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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었다!
찬웅은 다시 한번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아직 일어나는 것도 온전한 하체의 힘이 아니라 상체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후들후들,
일어섰지만 오래 버티진 못했다.
털썩, 다시 휠체어에 앉은 찬웅.
‘감각이 완전하게 돌아온 건 확실해. 신경이 살아난 거야.’
하지만 여전히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문제는 근력.
찬웅은 자신의 하체로 눈을 돌렸다.
근육이 빠질 대로 빠져 젓가락 같은 두 다리, 초라하다.
이걸 다리라고 부를 수 있나?
‘목발의 도움을 받으면 걸을 수 있을지도···,’
찬웅은 그 길로 휠체어를 타고 근처에 있는 의료기기 판매점에서 목발을 구입해 집으로 왔다. 목발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크게 심호흡 한번 하면서 천천히 일어나.
“후우, 후우,”
확실히 지지가 된다. 바닥을 디딜 수가 있었다.
‘걸어볼까?’
조심조심,
목발을 앞으로 뻗어 콕, 짚고 한걸음, 콕, 또 한걸음.
목발의 힘을 빌려 어렵사리 걸음을 움직였다.
‘이거면 됐어.’
자력으로 걷기는 시간문제, 꾸준히 재활하면 완치될 터.
‘활력의 영약이 아깝긴 하네.’
팔지 않고 먹었다면 지금보단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집도 사고, 이렇게 여유로운 게임 라이프를 즐기고 있고, 회사도 그만두지 못했을 테고.
정말 꿈만 같다.
처음 진(眞) 치유 물약을 현실에서 받았을 때 느꼈던 황당함, 그러나 그것은 행운의 시작이었다.
‘인벤토리와 포스도···.’
문득 든 생각.
‘가만! ···포스?’
감각이 살아났잖아.
그것이 뜻하는 바가 뭐겠나!
‘이 멍청한 놈!’
왜 포스를 잊고 있었지?
포스도, 근력도, 그 근본 성질은 힘, 파워, 에너지.
근력을 포스의 힘으로 대체 가능할까?
확인해보면 된다.
찬웅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목발을 놓고 방출 스킬로 포스를 두 다리로 집중시켰다.
스우우웅!
동시에 느껴지는 포스의 흐름.
“아···!”
무형의 힘이 몸속 구석구석으로 스며 들어가 뼈를 받치고 가느다란 근육에 힘을 더해준다.
다리가 곧게 섰다.
꾸부정한 허리도 바르게 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걸음!
슥!
“하하,”
또 한걸음.
슥!
“씨, 씨발,”
된다.
걸어간다.
그토록 바랬던 순간이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감격의 소용돌이에서 한참을 헤맨 후.
‘목발 괜히 샀나?’
아니다. 여전히 필요하다.
포스를 다 소모하면 걸을 수 없다.
‘운동을 해야 해.’
포스의 힘을 빌려 근력을 키워야 한다.
더불어 포스를 사용해 걷는 방법도 익히고.
게임 세상에선 불가능하니 현실에서, 그럼 게임을 잠시 쉬어야지.
‘한 3일 정도만···.’
이제 인생의 일부가 된 게임.
장애가 나았다고 끊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 ※ ※
3일 후, 대륙 동부의 카쟌.
접속 제한에서 풀린 [퍼킹 리버풀]은 자신까지 포함해 총 8명의 파티를 이끌고 침식지 일대를 활보하고 있었다.
“어우, 여긴 촌구석이네. 어떻게 뉴비 한 마리 없어! 헤이, 폴! 그놈 여기 있는 거 맞아?”
“자꾸 신경 긁지 마. 찾는 중이잖아.”
“하하하, 발끈하기는, 그냥 포기하고 펍에나 가자고, 오늘 경기 있는 거 잊었어?”
“···.”
