이 아니다.
왠지 위험한 느낌도 있고,
특히 놈은 자신의 눈빛을 마주하고도 너무나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다.
그분께 받은 능력 중 하나인 ‘피어’ 스킬.
일반인은 물론 각성 플레이어도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근원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이 스킬을 이겨내다니.
‘위험해. ···죽여버릴까?’
놈은 평범한 각성 플레이어.
자신은 레지키쓰론님의 브레스 세례를 받은 특별한 각성 플레이어.
놈이 비록 피어를 이겨내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스킬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내리신 지엄하신 명령.
- 세력을 키워라. 너희 사도들이 능히 국가 하나를 집어삼킬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절대 드러내지 마라. -
이놈이 그분의 세례를 받게 되면 제법 쓸만한 사도가 될 터.
그래서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로 했다.
“한 번 더 내 앞에서 군주님을 광룡이라 부르면 바로 이 자리에서 널 갈기갈기 찢어준다. 이 새끼야!”
“···.”
군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광룡은 미친 또라이, 덜떨어진 도마뱀, 비만 녹색 돼지 새끼라는 말이 바로 혀끝까지 밀려 나왔지만 찬웅은 가까스로 참았다.
어쨌거나 대화는 이어나가야 하니.
“알았어. 조심하지. 근데 사도라는 건 무슨 뜻이야? 각성 플레이어를 다른 말로 부르는 건가?”
“뭐야? 관심 있어? 그것부터 말해봐.”
“관심 있으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하아, 따박따박 말대답은···.”
이홍종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나오면 죽이면 되고.
“군주님의 사도가 되려면 먼저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야 해.”
“어떻게?”
“세례를 받아야지. 아무 때나 기회가 오는 건 아니야. 과거 로그드라실 이벤트 때 그분께서 대규모 광역 세례를 내리신 바 있었어. 넌 거기 없었냐?”
광역 세례?
“아! 브레쓰, 나도 맞아서 죽었지. ···근데 별거 없던데?”
“낄낄낄, 각성의 기회도 불공평하듯 세례를 받을 자격도 그런 거야. 새끼야, 아무나 되겠냐? ”
말끝마다 새끼, 새끼, 그냥 여기서 죽일까?
참자. 조금만 더 참자.
“군주의 사도가 되면 뭐가 좋아? 특별한 이득이라고 있으면 모르지만.”
“욕심 있어 좋네. 그래. 자, 봐라!”
이홍종은 웃통을 벗었다.
훤히 드러난 맨살.
그런데?
“그건···.”
“이게 바로 그분께서 내리신 이적이다!”
놈의 맨살에 보이는 뱀의 피부, 군데군데 돋아나 있는 용의 비늘.
“스킬 중에 [단단한 피부]는 알고 있지? 이건 차원이 다른 거야. 용의 신체는 총알도 뚫지 못해. 쉴드? 그딴 거 조금도 필요 없어.”
“···좋네. 조금 징그럽지만.”
“너 그러다 진짜 죽는다.”
“아! 미안!”
종합해보자.
침식지 보스 광룡 레지키쓰론이 세례, 아니 브레쓰로 게임 속 아바타를 죽이면 일정 확률로 용의 힘을 받은 특이한 각성자가 된다는 말.
로그드라실 방어전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다.
‘세계수는 내버려두고 유독 플레이어들에게만 브레쓰를 퍼부어 댄 이유를 알겠어.’
결국 침식의 기운을 퍼뜨리려 했던 건가?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모신다, 라는 말로 미루어 레지키쓰론에게 종속당한 플레이어가 되는 것.
군주라는 말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고.
“세례는 어떤 식으로 받지? 또 웨이브를 기다려야 해?”
“아니, 나랑 함께 그분의 레어를 방문하면 끝나. 군주님께서 친히 세례를 내려주실 거야.”
놈은 종속된 플레이어들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그 장소가 게임이라면 상관없지만 현실이라는 것이 문제, 이놈들로 인해 현실에서 침식의 기운이 퍼져나간다면···.
‘침식의 저주가 현실에서 퍼져나갈 수도···.’
게임 속 모든 것이 현실로 대입되고 있었다.
이미 진(眞) 아이템과 각성으로 증명됐고.
막아야 한다.
“너 말고 다른 사도들은?”
“많아.”
“어디에?”
“나도 모르지. 만나면 서로 알아볼 수는 있지만···,”
“한국에도 너 말고 다른 사도들이 있어?”
