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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드라실 방어전(4)
도끼의 크기는 앙증맞다.
물론 포스를 실으면 위력이 배가 되겠지만 상대는 드래곤.
약점을 노렸다.
그러나 과연 도끼날이 드래곤의 비늘을 파고들 수가 있을까? 파고든다고 해도 비늘 밑 가죽에 상처나 낼 수 있을까?
콱!
드래곤의 콧잔등에 박힌 도끼.
팅! 하는 금속음과 함께 몸 전체가 떨려왔다.
화들짝 놀라는 에루인.
“어?”
- ···.
실패인가?
때릴 수는 있어도 타격을 주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행한 이유.
첫째는 앞서 딸기와 말했던 것처럼 무기력하게 당하는 것이 싫어서, 둘째는 바로···,
“스승님! 빨리 가세요.”
“···.”
자신은 여기서 죽어도 된다.
3일 동안 접속하지 못하는 것과 동화율 하락을 제외하면 별다른 리스크가 없다.
하지만 에루인은 죽는다.
진짜로 죽는다.
“내가 맡을게요. 나 안 죽는 거 알죠? 그러니 빨리!”
“···.”
“왜 말이 없어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에루인도, 드래곤도 상당히 놀란 눈치.
대체 왜?
때리면 안 되는 건가?
바로 그때!
세계수 가지가 파르르 진동하더니, 곧 전체에서 찬란한 빛이 퍼져 나왔다.
[플레이어가 광룡 레지키쓰론에게 타격을 입혔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잠시 후 웨이브가 종료됩니다.]
‘···.’
이게 조건이었나?
그럼 한 방 더 때려?
찬웅은 다시금 도끼를 머리 위로 올렸다.
순간!
조용히 읊조리는 레지키쓰론.
- 멈춰라.
순간!
우뚝!
멈췄다.
도끼로 내려찍으려던 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
드래곤이 머리를 털자 찬웅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 바람길 산책에 별빛 가르기라, 에루인, 어째서 네 능력을 이방인이···.
“새끼야! 얘가 내 제자야. 끝내주지?”
- 하아, 이방인이 제자였다고?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아니? 나도 얘가 끝까지 살아서 네 콧등 작살 낼 줄은 몰랐어.”
- ···결국 내 실수군.
“낄낄낄, 미치광이에다 오만하며 멍청하기까지 한 놈아. 실수가 아니라 그게 네 한계야.”
- 그래, 인정한다.
스산한 목소리,
꿀꺽,
드래곤의 분노가 느껴진다.
- 모조리, 활활 태워주마.
“응, 난 죽여도 우리 제자는 못 죽이죠?”
찬웅은 그런 에루인이 답답하기만 했다.
“아니, 뭐해요? 웨이브도 끝났는데, 빨리 가요! 생뚱맞게 무슨 대화야?”
“선 넘지 마라. 스승이 제자 놔두고 도망가는 거 봤니?”
“하아, 저 안 죽는다니까요? 어서 가요!”
“그건 그거고!”
그런 찬웅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는 드래곤.
-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허상인 줄 알면서도 정을 줬단 말인가?
···뭐지?
이 새끼 뭘 알고 지껄이나?
바로 그때!
[현 시간부로 웨이브가 종료됩니다.]
“아···.”
[광룡 레지키쓰론이 강제 이동됩니다.]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하는 드래곤의 몸통.
- ···그래, 끝났구나.
레지키쓰론은 찬웅을 가만히 노려봤다.
- 언젠간 또 볼 것이다. 내가 널 기억하마.
‘기억 안 해도 되는데···.’
스팟!
순간이동이라도 했는지 눈 깜짝할 새 사라진 광룡 에지키쓰론.
동시에 하늘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화아아아악!
빛무리가 로그드라실 전체로 퍼진다.
드래곤의 브레쓰가 파괴의 기운이라면 이건 치유 그 자체.
아직 살아남은 용병들과 엘프들을 치유하면서 몬스터를 소멸시켰다.
후둑, 후두둑,
비처럼 떨어지는 드레이크들.
동시에 시끄럽게 울려대는 시스템 메시지.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동화율을 1% 돌파했습니다.]
.
.
.
※ ※ ※
웨이브는 끝이 났다.
하지만 찬웅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에루인의 침통한 표정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애써 밝은 얼굴을 하며 찬웅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에루인.
“고생했어.”
“미안해요.”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그저 재해일 뿐이야.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꽤 많은 엘프가 죽었다.
용병들도 죽었지만 그들은 3일 후면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NPC, 엘프들은···.
그렇다.
부활이 불가능한 죽음.
그리고 엘프들도 그 사실을 안다.
