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신분(1) >
찬웅이 한창 뉴팩토리에서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을 무렵.
서울 남부 구치소.
재판이 코앞으로 다가온 박동구는 착잡한 심정.
최소 3년에서 5년.
담당 검사가 집행유예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실형이 떨어지면 교도소로 이감될 테고, 32살 젊은 나이, 박동구의 인생은 캄캄하기만 했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다.
‘강찬웅, 빌어먹을 장애인 새끼.’
곱게 잡혔으면 말을 안 한다.
거의 죽을 정도로 얻어맞고 결국은 구속되어 미결수로 재판을 기다리는 신세.
출소하면 반드시 복수한다.
‘그놈에게 어떻게 당했지?’
집에 들어간 건 기억하는데, 한출이와 함께 놈을 제압하고 몇 대 때린 것도 생생한데, 그 이후론 지우개로 지웠는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지금도 생각이 나지 않고.
무료하기만 한 구치소 생활.
아침 점호, 밥 먹고, 운동하고, 점심 먹고, 씻고, 또 밥 먹고···, 지금은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는 중.
현재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월스트리트 클럽 살인사건.
‘쯧쯧, 저 미친놈이.’
무려 117명을 죽였단다.
저런 놈에 비하면 자신은 거의 천사.
신종 마약을 흡입하고 그렇게 했다던데, 그게 가능하나?
구치소에 같이 수감되어 있는 미결수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에이, 무슨 마약 조금 빨아서 헐크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 안 되지. 무기도 없이 말이야.”
“칼을 들어도 그래, 사람 몇 번 찌르다 보면 지방, 기름기 때문에 날이 잘 안 들어.”
“그니까! 맨손으론 사람을 몇이나 죽이겠어! 총이면 몰라도.”
자세한 영상은 보여주지 않았다.
현장 사진과 사건의 개요만 알려줄 뿐, 허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게 잔인했다.
무슨 짓을 저질러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젊은 20대 미결수 한 명이 TV를 보다 말했다.
“사실, 저 사건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뭘?”
“방금 전에 친구 놈이 면회 왔을 때 들은 얘긴데···,”
귀를 쫑긋하며 호기심을 보이는 박동구.
나머지 사람들도 우르르 모여들었다.
숨겨진 얘기라니.
“그, 게임 있잖습니까. 가상현실.”
“듀플렉스 스페이스?”
“네, 그 게임에서 용병 플레이어 직업을 선택하고 플레이 하다보면 아주 희박하게 포스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소문이 있대요.”
“야! 원래 용병 플레이어는 포스가 능력이야. 말 같잖은 소릴 하고 있어?”
“에이, 게임 안이 아니라 현실에서요. 포스를 각성해서 인간 같지 않은 힘을 낸다고.”
“···현실에서 포스를 사용한단 말?”
“네, 저 월스트리트 사건도 그 현실 포스 플레이어가 일으킨 사건이랍니다. 지금 우리만 안에 있어 모르지, 바깥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던데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에 모두 코웃음 치는 사람들,
“이 새끼가 깜방에 갇혀있다고 사람 무시해? 차라리 신종 마약이 더 신빙성 있겠다.”
“너 사기로 들어왔냐? 그 게임 못해본 사람 여기 한 명도 없어.”
“에이, 난 또 뭐라고.”
하지만 박동구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특히 인간 같지 않은 힘, 듀플렉스 스페이스, 게임을 하려면 캡슐이 필요하고,
‘그때 강찬웅, 그 새끼 집에도 캡슐이 있었어.’
갑자기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진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잊어버렸던 그때 그 상황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하아, 이거···,’
다리가 불편한 강찬웅에게 개처럼 처맞던 김한출, 질풍처럼 자신의 귀를 스치며 콘크리트 벽에 박힌 캔커피, 그리고 자신의 두개골을 부숴놓았던 플라스틱 리모콘.
기억난다.
맞다.
그랬었다.
‘씨발! 내가 피해자였구나!’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더 있다.
생각나면 연락하라던 형사의 말.
박동구는 벌떡 일어나 철창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교도관님! 교도관님! 급하게 연락할 데가 있습니다. 금천 경찰서 구종수 형사하고 통화 좀 할 수 있게 해줘요! 교도관님!”
※ ※ ※
찬웅은 여전히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
FBI 국장까지 브리핑에 나섰다.
‘신종 마약이라고?’
아마 끝까지 부인하려나 보다.
결국은 다 드러날 테지만.
워낙 큰 사건이라 수습도 불가능할 터.
‘놈은 죽으려고 한 거야.’
충분히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아직 잡지 못했을 거고.
지금도 각종 커뮤니티에서 반영률이란 단어가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었다.
반영률이란 단어가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건 한국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각성 플레이어가 여전히 있다는 증거.
물론 어디서 들은 얘길 하는 걸 수도 있고.
‘한창 바쁘겠네.’
각성 플레이어 본부인가 뭔가 하는 곳 말이다.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진(眞) 아이템은 진작 밝혀졌고, 월스트리트의 처참한 사고로 이제 평범한 사람들도 각성 플레이어의 존재 또한 알아차릴 것이다.
