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4화
* * *
사랑하는 이들이 떠나고, 사랑하는 이들이 태어났다.
“아버지!”
“아빠!”
그의 아들,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앨런. 그리고 앨런의 남동생과 여동생, 쌍둥이 남매 리델과 리나.
하나의 생명이 죽고, 생명이 태어나고, 아들과 딸이 어느덧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밟았을 궤적을 떠올렸다.
“성급하게 굴지 말려무나.”
샬롯이 자상하나 엄격하게 미소 지었고, 장남 앨런이 철부지 동생들을 다독였다. 그 모습에 데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가족의 풍경이었다.
설령 이 대륙에 하나밖에 없는 제국의 지배자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하나의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떠올랐고, 데일과 샬롯, 나아가 구시대의 강자들이 설 자리는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밤까마귀 기사들 역시 하나둘씩 작센 가를 떠났고, 데일 역시 떠나가는 이들을 축복하며 그 앞길을 막지 않았다.
과거, 데일을 위해 그림자 속에서 싸운 이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순백의 성처녀 오렐리아는 리제가 그녀의 세계를 얼리기 전, 브리타니아 왕국의 지배자로 옛 세상에 남겨졌다. 그리고 성왕(聖王)으로서 당시의 역사에 칭송받는 기록을 남겼고,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그러나 칠흑의 성처녀 오렐리아는 데일의 제국 속에 함께 얼어붙었고, 얼음이 녹아내리고 나서는 브리타니아 섬으로 향해 데일과의 옛 약속을 수행했다.
순백의 성처녀, 오렐리아의 재림이라 일컬어지는 또 하나의 성왕(聖王)으로 칭송받으며.
작센 가를 이루고 있는 이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고, 그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결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스터 바로 역시, 작센 가를 떠나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따금 작센 가로 되돌아오는 자들도 있었다.
“아, 이 불충하기 그지없는 쌍놈이 감히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왔나, 마스터 바로…… 아니, 톨로메오 후작.”
“아, 참 낯설기 그지없는 이름이외다.”
마스터 바로, 동시에 톨로메오의 바로 후작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의 아내, 톨로메오의 마리아와 함께.
“임신을 축하드립니다.”
데일이 바로의 곁에 있는 여성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일찍이 그림자 성녀의 이름을 가진 여성이 생긋 웃었다.
여전히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흑색의 붕대가 휘감겨 있다. 데일의 여동생, 리제가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그녀가 볼 수 있는 것 그 너머의 풍경을 볼 일은 없으리라.
“이제 좀 술도 작작 처 마시고, 새사람이 되었다지.”
“아가씨의 명령이니, 별수 있겠습니까.”
“바로,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마리아가 입을 열었고, 마스터 바로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알겠소…… 당신.”
그 말에 데일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이 너무나도 어울리게 느껴졌다.
아버지 앨런과 어머니 엘레나가 떠나고 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은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태어나고, 그 거듭 끝에 이어지는 것이 역사니까.
어느 의미에서 레이 유리스나 핏빛공의 말도 아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사람의 역사는 곧 피의 역사다.
일찍이 흑색공, 작센 공작의 피가 데일의 몸에 흐르고 있으며, 그 피가 다시금 아들과 딸들에게 이어지듯이.
신검의 피가 샬롯에게 이어져, 다시금 샬롯의 아들딸에게 이어지듯이.
그저 그게 다였다.
괴물들이 사라져가는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데일과 샬롯,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는 제법 유예가 남아 있으리라. 그리고 그사이, 누구도 감히 이 제국과 흑금의 옥좌에 대항할 생각을 품지 못했다.
그렇기에 평화 속에서 하루하루를 곱씹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 * *
작센의 앨런, 앨런 2세가 자라날 때마다, 일찍이 아버지 ‘앨런’이 데일을 보며 느꼈을 감정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공작 가의 신동으로서, 아버지의 앞에서 상품 가치를 증명하고 재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먹혀들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앨런 2세는 데일이 그러했듯 신동(神童)이 아니었다. 그 시대의 힘도 무엇도 느낄 수 없는 보통의 성실한 아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아들이 수행하고 있는 일들을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확신이 느껴졌다.
“보세요, 아버지!”
“검의 흐름이 무척 깔끔하구나.”