케이라는 놈에게 처참하게 당한 후, 분을 풀 수 없어 훌리건 친구들을 끌고 왔는데, 괜히 왔나 싶다.
하긴 감히 자신을 PK하고도 태연하게 카쟌에 계속 남아있을 리 없으니까. 당연히 도망쳤겠지.
“이왕 왔으니, 사냥이나 하고 갈까.”
“사냥은 무슨.”
[퍼킹 리버풀]은 몬스터 죽이는 것보다 아바타 죽이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어디 먹음직한 사냥감이 없나?
순간!
사막 언덕을 넘어오는 플레이어 한 명.
“플레이어다! 잡자.”
“···케이가 아닌데? 딸기도 아니고,”
“그냥 화풀이나 하는 거지. 흐흐흐, 내가 먼저 갈 테니···, 어?”
갑자기 우뚝 선 [퍼킹 리버풀],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
나타난 플레이어가 한 명인 줄 알았는데 언덕을 따라 넘어오는 숫자가 제법 많다.
“며, 몇 명이야?”
“하나, 둘, 셋, 넷···, 최소 20명은 되겠는데?”
“쉿! 눈 마주치지 마.”
“아, 알았어.”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20명의 플레이어가 그냥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는 [퍼킹 리버풀] 무리들,
눈 마주치지 말자.
괜히 트집 잡힐라.
뭐, 가만히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냐만.
그런데 슬쩍 훔쳐보니 낯이 익다.
갑옷에 걸친 휘장.
‘···세화 길드?’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알고 보면 다 저 자식들 때문이지.
카쟌 침식지 보스 레이드, [퍼킹 리버풀]도 참가했었다.
하지만 세화 길드의 무리한 진행으로 선인장 가시를 맞아 사망, 그로 인해 동화율이 하락하고 장비도 떨어뜨렸고,
‘씨발 새끼들,’
욕이라도 하고 싶지만 참아야지.
그때였다.
“퍼킹 리버풀?”
“···응?”
왜 내 이름을 불러?
“여기 있었네. 어디 갔나 했더니.”
“왜···?”
하지만 그들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자기들끼리,
“얘들 다 죽여?”
“8명이잖아. 한 놈만 죽이면 돼.”
“걍 다 죽이자. 서비스하는 셈 치지. 이깟 놈들 죽이는데 큰 힘 드는 것도 아니고.”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촬영 준비됐어?”
“여기, 수정구 아이템.”
죽인다고?
그 말을 듣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가는 퍼킹 리버풀의 파티원들.
도망가야지.
친구라 해도 같이 싸워줄 생각은 없다.
“튀어!”
“으아아아!”
“자, 잠깐!”
서걱!
푹! 푹! 푹! 푹!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 창, 단검, 그리고 화살.
“허억!”
“끄아악!”
“악!”
“퍼킹! 너 때문이야.”
스스스스스,
그렇게 또 한 번 [퍼킹 리버풀]과 친구들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 시각.
[믿음충성봉사]는 카쟌 시내 노점상 NPC들을 상대로 케이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무기는 도끼를 들고 있고요. 이름이···,”
“물건은 안 살 거야?”
“아! 네네, 사 드려야죠.”
코인으로 사과 몇 개를 사서 값을 치르고는,
“이름이 케이인데 최근에 본 적 있습니까?”
“그 잘생긴 청년 말하는 거구나. 이방인만 아니라면 우리 딸을 줬을 텐데,”
“보셨군요. 어디로 간지 아시는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침식지 사냥하러 갔겠지. 물건 더 안 살 거면 비켜주고,”
“···후우,”
야비한 상인 NPC 새끼들.
매번 똑같다.
물건을 사면 가르쳐줄 듯하지만 정작 모른다는 말뿐.
그런 [믿음충성봉사]에게 슬쩍 다가온 용병 플레이어, 아바타 네임은 [☆세화☆철구].
“누굴 찾으시는지···,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뇨,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퍼킹 리버풀]은 찾았습니까?”
