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신분(2) >
이필동은 찬웅이 한 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지금 옥상에 올라가시겠다고요?”
“네. 저 위에 누군가 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확인해봐야죠.”
“치유 물약과 관계가 있을까요?”
“아마도, 근데 마침 잘됐네요.”
찬웅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필동.
“···뭐가 잘됐습니까?”
“모습을 드러낼 기회 말입니다. 의외로 빨리 찾아왔어요.”
“음? 계속 신분을 감추실 생각 아니었나요?”
“그래야죠.”
“그런데 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케이가 아니라 강찬웅입니다.”
“아!”
이필동은 찬웅이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데뷔전을 준비하시는군요.”
“네. 되도록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 제 전문입니다.”
※ ※ ※
중국은 인구수에 비례해 플레이어 숫자도 많다.
현재 확보 중인 진(眞) 아이템의 양도 상당히 많은 편, 마정석에, 각종 물약이나 비약, 영약, 그리고 장비 아이템.
하지만 유독 치유 물약은 한 병도 없다.
중국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만큼 귀한 아이템.
그런데 바로 옆 나라 한국에서 진 치유 물약을 확보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나.
무조건 가져와야지.
희한하게도 미국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한국은 미국의 우방, 한국의 바이오산업도 미국 못지않고, 그래서 나중에 연구 결과를 공유하자고 하면 무조건 들어줄 거라 판단한 모양.
하지만 중국은?
턱도 없다.
최근 한중관계는 거의 원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그럼 그냥 가져와야지.
중국의 기술 발전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전통적인 산업은 물론, 전자, 반도체, 자동차, 드론, 태양광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거대한 자본이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는 분야가 바로 바이오산업.
오죽하면 중국산 백신은 물백신이라고 소문이 났을까.
그러나 오늘을 기점으로 중국의 바이오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아바타 명 [대국16호], 현실에선 중화각성용사 중 한 명인 첸카이는 준비 상황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저우신, 강하 로프는?”
“단단하게 고정했습니다.”
“천웨이, 한국 측 각성 플레이어 위치 파악했지?”
“네, 바로 제압 가능합니다.”
“량량, 연막탄과 마취 가스는?”
“준비 완룝니다.”
역시 순조롭다.
“긴장하고! 지시 떨어지면 바로 실행한다.”
작전은 별거 없다.
입찰이 끝나고 치유 물약이 건네지는 순간을 노린다.
강하 로프 타고 쭉 내려가 컨벤션 홀의 창문을 깨고 연막탄과 최루가스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물약을 가져오면 그만.
이 작전에 동원된 중화각성용사만 모두 6명.
실패?
뭐지? 먹는 건가?
시간이 다 되어간다.
중화각성용사들이 각자 로프 하나씩 잡고 옥상 난간으로 다가갔다.
“자, 모두 준비해. 빠르게 치고 들어간···.”
그때였다.
타다다다닥!
저 밑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불쑥!
옥상으로 솟구치듯 올라온 한 명의 남자.
“헉!”
“어어···?”
“으힉?”
“까, 깜짝이야!”
찬웅은 옥상 난간에 서서 정체불명의 각성 플레이어들과 마주했다.
“너희들 뭐야? 국적은? 일본? 중국?”
첸카이는 기가 막혔다.
놈이 각성 플레이어라는 건 알겠다.
저 밑에서 바람처럼 옥상까지 뛰어 올라왔으니까.
“···혼자니?”
“어, 솔로야. 아! 말투가 연변 출신이구나. 중국?”
“···,”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한국에서 하는 작전인지라 한국말 아는 플레이어만 골라 데리고 왔다.
첸카이 자신도 동북 삼성 조선족 출신.
“너 뭘 믿고 까부니?”
“나 믿고. 쉽게 가자. 무기 버리고 모두 엎드려.”
중국 각성 플레이어들은 저 웃기지도 않은 말에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터져 나오는 웃음.
“하하하,”
“낄낄낄,”
“어이가 없네?”
첸카이도 마찬가지.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그냥 멍청한 놈이었다.
간혹가다 이런 놈들이 있다.
갓 각성해서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얻고 난 뒤, 세상이 제 것인 것처럼 겁 없이 날뛰는 하룻강아지.
하긴 자신도 처음 각성하고 그랬던 적이 있으니까.
“량량, 넌 여기 남아 저놈 처리하고 합류해.”
“네!”
“나머진 지금 즉시 작전 수행한다. 로프 잡아!”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
빠르게 임무 완수하고 빠진다.
“모두 내려···,”
퍼억!
“응?”
첸카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태클로 돌진한 한국 각성 플레이어와 옥상 바닥을 뒹굴며 추하게 드잡이질하는 량량,
“저 멍청한 놈이.”
중국 각성 플레이어 조직엔 계급이 있다.
그 기준은 반영률, 동화율이야 열심히 렙업하면 올라가지만 반영률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친 않지만 재능 이상의 뭔가가 필요한 것.