“그거야 다른 군주의 사도까지 합하면···, 하아, 내가 왜 이런 말까지, 이제 결정해. 나랑 게임에 접속해서 세례를 받을 건지, 아니면 여기서 죽을 건지.”
“지금?”
“그래, 당장!”
아쉽다.
생각 같아선 함께 레지키쓰론의 레어로 가보고 싶지만, 접속 제한도 걸려있고, 또 가본다고 해도 특별하게 더 나올 건 없을 것 같으니···.
“근데 이 사람은 왜 죽였어?”
“아! 매니저 새끼? 넌 벌레 죽일 때도 거창한 이유가 있어 죽이냐? 기분 나쁘니까 죽이는 거지.”
그래, 이걸로 놈이 운명은 결정됐다.
“시신은?”
“알아서 처리할 사람 있어.”
“너도 알아서 처리돼?”
“···응?”
“네 시체도 처리해줄 사람이 있냐고?”
“크크크, 이 새끼 봐라?”
츠핏!
세로로 좁혀지는 놈의 눈동자.
“감히 군주의 세례도 받지 못한 쓰레기 주제에.”
“도마뱀 따위가 군주는 무슨.”
“···이 건방진 벌레 놈이!”
스우웅!
휘릿!
“뒈져!”
놈이 손날을 세워 찬웅의 목젖을 찔러왔다.
그러나.
‘쉽군.’
다 보인다.
놈의 동작, 그리고 약점.
사실 약점이라고 할 것도 없다.
약점 포착 스킬로 보이는 놈의 몸, 전체가 빨간색 약점으로 표시된다.
팟!
잔영을 남기며 살짝 옆으로 피한 찬웅은 놈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어어?”
동시에 딸려오는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바닥으로 쿵!
“아악!”
이홍종은 당황했다.
머리를 일으키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힘이···.’
평범한 놈이 맞나?
각성 플레이어의 힘은 예전에 경험해봤다.
게임에 접속해서 레벨업을 하다보면 가끔씩 군주께서 명을 내리신다.
주소를 알려주시면서 누구 누구를 찾아라.
거기 가보면 재능있는 용병 플레이어, 혹은 각성 플레이어가 있다.
그들을 세력으로 규합하는 임무.
간혹 반항하는 각성 플레이어가 있으면 죽도록 패거나, 그래도 듣지 않으면 걍 죽여버렸다.
물론 사고사로 위장해서.
지금까지 자신의 힘을 이긴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이놈은···.’
많이 다르다.
‘분명 목젖을 찔렀는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러다 순식간에 제압당했고.
벗어나려 부들부들, 눈에 핏발이 서도록 힘을 줬지만,
‘이익!’
이게 무슨 꼴인가.
갈기갈기 찢는다고, 죽여버린다고, 몇 번이나 소리 질렀는데,
정작 호랑이는 저놈이었고 까부는 강아지는 자신.
찬웅은 빨갛게 달아오른 놈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로그드라실 이벤트 때 말이야. 네 군주 콧잔등을 내가 도끼로 찍었거든?”
“거, 거짓말.”
“도끼가 아주 깊숙하게 쑥 박히더라고.”
“마, 말도 안 되는···,”
“레지키쓰론에게 이야기 못 들었어? 하긴, 지도 쪽팔렸겠지.”
사실 반은 맞고 반은 거짓말.
용 비늘은 뚫었지만 가죽 속까진 박히진 않았다.
그럼 이놈은 어떨까?
“최소한 일반인은 건들지 말았어야지. 그럼 살려줄 수도 있었어.”
“너, 너 반드시 죽여버린다!”
“참! 궁금한 게 있는데,”
“개, 개새끼, 이거 안 놔?”
“넌 침식지 몬스터나 마찬가지잖아. 널 죽이면 동화율이 올라가려나?”
“무, 무슨?”
“얼마나 단단한지 보자. 용의 신체가.”
찬웅은 인벤토리에서 도끼를 한 자루만 꺼냈다.
스슷!
동시에 짓눌렀던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면서,
“으아아아아아!”
악귀 같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는 일어나는 이홍종.
화아악!
침식의 기운이 섞인 포스가 놈의 전신에서 일어났다.
이홍종의 몸에 난 용의 비늘이 포스로 파랗게 빛났다.
“좆 같은 새끼야! 그깟 도끼로 군주께서 새로 주신 몸에 흠집이나 낼 수 있을 것 같아?”
“응, 자를 거야.”
“이 쉑···, 근데 그 도끼는 어디서···,”
츠피릿!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빠르지도 않았다.
그냥 그었다.