“네, 방금 척살 했습니다. 서비스로 몇 놈 더 해드렸고요. 여기 수정구 영상을 보시면···.”
“잘하셨어요. 바로 입금해 드릴게요.”
“앞으로 3일 동안은 그놈 볼일 없을 겁니다. 혹시나 부족하시다면 3일 후에 또···,”
“괜찮습니다. 그걸로 충분해요.”
세화 길드.
보스 몬스터는 못 죽여도 아바타는 잘 죽인다.
이런 데다 써먹기 딱 좋은 집단.
그나저나,
‘후우,’
어디서 찾지?
되든 안 되든 만나서 말이라도 해봐야 하는데,
고민에 빠진 [믿음충성봉사]를 주시하는 플레이어들, 그들의 소속은 ASP, 각성 플레이어 전담반이었다.
“쟤가 김철진이지?”
“네, 정규광 회장 최측근 비서로 알고 있습니다.”
“참나, 아바타 네임 짓는 센스가···, 회장은 [성실친절정직], 따까리는 [믿음충성봉사]?”
“아무튼 별 소득이 없나 봅니다.”
“카쟌을 떠났을 가능성이 커.”
졸지에 관심의 대상이 된 케이, 찬웅이지만 정작 그는 게임에 접속하지도 않았다.
“그럼 더 이상 볼 것도 없네. 주의 인물 리스트에 등록해 두었으니까 나중에라도 만나면 접근하면 되잖아.”
“맞습니다. 그 케이라는 놈이 각성 플레이어도 아니고요.”
ASP의 주된 업무는 바로 각성 플레이어 탐색과 관리, 물론 진 아이템도 중요하긴 하나 아직 확실치 않은 일에 인력을 투입할 만큼 여유롭진 않다.
“참! 너 오늘 첫 교대 근무 있는 날이지?”
“네, 감시 근무 첫날입니다. ···혹시 박달환이 직접 보셨습니까?”
“전에, 사람은 좋아 보이더라.”
“팀장님은 조심하라던데요.”
“하긴 포스를 사용할 수 있는 놈이니까. ···근데 넌 어떻게 들어왔어? 군 특임대 출신이라며, 특채?”
“팀장님이 고향 선배입니다. 안 오려고 했지만 꿀 빠는 직장이라고 억지로 끌고 와서.”
“오, 낙하산! 그래도 능력이 있으니까 인정, 그리고 꿀 빠는 건 맞지. 맨날 게임만 하고 돈 받아 가잖아.”
※ ※ ※
밤 12시.
찬웅은 집 근처, 오피스텔과 가까운 안양천 둔치를 걷고 있었다.
목발 없이 말이다.
포스를 이용해 걷기 연습을 한 지 3일째.
한 손엔 단백질이 잔뜩 든 쉐이크, 또 한 손엔 퍽퍽한 닭가슴살.
배가 고프면 먹고, 목이 마르면 마시고, 조심조심 감각을 일깨우며 3일 동안 계속 걸었다. 그런다고 당장 근육이 붙기야 하겠냐마는.
그 노력 때문인지 걷기는 익숙해졌다.
걸을 때 어떻게 포스를 사용해야 하는지 감을 잡았다.
특히 소득이 있다면 포스의 소모를 줄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유지 시간이 크게 늘어났다.
걷는다.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생생한 땅의 촉감.
이 단순한 경험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세상이 달리 보인다.
너무나 아름답다.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 걸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게임도 마렵고.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하다
최초 게임을 해야 하는 목적은 달성했지만, 이 재미있는 걸 왜 그만둬?
오히려 순수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어서 다행.
그래서 오늘은 접속할 예정.
살짝 불편하지만 찬웅은 묵묵히 걸었다.
빨리 가서 게임 해야지.
‘이대로 오피스텔까지.’
포스가 간당간당하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이용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현관을 열고 들어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목이 바짝바짝 타오른다.
