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데우스칩의 의뢰(1)
듀플렉스 스페이스 가상현실 게임의 캐릭터, 즉 아바타는 레벨이 없다.
대신 동화율이 있다.
플레이어와 아바타 간의 합일성.
게임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을 현실만큼, 아니 현실보다 더 익숙하게 다룬다는 걸 의미하니까.
용병 플레이어의 경우, 동화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아바타는 더 많은 포스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포스가 많을수록 더 강해지고 더 빨라진다.
하지만 게임 해본 누구나 다 알겠지만 동화율이 높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
포스, 스킬, 그리고 아이템.
이 삼박자가 제대로 갖춰진 용병 플레이어가 중앙 마공학 연구소 로비에서 골렘과 대적하는 중이었다.
찬웅이 꺼내든 쌍도끼를 보자 더 얼굴이 악귀같이 변하는 데우스 칩.
“허! ···루인의 애병까지? 이놈! 반드시 해명해야 할 거다! 아니면 넌 네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해명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어쩌라고?
찬웅은 자신을 잡으려고 달려드는 인간형 강철 골렘의 가슴을 도끼로 찍었다.
전설급 아이템, 루인의 앙증맞은 머리 따개, 재질이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모르지만 아무튼 골렘을 장작 패듯 그대로 쪼개버렸다.
빠각!!!
팟!
순간 가속으로 거리를 좁히고, 자신의 머리를 찍어누르는 골렘의 주먹을 슬쩍 피해내면서 번뜩이는 도끼날로 별빛 가르기.
빠가가가각!
금속을 긁어서 생기는 마찰음으로 귀가 따가울 지경.
전설급 NPC에게서 배운 전설급 스킬.
비열한 습격으로 원거리에 있는 골렘의 머리통을 박살내면서 다시 돌아오는 도끼,
바람길 산책, 별빛 가르기, 비열한 습격, 새로 배운 강타!
이것이 포스, 스킬, 아이템, 삼박자를 고루 갖춘 케이의 힘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투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큭!”
메탈 재질의 골렘.
물론 부수지 못할 정도의 단단함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 내리칠 때마다 반작용으로 인해 뼛속까지 충격이 전달됐다.
동시에.
“컹컹! 컹컹컹컹!”
“크르르르!”
두두두두두!
개처럼 생긴 사족 골렘 경비견이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내며 찬웅에게 쇄도했다.
콱!
놈에게 물려버린 왼쪽 팔, 이빨이 야행복의 얇은 천을 뚫지는 못했지만.
“씨발!”
미친개는 매가 약.
찬웅은 물린 팔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손으로 놈의 머리를 도끼로 으깨버렸다.
퍽퍽퍽퍽!
그 와중에도 골렘들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팟!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 강철 골렘의 주먹.
슈우우웃!
흔히 골렘이라면 그 큰 몸체와 효율적이지 못한 이족 보행 구조 때문에 둔할 거라 생각하지만 이놈들은 아니었다.
쐐애액!
빠르다.
보통 아바타보다 더 빠르고 강력했다.
하지만,
바람!
골렘의 주먹이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을 타는 것은 바람길 산책의 기본기.
찬웅은 골렘의 주먹을 옆으로 흘려냈다.
얼핏 보기에 주먹이 일으킨 바람에 밀려나는 것처럼 보였다.
스르륵.
주먹을 옆으로 피한 다음 그래도 몸을 회전해서 도끼를 가로로 콱!
마키나 공화국으로 올 걸 미리 예상한 터라 골렘의 약점 정도는 알고 왔다. 머리, 혹은 가슴팍에 있는 코어, 그것만 부수면 골렘은 가동을 중지한다.
“끼이이···,”
바로 이놈처럼!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음?’
오랜만에 동화율 돌파.
아무튼 10마리만 잡으면 된다는 거지?
퀘스트가 인도하는 방향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팟! 팟! 팟!
콰직! 콱! 투웅! 태앵!
바람길 산책에 이은 별빛 가르기, 강타, 비열한 습격.
랭커로서 포스까지 충만하니 현란한 스킬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콰앙!
그 와중에 데우스칩은 멍하니 찬웅의 움직임만 바라보고 있었다.
입은 크게 벌어졌고, 눈은 동그랗게 떠졌다.
‘어으음···,’
놈이 강해서?
천만에.
골렘 몇 마리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대륙에 널리고 널렸다.
‘착각인가?’
분명 초면인 놈이다.
그것도 이방인.
놈들이 이 세상에 나타난 건 불과 2년 조금 넘었다.
그런데 왜 익숙할까?
특히 저 몸놀림은···,
‘···루인? 루인이라고?’
그랬다.
천상 루인이다.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루인!
쌍도끼를 손에 들고 적과 용감하게 맞서며 덤벼오는 모든 것들의 머리를 따버리는 엘프 같지 않은 엘프, 루인.
‘이 무슨? 이방인에게서 루인이 느껴진다니!’
처음 놈이 루인의 도끼와 야행복을 갖추고 왔다는 걸 알았을 때 그가 떠올린 경우의 수는 두 가지, 주신의 허락으로 모조품을 받았거나, 아니면 훔쳤거나.
