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97화 (297/301)

외전 30화

* * *

데일과 레이 유리스의 꿈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의 존재를 조롱하는 ‘검은 공자’가 있었다.

그러나 데일과 레이, 그 누구의 짓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다. 이 사태의 진범(眞犯)이자 데일의 여동생, 청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아라크네가.

리제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공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미소 지으며 데일이 그녀의 그림자 속을 바라보았고, 리제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데일과 마찬가지로 그곳에 있는 ‘검은 공자’를 주시했다.

제국 제일의 천재, 패배를 알지 못하고 그의 적들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 잔학의 대명사. 옛 데일의 과거이자 그를 상징하고 있는 이름 그 자체가.

“……제 잘못이에요, 오라버니.”

그를 그림자 속에 숨겨두고, 리제가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피가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림자 속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림자 군주의 힘이다. 그리고 리제 역시, 데일에 이어 또 하나의 그림자 군주를 자처하고 있었다.

“유피 양,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어요, 데일 아저씨.”

“나중에 마저 이야기를 나누지요.”

“네!”

데일이 말했고, 유피가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직후, 두 사람이 남겨졌다.

데일과 리제, 작센의 이름을 잇고 있는 두 남매.

그리고 두 사람의 세계를 휘감듯, 풍경이 스러졌다. 순백과 칠흑의 겨울밤이 그곳에 내려앉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데일의 세계가 아니었다.

“말해보렴. 무엇을 했니, 리제.”

그럼에도 데일로서 당황할 것은 없었다. 설령 그녀가 무엇을 저질렀더라도 용서해 줄 수 있었고, 이해해줄 수 있었다.

“…….”

바로 그때였다.

리제의 그림자 속에 있어야 할 ‘검은 공자’가, 사상의 세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리제,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절대영도의 세계 속에서, 모두의 행복을 위해 영겁의 파수꾼을 자처하며, 기약 없는 기다림과 고독을 각오했지요. 그 일방적이기 그지없는 자기희생을 통해 흑금의 군주, 그대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말입니다. 그것이 리제의 각오였지요.”

“……리제의 오빠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군.”

“틀립니까?”

데일의 조소에도 검은 공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의 존재가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

데일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럼 그녀가, 우주의 겨울 속에서 추위에 떨며 얼마의 고독과 냉기를 감당해야 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리제는 당신의 어리석음을 자초하기 위해, 당신이 짊어진 것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검은 공자가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그 고통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뭐라고……?”

“기약조차 없는 허무와 고독, 그리고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 속에서, 그녀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은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오라버니, 저는……!”

리제가 무어라 말을 이으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 말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바람, 망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그렇기에 엄밀히 말해, 저의 존재는 그저 거짓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게, 이곳에 존재하고 있지요.”

검은 공자가 말했다.

“황금과 그림자, 진실과 거짓 모두를 받아들이고 있는 ‘흑금의 여제’이자 저의 여동생이 저를 필요로 했으니까요.”

“…….”

“그리고 리제의 고독 끝에 당신이 찾아왔을 때, 저 역시 필요를 잃었습니다.”

검은 공자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저는 결국 진짜가 될 수 없었으니까요. 설령 진실보다 더 진실한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동시에 그 존재가 있었기에, 리제는 우주의 겨울 속에서 버틸 수 있었다. 설령 데일이 리제의 자기희생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리제는 버틸 수 있었으리라.

그녀의 오라버니이자 ‘검은 공자’가 그 곁을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그림자 여왕으로서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태고의 어둠이 있었고, 나아가 황금과 거짓의 여제이기도 했다.

흑금의 여제. 그 황금과 그림자가 고독 속에서 갈구하고 있는 구제(救濟)의 형태.

“그래서 나의 자리를 빼앗고, 진실의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해 움직였나?”

“아니에요, 오라버니!”

바로 그때, 리제가 침묵을 깨트리고 소리쳤다. 필사적으로 또 하나의 오라버니를 옹호하듯이.

“리제…….”

그렇기에 데일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무의미의 신.”

바로 그때, 검은 공자가 되물었다.

“인간(人間)이기를 저버리고, 신이 되는 것은 무슨 느낌입니까? 불사공 프레데릭을 조소하며, 최후의 최후까지 ‘인간’을 지속하고 있는 그 시절의 ‘검은 공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

슈브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인간이기를 결의하고 있는 그 시절의 자신, 검은 공자.

그러나 그 앞에 서 있는 자기를 돌아보았다.

“그대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 사람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풍경입니까?”

“무엇을 바라지?”

“우리의 여동생이 추위와 고독 속에서 울고 있을 때, 신을 자처하고 있는 당신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

“모두가 그대를 위해서였습니다.”

검은 공자가 조소했다.

“아직도 자신이 신처럼 느껴지십니까? 당신의 앞에 있는 것들이 모두 무의미하고 덧없게 느껴지십니까?”

데일로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검은 공자가 말했다.

