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2화
* * *
후일담
무의미의 신이 사라지고, 제10제국을 지배하는 것은 데일과 그의 지혜로운 황비 샬롯의 몫이었다.
그러나 대개 사소하기 그지없는 다툼, 심지어 제국의 지배자들이 모이고 있는 회담 자리에조차 ‘흑금의 군주’는 좀처럼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는 제후들 사이의 다툼이 벌어질 때조차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데일이 그의 성, 작센의 황성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이, 저마다의 뜻을 품고 있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종교의 개혁, 역사 속으로 잊혀 사라져야 할 혁명의 부활, 나아가 구체제를 타파하자며 소리 높이고 있는 자들.
대개의 경우, 밤까마귀 표식을 새겨넣고 있는 흑갑의 기사들이 움직일 때마다 소요는 덧없이 무너졌다. 나아가 대륙 제일의 검이라 일컬어지는 샬롯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흑금의 군주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사이, 제국 사람들이 점차 황제의 생사(生死)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황제는 사실 죽었고, 그저 그의 아내가 그를 대리해 이 제국을 통치하고 있을 것이란 사실.
처음에는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이야기가, 하루가 멀다고 퍼지며 온 제국이 그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나아가 황제의 좌(座)를 놓고 대제후들 사이의 암투 역시 더더욱 격렬해졌다.
밤까마귀 기사, 신검 샬롯, 대 마도 제국의 강자들이 가진 위협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합쳐도 대 마도 황제, 흑금의 군주가 갖는 절대적 힘에 비할 바가 아니리라.
그리고 그 절대자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까닭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잇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 황제의 이름으로 제국 의회가 소집되었다.
어느덧 자리를 잡은 제국의 대제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화, 황제 폐하……!”
흑금의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가 주위를 둘러보았고, 피할 수 없는 진실들이 그림자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혁명을 꾀하고 있는 모종의 비밀 결사, 제위를 찬탈하고자 손을 잡고 협력하고 있는 제9제국의 이들, 그리고 찬탈의 계기를 위해 데일의 아내, 샬롯을 독살하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들까지.
헤아릴 수 없는 지배자들의 욕망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추악함을 머금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세계는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부조리하고, 불평등하며,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다.
“일찍이……”
그리고 그 추악하기 그지없는 세계를 마주하며, 흑금의 군주가 입을 열었다.
“이 세계를 바꾸기 위해, 세상의 온갖 악업을 짊어졌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리 없으리라. 그러나 그저 황제의 죽음을 두고 끝없이 떠들어대고 있는 귀족들로서는, 그의 말 하나하나가 심장을 후비는 비수 그 자체였다.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 헛되이 망상을 품었고, 그 대가로 치르게 될 것들.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이상의 제국을 천명했고, 그 제국 속에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았지요.”
공포 속에서 정적이 내려앉았고, 데일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헤매고 헤매도,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 같은 것은 없습니다.”
무척이나 덤덤하게.
“그대들이 이 제국의 유력자로서 느끼고 있는 행복 밑에는,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의 고통과 비명이 깔려 있겠지요. 저의 행복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폐, 폐하, 저희는 결코……!”
“모두가 행복해질 수는 없지요. 나의 행복이 곧 누구의 불행 위에 서 있음에 대해, 이제는 더 이상 저항하려 들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나의 아내를 독살할 음모를 꾸미고, 나의 제국을 무너뜨리려 들고, 나의 자리를 탐내고 있는 그대들이 행복해지는 것은…… 무척이나 불공평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데일!”
그 말에 곁에 있는 샬롯의 표정이 굳었다. 독살이라니, 그깟 우습기 그지없는 수작이 샬롯에게 통할 리 없다. 데일 역시 알고 있었다.
“앨런이 검을 쥐었지. 마법이 아니라.”
“……갑자기 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
“훗날, 그 아이는 우리의 제국을 물려받게 될 거야.”
데일이 말했다.
“더 이상 이 시대는 검(劍)으로 천하를 평정할 수 없고, 마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지. 그렇기에 이 시대의 마지막 강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수행할 따름이야.”
일말의 감정도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동시에,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로서.
“…….”
샬롯이 침묵했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들 앨런 2세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들 앞에서 이 남자, 흑금의 군주가 짓는 표정을 떠올렸다. 우스꽝스럽고, 결코 화를 내지 않으며, 그야말로 철부지 아버지의 모습에 헛웃음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제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아악, 아아아아악!”
평화 속에서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일찍이 아이의 아버지가, 그의 적들 앞에서 보여주는 표정을.
그 잔혹함과 공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샬롯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 역시 무엇 하나 다르지 않았으니까.
* * *
그 시각, 작센 황성의 중정.
시린 냉기 속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하, 제법입니다, 황자님!”
휘둘러지는 검에 헬무트 블랙베어 경이 짐짓 과장되게 검을 떨어뜨리며 웃었다.
“와, 제가 헬무트 아저씨를 이겼어요!”
앨런의 이름을 잇고 있는 그의 손자, 앨런 2세가 활짝 웃었다. 그야말로 아이처럼.
데일과 샬롯을 무척이나 빼닮아, 흑금(黑金)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였다.
“하하, 이 헬무트도 황자님에게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겠네요!”
마법이 죽어가는 시대에서 아직도 그 과거의 힘을 계승하고 있는 몇 없는 강자들이 있었다. 헬무트 역시 예외가 아니리라.