모조품은 확실히 아니다.
한눈에 보면 안다.
그럼 훔쳤겠지.
루인이 줬다고는 생각도 안 했다.
그 까칠한 엘프가, 자신도 벌레 보듯 하는 고고한 종족의 우두머리가, 이방인에게 자신의 애병과 야행복을 넘겨?
얼마 전 로그드라실에 웨이브가 있었던 사실은 알고 있다. 미친 드래곤 새끼가 뿜은 2번의 브레쓰로 엘프들과 루인이 큰 낭패를 당했고.
만약 그 어지러운 상황에서 이 교활한 놈이 루인의 물건을 훔쳤다면?
감히 이방인 따위가 루인의 물건을 도둑질하다니,
쌍도끼, 인비저블 수트, 그것들은 역사였다.
500년 전 엘프 루인이 대륙을 질타하면서 써 내려온 기록의 산물, 이젠 기억 속에서 잊혀진, 그래서 전설로 남은 무기와 갑옷.
그런데 저 모습은 뭔가?
저 이방인은 루인 그 자체다.
스킬도 모조품이 아니다.
저건 완벽하게 구사된 루인의 진짜 기술.
‘훔친 게 아니라면···,’
그것 말고는 없는데?
정신없이 골렘들을 쪼개는 찬웅에게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들려왔다.
- 데우스칩의 골렘 처치(완료)
‘후우, 이제 끝났네.’
그럼 다음은?
탈출로라도 열어주나?
[연계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또···.’
띠링!
- 분실한 미스릴 너트(4)
- 완료 조건 : 데우스칩의 목 베기(0/1).
- 보상 : 데우스칩의 호감도 상승.
‘뭐?’
점점 어이가 없다.
목을 베라니.
자를 수나 있을까.
에루인마저도 무섭다며 진저리치던 그 데우스칩인데.
그거야 그렇다 치고, 보상이 호감도 상승?
왜 호감도가 올라가는 거지?
“씨발, 나도 이젠 모르겠다.”
베라면 베자.
드래곤도 한 방 먹였는데.
스팟! 팟팟팟!
찬웅은 바람길 산책 순간 가속으로 데우스칩의 정면으로 짓쳐들었다.
그리고 별빛 가르기.
그 모습에 데우스칩은 확신했다.
‘···그랬군.’
명확해졌다.
루인의 재현.
저 이방인이 그녀일 리는 없으니.
‘제자였어.’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도끼가 자신의 목을 노리고 날아온다.
하지만 데우스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 까닥하면 된다.
그럼 가슴팍에 숨겨진 엔진 코어에서 드래곤의 브레쓰만큼이나 강력한 썬더 브레이커가 저놈을 새카맣게 지져버릴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루인의 무기, 루인의 스킬, 자신에게 달려드는 저 이방인의 모습에서 그녀가 겹쳐진다.
‘오랜만이야. 얼마나 보고 싶었···,’
서걱!
툭,
데구르르르르,
몸체에서 분리된 데우스칩의 머리가 중앙 마공학 연구소 로비 바닥을 굴러간다.
“어?”
이렇게 쉽게?
찬웅은 자신이 하고도 믿을 수 없었다.
순간 가속으로 골렘들을 비켜내며 바로 코앞까지 달려들어도, 포스가 짙게 어린 도끼가 별빛 가르기로 목을 노리고 날아들어도, 데우스칩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웃었던 것 같기도 했고.’
그냥 목을 들이민 수준.
참 알 수 없는 퀘스트다.
- 데우스칩의 머리 자르기(완료)
[데우스칩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죽은 놈이 무슨 수로.
띠링!
[연계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 분실한 미스릴 너트(5)
- 완료 조건 : 데우스칩과의 대화(0/1).
- 보상 : 데우스칩의 특별한 선물
호감도 상승에다 대화, 아니, 목이 잘린 사람과 무슨 대화를.
가만!
‘이거···,’
데우스칩이라면 마키나 공화국 최강의 NPC.
그를 죽였는데, 단 1%의 동화율도 돌파하지 못했다.
골렘을 처치했을 때도 오르던 동화율이···,
그럼?
‘죽지 않았어.’
찬웅은 다시 두 손으로 도끼를 꽉 쥐었다.
그때였다.
지이잉! 철커덕,
로비 바닥에 굴러가는 데우스칩의 머리가 갑자기 멈추더니 양옆에서 긴 곤충 다리 3개가 각각 튀어나왔다.
‘헉!’
그리고,
타다다다다닥!
마치 거미처럼 다리를 움직여 찬웅에게 방향을 돌리는 데우스칩의 머리.
‘저거 뭐야?’
무섭다.
이거 보고 에루인이 무섭다고 한 건가?
머리가 살아서 움직인다. 위로 치켜뜬 눈은 찬웅에게 향해있었고, 입가엔 희미한 미소까지 그려졌다.
대화고 뭐고 콱 부숴버려?
그때 찬웅을 보며 입을 여는 데우스칩의 머리.
“넌 루인의 제자로구나. 안 그런가?”
“맞긴 한데···.”