물론 각성 플레이어라고 모두 빌런은 아니다.
APS에 소속되어 있는 4명의 각성 플레이어도 그렇고, 그리고 신여은, 딸기도.
오히려 빌런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아니 비슷한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고작 가상현실 게임 하나가 세상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게임 할 맛도 안 난다.
‘퀘스트 해결해야 하는데···.’
잠시 보류하지 뭐.
시간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바로 그때!
딩동!
울리는 초인종.
이 밤에 누가?
인터폰을 확인해보니.
“실례합니다. 금천 경찰서 수사계 구종수 경위입니다. 저 기억나시죠?”
“···아! 네!”
당연히 기억나지.
두 번이나 만났다.
박동구 사건 때 한번, 그리고 귀신작두 박달환 탐문조사 때 두 번.
이번엔 무슨 일일까.
찬웅은 급하게 전동 휠체어 위에 앉아서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별일 없으시죠? ···전보다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무슨 일이신지.”
“하하, 가는 길에 생각나서 들렀습니다.”
순간 찬웅은 흠칫 놀랐다.
구종수와 함께 온 사람 때문에.
“아참, 이분은 함께 일하고 있는 형사입니다. 이형사, 인사드려.”
“처음 뵙겠습니다. 이동표라고 합니다. 다리가 불편하신 모양이네요.”
“네, 조금.”
이동표?
웃기는 소리.
명함까지 받았는데.
이동표는 자신을 모르겠지만 찬웅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만나봤었다.
이 얼굴이 아닌 폴리모프 상태로, 변승국의 자택에서, 와치맨 최기병과 함께.
‘이필동이었지?’
그 역시 명함에 전화번호만 딸랑 있었을 뿐, 근무지나 직책은 나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각성 플레이어와 관계된 사람은 분명하니까.
그리고 저자가 함께 왔다는 건···.
‘뭔가 알아냈어.’
자신이 케이라는 건 아직 모르고 있다.
알았다면 이필동이 아니라 최기병이 왔겠지.
실제 이름도 밝혔을 테고.
집안에 들어온 이동표, 아니 이필동은 힐끔힐끔 벽 쪽을 관찰하고 있었다.
특히 액자로 가려놓은 곳, 캔커피가 박혔던 콘크리트 벽면.
저길 왜···.
‘아!’
찬웅은 이들이 무엇을 쫓아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박동구.’
확실하다.
당시 놈은 블랙 아웃, 단기 기억 상실이라 들었는데.
‘기억해냈구나.’
박동구는 구종수에게, 구종수는 이필동에게.
각성 플레이어를 이런 식으로 찾아내는가 보다.
전에 신여은이 입원한 병원으로 찾아오는 것도 그렇고.
뭔가 수상하면 무조건 찾아온다.
‘일은 잘하네.’
실마리를 잡은 이상 끝까지 밝혀내려 할 거고,
그냥 넘어가긴 글렀다.
저들을 죽이지 않는 이상.
자, 그럼 어떻게 한다?
그 와중에도 슬그머니 액자로 손을 가져가는 이필동.
막을까?
아니다.
놔두자.
‘오래 버텼어.’
언젠가는 밝혀질 줄 알았다.
이젠 숨기지 않아도 되고.
왜?
많이 컸으니까.
국가의 압박, 또는 다른 각성 플레이어의 위협, 뭐든 다 막아낼 자신이 있으니까.
‘그래, 때가 된 거지.’
그래서 찬웅은 막지 않았다.
“어이쿠, 여기 액자 뒷면은 손상이 심하네. 무슨 자국이죠?”
“글쎄요. 무슨 자국 같아요?”
“뭐가 박혔나? 쑥 들어갔는데.”
그러면서 이필동은 오른손을 슬금슬금 가슴 부위로 가져갔다.
그 순간!
찬웅은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아!”
경악하는 두 사람.
그들도 안다.
32세 강찬웅, 하반신 마비.
그런데 일어나?
이필동은 재빠르게 권총을 꺼내 들었다. 구종수 경위도.
“꼬,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허튼짓하지 마. 우리 둘만 온 게 아니···.”
스팟!
바람길 산책 순간 가속,
탁탁!
이필동과 구종수의 권총을 차례대로 빼앗고,
스팟!
다시 제자리로,
그 모든 동작이 단 1초 만에 이루어졌다.
“으아···.”
“이, 이런!”
“비상! 비상! 모두 투입! 들어와!”
이필동은 혼비백산, 정신이 반쯤 나갔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온갖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던데.
너무 성급했다.
구종수의 말로는 성격이 약간 까칠한 면이 있지만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 별일 없을 거라고 했다.
그걸 믿고 온 것이 잘못, 각성 플레이어가 얼마나 위험한 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 말이다.
뼈아픈 실수다.
어떡하지?
이자가 폭주하면 인명피해가 말도 못 할 터,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특공대를 부르긴 했지만 그들도 위험하다.
“잠깐! 놀랄 필요 없어요.”
“···.”