하지만 도끼날에 저절로 붙어오는 놈의 목.
서거거거거거걱!
툭!
“속죄하란 말은 하지 않을게. ···하지도 않을 거잖아.”
목이 떨어져도 기세를 잃지 않고 룸 한구석으로 달려가더니 벽에 처박고 쓰러지는 놈의 신체.
다다다닥, 쾅!
“···동화율은 안 오르네.”
그런데 용의 신체가 헛소리는 아닌 것 같다.
확실히 목을 벨 때 저항감이 느껴졌다.
두꺼운 금속을 자르는 느낌.
일단 놈은 죽였고.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다.
“저기요?”
“···.”
“기절한 척하지 말고 일어나요.”
“···.”
“각성한 거 다 아니까.”
움찔, 반응을 보이는 여자.
“전 일반인은 절대 건들지 않지만 각성 플레이어의 경우엔 좀 달라요. 조금 거칠어질 수 있습니다.”
“···.”
“할 수 없네요. 강제로···,”
벌떡!
“사, 살려주세요! 여기서 본건 비밀로 할게요. 그러니 제, 제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정하는 여자.
“···하아, 누가 죽인댔어요?”
“네?”
“나 아무나 막 죽이고 다니는 사람 아닙니다.”
“···.”
믿지 못하겠다는 여자의 눈빛.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보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찬웅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선택이 두 가지 있습니다. 여기서 도망치던가, 아니면 경찰이 올 때까지 계속 있던가.”
“아!”
정말 안 죽이나?
아무튼 살길이 열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민도연은 고민했다.
‘어차피 이홍종은 죽었어.’
그러나 이 사람은 재벌가의 사람, 도망친들 자신이 여기 있었다는 걸 모를까?
도망치면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여, 여기 있을게요.”
“좋습니다. 그럼 이 상황에도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또요?”
“한국에는 각성 플레이어들이 소속되는 단체가 있습니다. APS, 각성 플레이어 전담반이라고. 그쪽과 접촉해서 자신이 각성자라는 걸 밝히고 보호를 받던가, 아니면 숨기고 살아가던가.”
“어···,”
APS?
그런 단체도 있었어?
그러나 민도연으로선 당장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
“여기 명함이나 받아둬요. APS 팀장 전화번호니까 생각 있으면 연락하고.”
“전화해서 누구에게 받았다고 하죠?”
“케이,”
“네?”
“케이라고 하면 알 겁니다.”
찬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왜요?”
“여기 모, 목 잘린 시, 시체가 누군지 아세요?”
“누군데요?”
“HTS 건설사 대표 이홍종, HTS 그룹 재벌 3세.”
“아하,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지.”
“···아, 아니에요. 그리고,”
민도연의 용건도 더 있다.
“제가 본 걸 숨겨야 하나요? 아니면 모두 다···.”
“말해도 됩니다.”
“저, 정말요?”
“다 말하세요. 그게 더 안전할 것 같고,”
“으음,”
다행이다.
왜 케이라는 남자가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는지 잘 모르겠지만.
‘얼굴도 다 찍혔을 텐데.’
근데 이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 모르나?
“···혹시 저 모르세요?”
“글쎄요. 알아야 하나요?”
“그건 아니지만.”
살짝 자존심이 상한 민도연.
그동안 찍은 영화며 드라마, CF, TV만 틀어도 얼굴이 나올 텐데.
“참!”
나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선 남자.
민도연은 속으로 배시시 웃었다.
그렇지, 모를 리 없지. 그래도 스타 배우인데,
하지만.
“여기 계속 있으려면 정신을 잃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
“사람이 둘이나 죽었는데 멀쩡하게 있는 것도 그렇고,”
“그건 제가 연기를···,”
“도와드리죠.”
“네?”
“슬립!”
픽!
하고 쓰러지는 민도연.
찬웅은 스마트폰을 꺼내 최기병의 번호를 눌렀다.
“여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흐음, 자세한 건 피해자분에게 들으면 되겠네요. 네네, 경찰 먼저 부르세요.”
조금 있다가 경찰 오는 거 확인하고 가야지.
CCTV?
문제없다.
진짜 얼굴도 아닌데.
찬웅은 쓰러진 이홍종의 품속을 뒤졌다.
그러자 스마트폰이 두 개나 나왔다.
‘이거 복제할 수 있어?’
[답변해드리겠습니다. 가능합니다.]
‘복제해서 저장해 둬.’
[스마트폰 복제를 시작합니다.]
이걸로 찾아봐야지.
침식의 기운을 가진 놈들과 교류가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