착실하게 그의 수염이 희끗희끗 물들었고, 속일 수 없는 세월의 주름이 깊어졌다.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제국의 아들, 데일과 샬롯의 피를 잇고 있는 아이.
작센의 피, 나아가 일찍이 신검이라 불린 오르하르트 가의 핏줄을 잇는 아이.
그럼에도 앨런 2세는 그다지 특별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았다. 이 시대에 태어나고 있는 모두가 그러하듯이.
헬무트 경이 일부러 져주었을 때, 데일처럼 날카롭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저 아이처럼 기뻐할 다름이었다. 그럼에도 그걸로 됐다.
새로운 세상과 시대를 살아가며, 헬무트 경 역시 다가올 시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하나의 강자가 세상을 압도하고, 마법 하나로 패도(霸道)를 칭하는 괴물들이 사라진 세상이 무엇보다 고맙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여전히 세상에 전쟁이 그칠 일은 없고, 사람들의 다툼이 그칠 일도 없으리라.
그러나 그걸로 족했다.
그 역시 괴물 중의 하나였기에, 그리고 더 이상 그 괴물들이 태어날 일이 없는 세상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 * *
“마법의 수행이 일취월장하고 있네요.”
리제가 유피를 보며 말했고, 유피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리제 스승님!”
“무척 신기하죠?”
리제의 물음에, 유피가 말없이 팔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 위에서 북부의 냉기가 춤추듯 휘몰아쳤고, 그것이 다였다.
“네!”
유피에게는 마법의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마법이 죽어가는 이 시대에, 그녀의 마법이 꽃피울 일은 없으리라.
사람의 정신에 꼭두각시의 실을 심어 조작할 수도 없고, 대륙 곳곳에 청색의 거미줄을 드리워 그들을 감시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제는 이 소녀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는 일이 무척 즐거웠다.
“유피 양께서는 훗날, 어엿한 마법사가 되어 무엇을 바라시나요?”
그저 리제가 물었을 때, 유피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 마법으로,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일찍이 과거의 리제가 그러했듯이.
유피를 볼 때마다 과거의 그녀가 겹쳤다. 미숙하다고 생각했을 시절의 과거, 너무나도 철없고 어렸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시절의 그녀를.
“그래요, 그것이야말로 우리 청색 마탑이 추구하는 정신이랍니다.”
그러나 유피를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올곧음이야말로, 마법사에게 있어 진정으로 가져야 할 덕목이었음을.
세상의 추악함과 풍파 속에서 어느덧 리제 역시 그 마음을 잃고, 마찬가지로 그 시절의 헤아릴 수 없는 강자이자 괴물로 거듭났음을.
일찍이 이 세계의 여신이 영겁의 잠에 빠지고 나서, 머지않아 최후의 마나마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리제를 비롯해 아직도 그 체내에 헤아릴 수 없는 고대의 힘을 품고 있는 괴물들이 있었고, 그들 모두가 잠들 때까지는 적잖이 시일이 걸리겠지.
그럼에도 괴물들 역시 조금씩 노쇠할 것이다. 종국에 이르러 진정으로 ‘인간들의 세상’이 남겠지.
그때가 찾아올 때, 리제의 앞에 있는 그녀야말로 ‘인간들의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줄 진짜 마법사가 될 것이다.
“그럼 마저 수행을 계속하도록 할까요.”
“네, 리제 님!”
* * *
“아가씨, 다시 생각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마스터 바로, 일찍이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기사이자 명예로운 기사였고, 이제는 새 제국에서 새 작위를 하사받고, 하루하루를 술이나 퍼마시는 백수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앞에 있는 여성이 대답했다.
“바로, 어째서 저와 맺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시나요?”
“어, 그야, 이렇게 주정뱅이에 할 짓도 없이 하루하루 백수처럼 지내고 있는 놈팽이 새끼를……”
“그렇네요, 주정뱅이에 하루하루 노닥거리고 있는 남자와 맺어질 여자가 참 불쌍해요.”
일찍이 그림자 여신을 섬기는 성녀였으나, 이제 그 이름 같은 것은 의미가 없었다. 마스터 바로가 더 이상 데일을 위해 움직이는 살육의 검이 아니듯이.
“그럼 오늘부터 맥주를 줄이고, 저와 함께 모처럼 영지 시찰이라도 나가지 않으시겠어요?”
“…….”
그 말에, 마스터 바로가 손에 쥐고 있는 맥주잔을 바라보았다. 넘실거리고 있는 그 액체를 뒤로하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부디 아가씨의 뜻대로.”
* * *
“아버지!”
그 목소리에 데일이 고개를 돌렸고, 어머니 엘레나가 ‘두 명의 앨런’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고, 앨런 2세가 활짝 웃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내일도 또 같이 놀아요!”
아이처럼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앨런 2세가 데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두 부부가 말없이 웃었고, 데일이 앨런을 포옹하며 몸을 일으켰다.
“데일, 아직이야?”
바로 그때, 나이트가운 차림의 샬롯이 데일을 불렀다. 그제야 데일이 아차 싶어 숨을 삼켰고, 그 상황을 헤아리며 앨런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앨런, 오늘 밤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자는 게 어떻겠니?”
“그, 그래도 돼요?”
뜻밖의 말에 앨런 2세가 활짝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섰고, 데일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죄송합니다.”
“개의치 마라. 나 역시 새 손주를 보게 될 날이 기대되니.”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부부 생활을 잇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앨런이 말했고, 그 말에 데일이 조용히 웃었다.
참으로 그 말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