량량은 동화률은 높지만 반영률은 매우 낮다.
그래서 계급도 저 밑 다섯 번째, 5계급.
하지만 그도 실력있는 각성 플레이어, 그런데 꼴사납게 태클을 허용해?
퍼억!
데굴데굴.
“켁!”
찬웅은 쓰러진 량량의 얼굴에 주먹을 연신 꽂아 넣었다.
그러자 축 늘어지는 량량.
“어디 가려고? 내려가면 로프 끊어버린다?”
첸카이는 큰 승리라도 거둔 것마냥 일어서서 으스대는 찬웅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작전이 다소 늦어지게 생겼다.
그러나 등 뒤에 칼을 두고도 무리하게 행동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
“저우신, 놈을 죽여라. 빨리.”
4계급 저우신이 짤막한 쇠몽둥이를 허리춤에서 빼 들었다.
최근에 생산에 성공한 진(眞) 아이템의 래플리카, 즉 모조품.
레어 등급 [홀리 메이스]를 본떠 만들었다.
반면 찬웅은 한숨을 쉬었다.
저놈은 조금 힘든데···.
‘후우, 쉽지 않겠어.’
어렵게 싸워야 한다.
최소한 이필동이 지원군을 데리고 올 때까진 버텨내야 한다.
오늘 이 싸움은 한국의 각성 플레이어 강찬웅의 데뷔전.
암살자 케이가 아니라.
자신의 무기나 스킬을 본 사람은 모두 죽었다.
아니면 APS 소속이거나.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정체를 감춘 암살자.
하지만 들켰다.
박동구를 살려 둔 것, 처음 잘못 꿴 단추가 원인.
이왕 밝혀진 거, 끝까지 우기려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
현실에서 암살자 케이를 목격한 사람은 최기병, 이필동, 그리고 APS 소속 각성 플레이어들.
폴리모프가 완벽할까?
목소리는 변조할 수 있다고 쳐도, 체형은? 특징적인 행동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필동과 최기병이 그 조력자가 될 터.
낮에는 강찬웅, 밤에는 암살자.
이중 신분으로.
그래서 무기도 꺼내지 않았다.
야행복과 폴리모프 복면, 장갑, 허리띠, 모두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완전한 맨몸.
‘스킬도 자제하고.’
오로지 포스의 힘만으로.
“죽여!”
첸카이의 지시에 매섭게 달려드는 중화각성용사 저우신.
포스가 푸르스름하게 어린 메이스의 공격이 찬웅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조금만 버티자.
머리만 안 맞으면 된다.
퍼억!
“크윽,”
등짝에 작열한 메이스.
찬웅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놈의 허리를 잡아 꽉 껴안고,
“으아아아아!”
그대로 레슬링 수플렉스.
콰당!
“이런!”
“저우신, 뭐하는 거야?”
“이, 이놈이···.”
“신경쓰지마! 너무 늦었어. 우린 바로 돌입한다.”
찬웅은 놈을 잡고 끈질기게 뒹굴었다.
퍼억!
얼굴과 목, 옆구리를 향해 날아드는 메이스와 주먹.
맞으면서도 소리쳤다.
“큭! 이 새끼들아! 어디가? 로프 끊어버린다니까! 흐흐흐.”
“저 싸스개 같은 새끼가!”
그리고 바로 그때!
따르르르르르릉!
호텔, 그리고 옥상 전체에 귀를 찢을듯한 화재 경보음이 울렸다.
“제기랄!”
막 로프 강하를 시도하려던 첸카이는 분노했다.
화재 경보기가 작동했다는 건 이미 계획이 탄로 났다는 의미.
이렇게 발목을 잡히다니.
다 저놈 때문이다.
한 마리의 하룻강아지가 대계를 망쳤다.
“너 이름이 뭐냐?”
“헉헉, 알려주겠냐?”
“어차피 알게 될 거다. 기다려! 내가 찾아가마.”
쾅!
옥상 문이 터지듯 열리고,
우르르르,
총을 들고 돌입해오는 특공대.
“모두 철수!”
“저, 저우신과 량량은 어떡합니까?”
“그냥 둬, 병신 같은 새끼들.”
휘릿! 휘리릿!
옥상을 빠져나가는 중국의 플레이어들.
‘갔구나.’
그 와중에도 자신의 손길을 벗어나려는 놈의 허리를 꼭 부여잡았다.
‘너무 많이 맞았나?’
온몸이 아프다.
※ ※ ※
최기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진짜 케이라고요?”
“쉿! 강찬웅입니다. 그 사람 이름은!”
“네네, 그렇죠.”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해요. 지금은 세 사람만 압니다. 최팀장님, 저, 그리고 여기 구종수 경위.”
“아! 그럼 이 형사님을 데리고 온 이유가.”
“네, 비밀 유지 때문에, 국정원엔 데리고 갈 수 없어서···, APS에서 영입하시죠.”