“가서 네 할 일을 해. 우린 파괴된 로그드라실을 수습해야 하니까.”
“도와드릴까요?”
“천만에, 우리 일은 우리가 해야지.”
“···.”
로그드라실 웨이브.
용병에겐 한낱 이벤트지만 NPC들에겐 악몽.
어떻게 위로하면 될까?
“그때 왜 도망 안 갔어요?”
“쪽팔리게 무슨 도망!”
“그깟 쪽팔림이 뭐가 중요해요? 목숨이 중요하지.”
“···내 종족이 죽어 나가는데 나 혼자 살라고?”
가슴이 찡하다.
마음이 아프다.
파티원 딸기도 죽었지만 슬픈 마음은 없다. 3일만 지나면 다시 보니까, 그저 살짝 미안할 뿐이고.
반면 엘프들은 NPC, 프로그램 데이터, 그럼에도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런 찬웅의 마음을 아는지 픽 웃어버리는 에루인.
“이봐! 이방인 제자,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엘프 종족은 멸망했을 거야. 우리가 은혜를 입은 거지. 그러니까 이방인답게 행동해.”
“어떻게 행동하면 이방인다운 건데요?”
“즐거워하라고, 저 사람들처럼. 그럼 수고해.”
살아남은 용병들은 신이 났다.
경험치로 인한 동화율 돌파에, 코인 대박에,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
그래, 그러면 된다.
열심히 싸웠으니까, 로그드라실을 지켜냈으니까, 그 X같은 드래곤에게 한 방 먹여줬으니까.
엘프들이 떠나고 홀로 남은 찬웅.
에루인을 즐거워하랬지만 그러긴 싫다.
초상집에 풍악을 울리는 꼴이지.
‘세계수나 만나볼까?’
궁금한 것도 있고.
찬웅은 여전히 빛을 발하는 세계수 앞으로 다가갔다.
가만히 손을 대보니.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아바타 케이가 반영률을 1% 돌파했습니다.]
.
.
.
‘왜 이렇게 많이 올라?’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로그드라실 공적 순위 1위에 합당한 보상으로 아바타 케이의 이름이 듀플렉스 대륙에 널리 퍼질 예정이며···.]
뭐야?
이건 아니지.
이름 알리기 싫어 딸기가 스트리머들까지 죽였다.
공적 순위 1위라 해봐야 성황의 축복과 귀족 작위.
둘 다 마음에 안 든다.
성황의 축북? 굳이 뭐하러, 상자 깔 때마다 주신의 축복이 지겹게 뜨는데.
귀족도 그렇다.
남작 케이? 백작 케이?
영지를 받으면 세금으로 코인을 받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거 관리하는 게 예삿일이 아니다.
‘공적 1위 삭제해주세요.’
[받아들일 수 없는 요청입니다.]
‘아직은 알려지기 싫다니까요?’
[이미 정해진 결과입니다.]
‘하지만 바꿀 수 있지 않습니까?’
[답변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다시 한번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주목받기 시작하면 게임을 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
잠시 침묵하는 세계수, 보조 운영자.
그러더니.
[아바타 케이의 로그드라실 공적 순위가 삭제되었습니다.]
‘네, 좋아요. 감사합니다.’
[삭제된 공적 보상의 대안으로 적절한 방안을 탐색합니다.]
[아바타 케이에게 장비 랜덤 박스(전설)를 인벤토리로 지급합니다.]
‘음?’
뭐 이런 걸 다.
만족한다.
명예보다는 실리 아닌가.
아무튼 궁금한 거나 물어보자. 대답해줄 리는 없겠지만.
‘아까 드래곤이 이상한 말을 하던데, 허상이라고?’
[답변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혹시 이 세상이 게임이라는 걸···.’
[답변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점점 단호해진 세계수의 메시지.
하지만 찬웅은 이미 드래곤의 음성을 들었다.
‘마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 세상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원래 그렇게 프로그래밍 된 건가?
‘다른 의미일 수도 있고.’
허상이란 한 단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나저나 드래곤의 의미심장한 말, 허상인 줄 알면서도 정을 준다라···.
‘그게 어때서?’
마음 가는 것이 중요하지, 그 대상이 진짜든, 가짜든 뭐가 중요할까?
원래 인간은 그런 거다. 때로는 허상을 진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꽤 많다.
실제 사람이 아니라 2D 캐릭터와 결혼하는 사람도 있는데.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럴 땐 아무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즐기자.
방어전은 끝났지만 아직 이벤트는 유지되고 있으니 랜덤 박스 확률 상승 혜택이나 누려야지.
그런데.
띠링!
[로그드라실 이벤트 결과에 대해 전체 공지합니다.]