“그럼 우린 남이 아니군. 내 사랑하는 루인의 제자라니, 진작 말하지그랬나. 오해하기 전에.”
“아니, 대답할 기회도 안 주고···, 자, 잠깐!”
잘못 들었나?
“사랑이 어쨌다고요?”
사랑? 사아랑?
턱도 없는 일이다.
에루인이 얼굴을 얼마나 따지는데,
“둘이 사귀었어요?”
“···.”
“그럼 짝사랑?”
“···흠흠, 그래도 고백은 했어.”
이제야 알았다.
에루인이 그토록 데우스칩을 무서워했던 이유를.
“자네가 입은 야행복의 원래 이름이 ‘인비저블 수트’였어. 수트만 입고 튀었지, 쯧! 그냥 달라고 했으면 줬을 텐데,”
“왜 도망갔는데요?”
“···그건 알 필요 없네.”
사실 알 것 같다.
‘고백해서 혼내줬구나.’
타닥, 타다다닥!
거미 다리를 움직이며 찬웅 가까이 다가와 질문하는 데우스칩.
“루인은 잘 있나?”
“네, 스승님은 매우 잘 계시죠.”
“흐음, 마키나 공화국으로 간다고 하니 별말 없었고?”
“···안부 전해달라며.”
그러자 픽 하고 웃는 데우스칩.
“미친놈이니 접근하지 말라고 했겠지.”
“···.”
뭐라 해줄 말이 없다.
근데 미친 사람이 맞는 것 같다.
저 머리만 봐도 그랬다.
타닥타닥.
징그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우리 서로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렇군. 해야지. 대화.”
타닥타닥!
찬웅의 제안에 머리만 남은 데우스칩이 거미 다리를 요란하게 움직이며 응답했다.
※ ※ ※
한국의 경우 청와대 직속으로 기구를 만들어 각성 플레이어를 육성, 관리하고 있지만 옆 나라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일본의 각성 플레이어는 자위대 내 독립된 부대가 관리한다.
특수초인각성대.
기이하게도 이 부대는 일본 내각 정부와는 완전하게 독립된 권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누구도 터치하지 못한다.
일본 총리든, 자위대 통합막료장이든.
특수초인각성대 부대장 혼죠, 그를 제외하면 일본의 각성 플레이어가 몇 명인지 아무도 모르고.
“흐음, 내일 밤 거래를 한단 말이지?”
“네.”
“장소는?”
“그건 파악되지 않았지만 물건을 받는 사람은 알고 있답니다.”
“이 정보도 그쪽에서 흘러나온 건가?”
“그렇습니다. 미국에도 이미 흘렸지만 반응이 없자 우리 쪽으로 흘러온 것 같습니다.”
“클클클, 역시 천성이 글러 먹었어. 달리 조센징인가.”
일본 특수초인각성대 부대장 혼죠 소장은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웃기는 놈들이다.
한국군에서 흘러나온 정보.
제 나라 극비 정보를 이렇게 질질 뿌리고 다녀? 그것도 국가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하긴 그런 족속들이기에, 나라를 팔아먹고 다니지.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아마 자신을 부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특수초인각성대를 장악하면서 사실상 일본의 지배자가 된 자신을 말이다.
‘똑같이 해보겠다는 말이군.’
특수초인각성대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 내 권력을 군부가 가져보겠다는 의도.
한때 두 번씩이나 쿠데타를 일으키며 한국 정치를 쥐락펴락했던 한국 군부 아닌가. 그 옛 영광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겠지.
“한국 APS를 흔들어 달라고?”
“네, 실패를 바라고 있겠죠. 더 이상 APS가 커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흐음, APS 말고도 대안이 있다는 의미군.”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쉽게 국내 각성 플레이어를 버릴 리 없다.
“확실합니다. 한국군 내부에서도 독자적으로 각성 플레이어를 육성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아는 바 없고?”
“사실 한국군도 지극히 폐쇄적인 곳이라, 아마 모처에 캡슐을 두고 플레이어들을 육성하는 게 아닐까요?”
“예산은?”
“한국군에서 그 정도 예산 확보쯤이야 쉽지 않겠습니까?”
국방비 지출로 따지면 세계 10위에 오른 한국, 그러나 여전히 군 관련 비리와 부정부패가 일어나는 복마전.
빼돌리려면 얼마든지 빼돌리겠지.
거기에 군정보기관까지 한편이라면 정보를 통제하는 건 어렵지 않을 테고.
“곧 쿠데타가 일어나겠군.”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쿠데타겠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조용한 쿠데타.”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면 일본으로선 이익.
“전적으로 협조해줘. 준비는?”
“이미 동화율 150% 대의 자위대 각성 플레이어 5명이 출동했습니다.”
“어차피 하급 치유 물약 가져오려면 부딪혀야 하니까, APS 소속 각성자들은 죽이고 그 케이라는 놈은 죽이지 말고 일본으로 데려와.”
“네! 알겠습니다.”
현재 일본을 지배하는 권력은 내각이 아니다.
부대 내 각성 플레이어들에게 충성맹세를 받은 혼죠가 일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혼죠 소장도 동화율 162%의 각성 플레이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