찬웅은 인벤토리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는 찬웅.
스릇,
‘차가워.’
냉장고에서 꺼내 넣었을 때와 그대로.
걷게 된 것도 기적 같은 일, 게다가 인벤토리라니,
이게 말이 돼?
포스도 말이 안 되는 건 비슷하긴 하지만.
스우우웅,
찬웅은 방출 스킬을 사용해 포스를 끌어올렸다.
‘이 힘을 가지고 뭘 하라고.’
현실이 판타지라면 모를까, 아니면 외계인이 쳐들어온다던가, 갑자기 세상이 좀비 아포칼립스가 된다던가···,
‘명분이 있어야지. 명분이!’
포스를 사용하는 상황은 걷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
이럴 때가 아니다.
‘비싼 캡슐이 놀고 있네.’
무려 3일 동안 게임을 하지 않았다.
‘가기 전에 기본 지식은 익히고.’
카쟌은 떠날 예정, 새로운 활동 지역을 로그드라실로 정한 터라, 거기에 대한 정도는 알고 가야지.
듀플렉스 스페이스 국내 커뮤니티 사이트로 가서, 도시의 특색, 침식지의 위치, 그곳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을 검색했다.
‘···말만 왕국이지, 작은 도시국가 수준이야. 그에 비해 침식지는 엄청 넓고.’
각 도시 침식지마다 다른 몬스터의 종류.
로그드라실의 경우 악의 기운에 의해 침식된 아인종들이 서식하는 곳, 매우 전통적인 판타지의 몬스터들이다.
코볼트, 고블린, 오크, 트롤, 오우거···.
사람들에게 익숙한 몬스터들이 나오는 데다, 엘프들의 비쥬얼은 덤, 그리고 그들이 주는 각종 퀘스트들.
‘하긴 카쟌은 너무 삭막했어.’
그게 장점도 되긴 했지만.
아무튼 게시물을 클릭해봤는데,
- 엘프에게 우호도 평판 만땅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 응, 안돼. 돌아가.
└ 평판은 무슨, 가서 마상이나 안 입으면 다행이다.
└ 근데 가서 냄새만 맡아도 온 보람을 느낄 거야.
└ 변태 새끼.
마상? 마음의 상처를 왜 입어?
- 엘프 새끼들이 퀘스트를 주기는 하냐?
└ 퀘스트 없냐고 물어봐서 처맞는 놈은 봤다.
└ 아주 쌍년, 쌍놈들이야.
└ 그런 델 왜 가?
└ 그런 데니까 가지. 거칠게 다뤄주면 좋아라 하는 변태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
대체로 평이 좋질 않다.
- 눈 딱 감고 한번 끌어안으면 어떻게 돼?
└ 해봐.
└ 추천!
└ 나도 추천한다. 꼭 해라. 두 번 해라.
└ 3일간 접속 제한에 동화율 떨어질 각오 하면, 못할 것도 없지.
└ 쯧쯧, 이런 새끼 때문에 전자 발찌 아이템이 있어야 해. 어디 가서 한국 남자라고 떠들어대지 마.
└ 나 여잔데?
하지 말아야 할 규칙도 있다.
쓰레기 버리지 마라, 풀이나 꽃 꺽지 마라, 고성방가 금지, 침식지 몬스터를 제외한 야생동물들은 죽이지 마라, 눈살찌푸리게 만드는 복식은 착용 금지, 엘프에게 먼저 말 걸지 않기, 남녀불문 성희롱 금지···.
‘괜히 로그드라실로 정했나?’
이거 무를 수도 없고,
게이트를 변경하려면 한 달이 지나야 한다.
‘···어쨌든 정했으니.’
가서 부딪혀봐야지.
이것저것 게시물을 클릭해 정보를 수집하는 찬웅.
게임이나 하자.
찬웅은 캡슐 안에 몸을 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