“사랑하는 여동생을 위해, 이 아이가 느꼈을 고통을 위로해주고 싶습니다. 그녀를 포옹하며 더 이상 그녀가 괴롭지 않게,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이들이 괴롭지 않게 제 전부를 바치고 싶습니다.”

“나 역시…….”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 말에 데일이 무어라 대답하려 했으나, 검은 공자가 조소했다.

“제9제국의 황제를 좇으며, 그 앞에 있는 무의미를 곱씹고 사색하고 있는 당신이, 아직도 자기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며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있는 당신이, 정녕 저보다 진실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 말과 동시에 ‘검은 공자’가 땅을 박찼다. 그가 휘감고 있는 그림자 망토가 칼날처럼 휘둘러졌고, 직후 그의 손에서 냉기가 휘몰아쳤다.

태고의 어둠도 종말의 냉기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잘 알고 있는 ‘검은 공자’였다.

“「개틀링식」, 「20mm」.”

투영하고 있는 볼트 마법의 영창마저, 필사적으로 수식을 투영하고 있는 ‘보통의 마법’이었다.

처절할 정도로 진실로 가득 차 있는 싸움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검은 공자’가 무의미의 신을 향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아무 의미도 없었다.

없었어야 했다.

그의 아이스 볼트가, 섀도우 불릿이 아무리 빗발쳐도 데일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그림자의 칼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너무나도 진실하게 부딪쳐 오는 그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이 보였다. 겁에 질린 아이처럼, 비밀을 들켜버리고 어쩔 줄 몰라 하듯이, 여동생이 울고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아무리 교묘하게 계획을 짜고 음모를 꾸며도, 결국 데일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여동생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앞에 있는 존재가 뼈저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푸욱!

바로 그때, 검은 공자의 그림자 칼날이 데일의 육체를 향해 내리꽂혔다.

“가르쳐 주어서……”

그림자 칼날이 데일의 가슴을 찢고 등 뒤로 튀어나왔다. 흑색의 피, 암혈이 칼날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고맙다.”

피가 떨어지며, 데일이 말없이 거짓의 과거를 포옹했다.

처음으로, 무의미의 신 앞에서 진정으로 의미를 잃지 않는 것이 있었다. 덧없어지지 않는 발버둥이 있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의미.

그 의미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은 ‘무의미의 신’이었다.

슈브의 말대로다. 신(神)이라고 하는 존재, 그 존재들은 결국 인간을 이길 수 없다. 오직 인간밖에 용을 죽일 수 없듯, 신을 죽이는 것 역시 인간의 몫이었다.

그렇기에 하나의 인간이, 검은 공자가 무의미의 신을 죽였다.

“그리고 나를 용서하지 말아라.”

검은 공자를 포옹하며, 데일이 말했다.

푸욱!

다시금 소리가 났다.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어둠이, 칼날이 되어 내리꽂히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검은 공자 역시 놀라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웃을 따름이다.

“……딱히 당신을 이해하거나 용서할 생각은 없습니다.”

검은 공자가, 힘없이 피를 흘리며 웃었다. 그 무엇보다 붉고 핏빛에 가까운 피가 입술에서 흘러내렸다.

“그저 우리의 약속을…… 슈브와의 약속을 이행해 주십시오.”

하나의 인간이 무의미의 신을 죽였다. 그러나 그것이 곧 데일의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남겠다는 결의를.”

“나에게, 그리고 ‘검은 공자’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겠다.”

신이 죽었고, 인간이 태어났다.

“그걸로 됐습니다.”

검은 공자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그의 육체가 힘없이 무너졌고, 덧없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인간이 고개를 들었다.

순백과 칠흑의 겨울밤에, 리제가 남겨졌다.

흑색의 붕대가 그녀에게 비치는 세계를 휘감고 있다.

“리제.”

데일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오라버니께서는 아무것도 용서하실 게 없어요.”

리제가 조용히, 그러나 슬픈 듯이 씁쓸하게 웃었다.

“모두 저의 잘못이에요.”

“우리 모두의 잘못이지.”

데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기까지였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축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득남입니다!”

노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초조하게 숨을 삼키고 있는 데일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무의미의 신이 아니라, 그저 생명의 이치 앞에서 벌벌 떨며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인간으로서.

“데일…….”

샬롯이 조용히 웃으며 데일의 손을 마주 잡았고, 그대로 포대기에 휘감겨 있는 생명을 포옹했다.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암혈의 육체, 어느 의미에서는 샬롯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서 울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의 아이였다.

그 사실이, 그저 이상할 정도로 먹먹했다.

“우리 아이야.”

샬롯이 웃었다. 뼈를 깎을 정도의 수행을 거듭하고 있는 샬롯이기에, 이 정도가 고통스러울 리 없으리라. 그러나 하나의 생명을 짊어지고 있는 어머니의 무게, 그것은 결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데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곳에는 신도, 신의 검도 없었다. 두 명의 인간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하나의 인간이 태어났다.

울고 있는 생명.

뒤늦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어왔다.

“수고했다, 아이야.”

엘레나의 말에 샬롯이 미소 지었고, 아버지 앨런이 두 사람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디에나 있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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