데일 앞에서 검술을 갈고닦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고 노력하는 그 모습 자체가, 부모에게 있어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신뢰의 증명 그 자체였음을.
설령 어릴 적의 데일에게 괴물로서의 재능이 없었다 해도, 아버지 앨런으로서는 기꺼이 데일을 믿어주고 기꺼이 그를 지지해주었을 것이다.
“네가 무척이나 자랑스럽구나, 앨런.”
그렇기에 데일이 말했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가 데일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듯이.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니까요.”
앨런 역시, 그 시절의 데일과 마찬가지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말에 데일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 * *
“데일…… 아저씨.”
세상에서 데일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그리고 어느덧 자신이 ‘아저씨’라고 불려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유피 양.”
리제의 밑에서, 청색의 마법을 배우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리제에게 청색의 비밀을 계승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유피가 조금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저를 경멸하십니까?”
“데일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유피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저 때때로, 상냥함이 사람을 상처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신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겠지요.”
상냥함도 사람을 상처 입힐 수 있다. 참으로 그 말대로였다. 참으로 뼈가 시릴 정도의 말이었다.
“유피 양은 무척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데일의 말에 유피가 쑥스럽게 웃었다. 시골 출신의, 글자 하나 알지 못하는 소녀였다. 그러나 그 소녀가 지금에 이르러, 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정교하다 일컬어지는 청색의 업을 계승하고 있었다.
“유피 양께서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싶습니까?”
그렇기에 데일이 물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그렇습니까.”
“세상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뀌는 것이니까요.”
유피가 대답했고, 데일이 다시금 웃었다.
“그럼 유피 양께서는 이 세상이 더 낫게 바뀌리라 믿습니까?”
그 말에 유피가 일순 침묵했다. 더 이상 유피는 세상 물정을 알지 못하는 시골 소녀가 아니었다. 청색의 업을 계승하고, 리제가 이 대륙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거미줄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소서리스였으니까.
세상의 온갖 추악함과 더러움을 이해하고 나서 유피가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유피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
유피의 대답에 데일이 침묵했다.
“황제냐, 혁명이냐.”
침묵 끝에 데일이 물었다. 일찍이 그 물음이 유피를 이 자리까지 도달하게 했다. 그리고 그 끝에 이르러 데일이 다시금 되물었다.
“어느 쪽도 아니에요.”
그 물음에 유피가 대답했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제10제국의 황제, 흑금의 군주.
일찍이 무의미의 신이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세상 모두가 두려워하는 괴물의 앞에서.
* * *
새벽 어스름이 눈꺼풀 사이로 스며들 때마다, 샬롯이 그의 곁에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데일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넘길 즈음, 샬롯 역시 잠에서 깨어났다.
하루, 이틀, 그리고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나도 두 사람을 맞이하는 방법은 그대로였다.
어느덧 엘레나가 그러했듯 샬롯의 얼굴에 주름이 드리워지고, 앨런이 그러했듯 데일의 얼굴에 주름이 드리워져도 마찬가지였다.
괴물들의 시대가 끝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 시대의 끝이 두 사람의 앞에 남겨져 있었다.
“샬롯.”
그날 아침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일.”
데일이 팔을 뻗어 샬롯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고, 샬롯이 미소 지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침대 위에 누워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그들이 느끼고 있는 행복을 음미했다.
“있지, 데일. 행복해?”
“응.”
하루에서 가장 길게 느껴지고, 가장 행복하게 느껴지는 나날들이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 * *
마스터 바로의 아내, 그리고 일찍이 그림자 성녀의 이름을 가진 여성이 그곳에 있었다.
“마리아 양.”
“……폐하.”
그녀와의 접점 자체는 길지 않다. 그저 그림자 성녀로서 ‘그림자 군주’ 데일이 나아가야 할 길을 일깨워주었고, 지금에 이르러 마스터 바로와 함께 행복을 누리고 있는 여성이었다.
머지않아 곧 그녀의 아이가 태어나리라.
“그대에게 이 제국의 황제로서, 하사할 것이 있습니다.”
데일이 그녀의 그림자 속에 있는 진실을 엿보았다. 지금 그녀가 누리고 있는 행복.