영입이야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 무시무시한 케이가 원래 하반신 마비의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명심하세요. 그분 이름, 강찬웅입니다.”
“네, 그래야죠. 빨리 갑시다.”
따르르르르르릉!
여전히 시끄럽게 울리는 화재 경보기.
이미 컨벤션홀의 인원들은 경찰이 보호해서 모두 피신시켰다.
나머지 병력들은 모조리 옥상으로 돌입하는 중.
레이저 조준경이 장착된 개인 화기로 무장한 특공대가 옥상 문을 열어젖혔다.
최기병과 이필동, 그리고 몇몇 사람들도 뒤를 따랐다.
“꼼짝마!”
“움직이면 쏜다.”
“강찬웅씨!!!”
하지만 그들이 목격한 건 이미 옥상을 빠져나가는 각성 플레이어 4명과 옥상 위에서 쓰러져있는 2명, 그리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는 한 사람이었다.
찬웅은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자신의 몸에 점점이 찍히는 레이저 조준 불빛,
저 뒤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강찬웅씨,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아이고, 팀에 합류하자마자 이 고생을 시키다니, 제가 면목이 없네요. 고생하셨어요.”
심하게 호들갑을 떠는 이필동.
“참! 인사 나누시죠. 이분이 APS 팀장 최기병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찬웅입니다.”
“···네, 저도 ···처음 뵙네요.”
“자자, 신입 강찬웅씨, 많이 다친 거 같으니 일단 병원으로 갑시다. 구급차 불러.”
찬웅은 이필동의 부축을 받아 옥상 위에서 내려왔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도, 국정원 요원들도, 정부에서 파견 나온 공무원, 그리고 APS 소속 각성자들도.
“강찬웅씨! 조금만 참으세요. 구급차 바로 올 겁니다. 어! 당신들 뭐해요. 우리 강찬웅씨 공격한 놈들 쫓아야지.”
이필동의 호들갑은 계속됐다.
구급차를 타는 순간에도 말이다.
※ ※ ※
첸카이와 일행은 미리 준비된 탈출로를 통해 이동하는 중.
실패했지만 보고는 해야 한다.
“죄송합니다. 실패했습니다.”
- ···원인은?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방해하는 바람에.”
- 강찬웅이라는 놈 말이지?
“네?”
- 우리 계획을 방해한 놈, 그놈이 강찬웅이야. 지금은 구급차에 실려갔고.
“아!”
- 웃기는군. 고작 갓 각성한 놈에게 발목을 잡혀?
“죄, 죄송합니다.”
- 아무튼 돌아올 생각하지 마. 치유 물약을 확보하기 전까진, 지원 병력도 보내주지.
“···알겠습니다.”
첸카이의 생각도 마찬가지.
반드시 치유 물약을 가지고 간다.
구겨진 자존심도 회복하고.
‘이대로는 절대 못 돌아가.’
그나저나 강찬웅이라.
놈의 이름이다.
병원에 실려 갔다고 하니 어디인지 알아내서 반드시 죽인다.
중화각성용사들이 머무는 안가는 대림동.
그러나 대림동에 바로 갈 수 없다.
한국은 CCTV의 천국, 백제 호텔 옥상에서 자신들이 탈출한 모습도 찍혔을 테고, 그래서 되도록 빙 돌아서 가야 한다.
중국 각성 플레이어들은 탈출로 중간에 주차된 승합차에 올라탔다.
미리 준비해둔 자동차.
“일단 관악산으로 간다.”
산에는 CCTV가 많지 않으니까.
승합차는 대로가 아닌 골목길을 이리저리 꺾어가며 움직였다.
가다가 차를 버리고 관악산을 우회해 대림동으로 가면 끝.
‘가서 한잔해야겠군.’
분통이 터진다.
놈이 자신만큼 강한 플레이어였다면 수긍이라도 갈 텐데.
스킬도 익히지 못해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놈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이 사단이 났다.
지금은 패잔병 신세.
그러나 결국은 순리대로 될 것이다.
“제가 놈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죽이고 오겠습니다.”
“아니, 놈은 내가 죽인다. 너희들은 끼어들지 마.”
“···네.”
그때였다.
츠피릿!
콰직!
“어?”
승합차 운전석 유리창을 파고들어 온 자그마한 물건 하나.
“컥!”
자그마한 도끼였다.
캠핑에서나 쓸법한 작은 도끼가 운전 중인 각성 플레이어 류쉰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무, 무슨?”
끼이이익!
쾅!
승합차는 그대로 벽을 들이박고 멈췄다.
동시에,
휘리릭!
류쉰의 가슴에 박혔던 도끼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다시 뽑혀 날아갔다.
“이, 이런···,”
그리고 첸카이는 목격했다.
골목길 저편에서 검정색 후드를 뒤집어쓴 상태로 승합차 앞을 막고 선 남자의 모습을.
그의 양손엔 앙증맞은 쌍도끼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