“···.”
찬웅은 경계심을 풀어주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해치지 않을 테니까.”
“그걸 어떻게 믿어···.”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이필동에게 받은 명함을 꺼냈다.
“자! 받아요.”
“이건?”
떨리는 손으로 조심조심 명함을 받아드는 이필동, 그러더니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
분명 자신의 명함이다.
국정원 업무를 하면서 명함 돌린 적이 꽤 많았지만 이 사람에게 준 기억은 없다.
“이, 이걸 어디서?”
“변승국 자택, 거기서 최기병씨와 함께 계셨죠?”
“···허억! 서, 설마?”
그제야 이필동은 깨달았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은 오직 한 명밖에 없다.
“···케이?”
“네, 접니다.”
“세, 세상에!”
뜨악한 눈초리로 찬웅을 바라보는 이필동.
순간!
쾅!
현관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우르르르!
찬웅의 집안으로 들이닥치는 무장 특공대.
이필동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상황 해제! 상황 해제! 총 내려, 어어, 괜찮아. 모, 모두 철수! 철수하세요. 아무 일도 아닙니다.”
이로써 강찬웅의 신분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라는 게 있을 수 있나.
※ ※ ※
서울 백제호텔 컨벤션 홀.
최기병은 귀에 착용한 무선 통신 인이어를 통해 현재 상황을 점검했다.
“우현수 플레이어님, 그쪽은 어떠십니까? 우리 신입 플레이어는 잘 적응하고 있죠?”
- 문제없습니다. 춘섭이 잘하고 있습니다.
“현수님이 조금만 더 신경 써주세요.”
- 네!
고유섭 플레이어는 마태길 플레이어와 같이 작전 중이고.
봉춘섭 병장과 마태길 이병은 APS 소속으로 영입했다.
조창대에게 협박당해 마음고생 심했던 터라 처음엔 잘 설득이 되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구슬려 함께 일하게 된 것.
그들의 첫 작전이 백제호텔 경계 근무.
그동안 골머리를 썩였던 문제도 해결됐고, 현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지.
바로 진(眞) 치유 물약을 검증된 업체에 넘기는 것.
치유 물약을 기반으로 불치병과 난치병 해결을 위한 신약 개발.
성공한다면 그로써 기대할 수 있는 경제적 효과는 얼마일까?
컨벤션홀에 모인 그룹 CEO들도 서로 몇 명씩 모여 끊임없이 토의 중이었다.
입찰 선정의 기준은 돈뿐만이 아니다.
연구 설비와 고급 인력, 보안, 그리고 임상 계획 등등.
곧 입찰 시작.
이미 입찰 서류 검토는 끝냈다.
남은 건 입찰 회사 발표와 선정되지 못한 업체에게 그들이 왜 탈락했는지 납득시켜주는 것만 남았다.
나중에 뒷말이 나올 수 있으니까 투명하게 공개하는 과정
그리고 이 자리에서 치유 물약만 넘겨주면 끝.
최기병은 바짝 긴장했다.
물론 별일이야 있겠냐마는, 일본의 자위대 각성 플레이어에게 당한 경험이 있던 터라 입찰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방비해야 한다.
그런데!
지이잉,
품속에서 울리는 스마트폰.
‘이과장이네.’
무슨 일이지?
각성 플레이어 의심 제보를 받아 출동한 건 알고 있었다.
‘쯧!’
한창 바쁜 와중에.
결과는 나중에 들어도 되는데.
“무슨 일이세요.”
- 하아, 최팀장님.
“목소리가 별로네요. 길게 이야기할 거면 다음에 합시다. 지금은 바빠서···.”
- 그깟 치유 물약 입찰이 뭐가 중요합니까?
“···네? 그깟?”
- 그래요. 그깟! 아무튼 지금 세 사람 올라갑니다. 누구 한 명 밑으로 보내주세요. 들어갈 수가 없네요.
“누가 오는데요? 아시다시피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만.”
- 저하고, 경찰 한 명, 그리고···, 아! 잠깐만요. 직접 하실 이야기가 있답니다.
누가?
최기병은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이필동이 이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닌데.
-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 저 강찬···, 아니 케이입니다.
“···네?”
이게 무슨 소리?
이 사람이 왜···.
- 현재 호텔 안에 있는 각성 플레이어 숫자는 몇 명이죠?
“어···, 총 네 명요.”
- 호텔 옥상에 있나요?
“아, 아닙니다. 거긴 일반 요원들이 지키고 있어서. 우리 요원들은 컨벤션홀 안에 있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뚝! 하고 끊긴 전화.
“대체 무슨···,”
그런데 왜 옥상에?
‘혹시.’
이런 상황이 예전에도 있었다.
마포대교에서 그와 만났을 때 각성 플레이어가 몇 명이냐고 물었고, 두 명뿐이라 대답하자 어디선가에서 한 명을 잡아 왔었다.
최기병은 황급하게 옥상 경비팀에 무전을 날렸다.
“옥상 경비팀! 나와! 옥상!”
응답이 없다.
그렇다는 건···.
“이런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