더 나아가, 제3제국의 시절 그녀에게 악마가 씌웠다며 손가락으로 동공을 파버린 아버지의 광기를.
광기 속에서 마스터 바로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고 있는 소녀의 나약함을.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리아가 물었고, 데일이 대답했다.
“빛입니다.”
* * *
“고마워요, 오라버니.”
“리제 고모님!”
리제가 미소 지었다. 데일의 아들딸들이 그녀의 곁에서 웃었고, 리제가 다정하게 데일의 아들딸들을 포옹했다.
때때로 상냥함조차 사람을 상처 입힐 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두 남매 역시 더 이상 서로를 상처 입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리제는 조용히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일찍이 마리아가 황제에게 ‘그의 눈동자’를 하사받았듯, 오라버니가 준 눈동자를 통해 빛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당신이 바라고 있는 행복이 이루어지길.”
* * *
또다시 새벽녘 어스름이 떠올랐다. 그러나 흑색의 붕대를 휘감고 있는 데일이, 그 빛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샬롯.”
“깼어?”
“응.”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곁에 샬롯이 누워 있었고, 그녀가 데일을 쓰다듬을 때마다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샬롯의 살결, 냄새, 목소리.
그날도,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이 되어도 자신을 깨워주는 샬롯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이해하고 데일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미소 짓고 나서는, 울음을 터뜨렸다.
* * *
학자들 사이에서, 무엇이 제10제국의 몰락을 초래했는지는 여러 가지 말들이 있다.
흑금의 군주가 죽고 앨런 2세가 제위에 올랐을 때, 그의 체제 아래 몇 대에 걸쳐 작센 가(家)의 체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괴물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작센 가의 가주(家主)들에게 더 이상 세계를 무릎 꿇릴 수 있는 힘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몇 차례의 정쟁 끝에 제10제국이 몰락했고, 새롭게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일찍이 ‘흑금의 군주’이자 마도 황제라 일컬어진 남자의 행방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알려져 있지 않았다.
* * *
앨런 2세의 통치가 끝나고, 다음 대에 제위가 넘어가고, 그 후로도 몇 대에 걸쳐 작센 가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남자가 길을 걷고 있었다.
순백의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는 대지 위였다. 하늘이 무척이나 검었고, 땅의 밑바닥이 하얬다.
그 속에서 그저 정처 없이 길을 걷고 있었다. 흑색의 붕대로 눈동자를 휘감고, 지팡이로 더듬더듬 그 앞을 헤아리며.
어디로 가야 할지, 갈 곳조차 없이, 그저 나아갈 따름이었다.
아이처럼 엉엉 흐느끼며.
“어째서 그렇게 방황하고 있느냐.”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나갔습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떠나가고, 여동생도 떠나갔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도 떠나갔고, 제 손자들 역시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떠나갈 수 없었지요.”
“그렇구나.”
그 말에 목소리가 대답했다. 짐짓 씁쓸하게, 그러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뒤로하고.
“그럼 나와 함께, 여정을 떠나지 않겠느냐.”
“어디로 말입니까?”
“글쎄.”
그 말에, 세피아가 미소 지으며 침묵했다. 침묵 끝에 세피아가 무어라 대답했고, 그 말에 남자가 조용히 웃었다.
* * *
「12. 여정의 시작」
치익!
그것은 증기(蒸氣)로 움직이는 열차였다. 몇 차례의 제국이 태어나고 스러지며, 황조가 거듭되며 국가의 형태가 바뀌고, 새로운 혁명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증거였다.
황금과 그림자의 군주, 그들의 투쟁조차 이제는 까마득하기 그지없는 전설 속의 이야기로 치부될 무렵.
열차의 출발이 가까워졌고, 정장 차림의 신사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색의 붕대를 휘감고 있는 남자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지팡이를 짚었고, 바로 그때였다.
지팡이 앞을 가로막으며 남자아이를 향해 뻗어주는 손길이 있었다.
“세피아 님.”
“곧 열차가 출발하겠구나.”
정장 차림의 여성이, 챙이 넓은 모자 사이로 그녀의 귀를 숨기며 속삭였다. 남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는 열차예요?”
“글쎄.”
세피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라도 좋지 않겠느냐.”
“그렇네요.”
그 말을 듣고 남자아이가 웃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