‘전체 공지?’
[로그드라실 방어전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플레이어들의 노력으로 광룡 레지키쓰론이 패퇴했습니다.]
[이벤트에 참가한 모든 플레이어에게 3,000 D코인을 지급합니다.]
[로그드라실 웨이브 방어전에 기여를 한 플레이어 순위를 발표하겠습니다.]
드디어 순위발표.
‘···내 이름 뺐겠지?’
[공적 순위 1위 애널서커, 2위 로드오브게임, 3위 캣킬러, 4위 비슈누의 화신···.]
‘후우, 안 올라갔구나. 어디 보자, 1위는···, 애널서커?’
그런데.
[···9위 중화영웅, 10위 상큼한 딸기.]
‘어···.’
딸기가 10위?
‘흐음,’
납득이 간다.
광룡 레지키쓰론에게 한 방 먹이는데, 나름 공헌한 딸기였으니까.
‘나중에 축하라도 해줘야겠네.’
일단은 상자부터 까고,
어디 조용한 곳 없나?
찬웅은 로그드라실 으슥한 곳으로 걸어갔다.
살아남은 용병들은 죄다 상자를 까는 중.
도박에 미친 놈들이 이렇게나 많다.
하긴 자신도 다르진 않지만.
순간!
‘응?’
저 새끼도 살았구나.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만나길 바랬는데.
※ ※ ※
아바타 명 [대국혼]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드래곤의 첫 번째 브레쓰에 [중화영웅]이 죽었다. 두 번째 브레쓰엔 함께 사이좋게 죽었다.
다행히 자신은 단 한 번 사망, 그래서 부활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었다.
여기서 죽으면 큰일, 다행히 웨이브 방어전이 제때 종료되어 결국 살아남았지만···.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허망한 실패.
‘9위라니,’
참담했다.
병신 같은 [중화영웅]이 어영부영하다 브레쓰를 피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 중간에 케이라는 놈 때문에 한눈을 팔아 육성 진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이유도 있고,
후폭풍이 심각할 것이다.
이번 실패로 열심히 쌓아왔던 지위가 흔들릴 위기.
어쩌면 평소 자신을 고깝게 보던 세력에 의해 탄핵될 수도 있고.
이 위기를 탈출하려면?
성과를 내야 한다.
현재 자신의 코인 계좌에 들어있는 고위층들의 투자금 1억 코인.
이걸로 진(眞) 아이템을 뽑아간다.
그럼 기사회생.
무조건 나올 것이다.
어차피 확률 게임 아닌가. 획득 확률도 상승했고.
1년 전 이벤트 때도 그랬다.
상당한 양의 진(眞) 아이템이 그때 풀렸다.
그래서 랜덤 D박스를 구매하려고 했는데.
순간!
“야! 대국아!”
대국아?
혹시 날 부르는 소리?
대국혼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그놈이다.
아바타 케이.
저놈도 살아남았어?
“용케 살았네? 그런데 우리 서로 간에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지?”
“어···,”
케이의 손에 들린 도끼.
‘날 죽이겠다고?’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는 놈, 이유도 있고.
대국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
상자를 까서 진(眞) 아이템을 들고 가야 한다.
“진정해라. 내가 사과하···,”
“필요 없어.”
츠리릿!
도끼가 날았다.
콰직!
“아악!”
허벅다리에 정확하게 명중한 한 자루의 도끼.
“너, 너, 이 새끼···.
“대국아, 대국아, 이름의 뜻은 큰데, 속은 왜 그렇게 쫌생이야? 공적 1위가 탐났어? 그래서 경쟁자를 죽이려고? 근데 중화영웅은 9위더라.”
“다, 닥쳐!”
“남을 죽이려 했으면 너도 목숨을 걸어야지.”
천천히 다가오는 찬웅을 보며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대국혼.
“백만 코인!”
“음?”
“날 살려주면 백만 코인을 주지. 어떤가?”
돈으로 매수하시겠다?
‘백만 코인이면 큰데?’
하지만 받을 생각 없다.
꺼림칙하기도 하고.
“너네 나라도 많이 변했어. 자본주의를 그렇게 싫어하더만, 지금은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찬웅은 도끼를 들었다.
“자, 잠깐.”
“3일 후에 다시 볼 수 있으면 보고.”
“안 돼!”
“돼!”
콰직!
대국혼의 머리에 박혀 드는 도끼.
죽어가는 와중에도 떨치지 못한 미련.
‘상자 까야 하는데 1억 코인으로···,’
아바타 대국혼, 사망, 두 번째, 부활 불가.
랜덤 D박스도, 진(眞) 아이템도 물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