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96화 (296/301)

외전 29화

* * *

테세우스의 배.

레이 유리스의 물음에 샬롯이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고, 데일이 조용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데일?”

“이 시대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었나?”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하며 물었고, 레이 유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일찍이 ‘이계의 용사’가 있었다고 일컬어지는 세계에서는, 무척이나 유명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용사의 이름이 나오자, 샬롯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렇기에 데일이 샬롯의 앞을 가로막고 차갑게 대답했다.

제국과 세상의 지배자,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황금과 그림자의 군주로서.

“요점을 말하라, 레이 유리스.”

“폐하께서는 자기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역사, 그리고 『피의 책』에 기록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레이 유리스가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의 지배자를 자처하며, 제9제국을 무너뜨리고 역사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네요.”

“역사의 무대 위에 서는 것은 우리의 결정이 아니다.”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너의 통찰이 옳았다고 할 수 있겠지. 피의 기록자여.”

“그렇습니까.”

“묻겠다, 레이 유리스. 무엇을 꾸미고 있지?”

데일이 다시금 물었다.

“설령 네가 무엇을 꾸미고 있다 할지라도, 내 앞에서는 무엇 하나 무의미하다.”

“그 말대로입니다.”

레이 유리스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앞에서는 그 무엇조차 아무 의미가 없지요.”

데일이 묵묵히 침묵했다. 무의미의 신으로서, 그 덧없음 곱씹으며.

“그렇기에 저는 이곳에서 혁명을 포기하고, 저와 유리스 가(家)의 일족들을 폐하의 비호 아래 놓일 수 있도록 자비를 바랍니다.”

“…….”

그 말과 동시에 레이 유리스를 필두로, 그곳에 있는 뱀파이어의 일족들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그 무엇도 폐하를 어찌할 수 없고, 폐하의 앞에서는 의미가 없지요. 저의 형제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미하일 유리스를 말하고 있나.”

“그렇습니다.”

레이 유리스가 고개를 숙이며 긍정했다.

“혁명도 황제도, 모두 폐하의 앞에 무릎 꿇게 될 겁니다. 그대의 앞에서는 그 무엇도 의미가 없으니, 저항이나 발버둥조차 덧없는 짓일 테지요.”

무릎 꿇고, 레이 유리스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곧 세계이며, 폐하의 정신이 곧 이 세계의 정신입니다.”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아부에,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동시에 냉기와 어둠이 휘몰아쳤고, 데일과 레이 유리스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흑금의 군주가 쌓아 올린 사상의 세계.

“테세우스의 배를 알고 있냐고 물었지.”

“그렇습니다.”

데일이 싸늘하게 레이 유리스를 몰아붙였다.

“내 앞에서는 그 어느 수작도 의미가 없다고, 방금 네 입으로 고백하지 않았나? 무엇을 꾸미고 있지? 내 꿈속에 ‘검은 공자’의 형태로 나타나, 나를 조롱하는 것은 너의 짓이 아니었나?”

그렇기에 데일이 말했다. 냉기와 어둠 속에서, 일체의 의미를 무의미로 돌리는 존재를 자청하며.

“오해하지 마십시오, 폐하.”

그 말에 다시금 레이 유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저 역시, 폐하와 마찬가지로 ‘검은 공자’의 물음에 대해 대답을 하러 왔을 따름입니다.”

“뭐라고?”

“제 꿈속에 나타나 ‘검은 공자’가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알 수 있었지요. 그 존재가, 지금 제 앞에 존재하고 있는 폐하와 별개의 존재임을.”

“…….”

“그리고 ‘검은 공자’께서는 제가 존재하고 있는 형태를 조롱하기 위해, 이계의 이야기를 입에 담았지요.”

“너의 짓이 아니었다고?”

“그렇습니다.”

그의 말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이 흑금의 군주이자 그림자 군주의 힘이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앞에 있는 존재 역시, 거짓과 황금의 군주를 자처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말이나 그가 보여주고 있는 진실의 형태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 유리스의 그림자가 무고를 외치고 있었다.

“제가 무엇을 꾸미고 계획을 세워도, 그대 앞에서 의미를 지닐 수 없음을 이해했습니다.”

“…….”

데일이 침묵했다.

처음에는 그저 덧없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레이 유리스가 직후 그 꿈의 내용을 입에 담았을 때, 그것이 그의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 유리스의 짓이 아니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검은 공자’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럼 두 사람의 꿈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검은 공자’는 대체 누구이며, 누구의 수작일까.

알 수 없었다.

“기이하지 않습니까.”

그 사실을 깨닫고 레이 유리스가 즐거운 듯 웃었다.

“제국 제일의 천재이자, 적들 앞에서 일말의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잔학의 대명사. 그것이 바로 ‘검은 공자’였지요.”

황금의 군주로서, 데일의 황금 속에 숨겨져 있는 거짓을 엿보며.

“그리고 그 존재가, 무의미의 신과 맞서고 있는 듯 보이네요.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

레이 유리스가 즐거운 듯 말했고,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는, 적어도 레이 유리스는 최후의 최후까지 ‘검은 공자’와 맞서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황금의 군주, 심지어 핏빛공조차 예외가 아니었지요. 세상 모두가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지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저는 그저 천하의 ‘검은 공자’가 패배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설령 그 상대가 무의미의 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과거에 불과하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공교롭지 않습니까.”

데일이 침묵했다.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검은 공자’는 절대로 패배하는 게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무의미의 신과 맞서길 바라는 듯하네요.”

“진화의 악마, 놈의 짓이었나?”

“그날, 제 형제는 죽었습니다. 존재의 의미와 기능을 상실하고 말이죠.”

그 말대로,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진화의 악마이자 미하일 유리스는 스스로 악마로서의 힘을 포기하고 죽었다.

“저 역시, 그 존재에 대해서는 정말로 알지 못합니다.”

그럼 도대체 데일과 레이의 꿈속에 나타나 조소하는 ‘검은 공자’는 누구일까.

“나아가 황제와 혁명 모두 폐하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도 폐하 앞에서 대적할 수 없고, 폐하께서는 다시금 세상의 지배자가 되실 테지요.”

그렇기에 레이 유리스가 즐거운 듯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무리 제가 발버둥 쳐도, 지금의 그대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음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말없이 팔을 뻗었다.

종말의 냉기가 흩뿌려지며 레이 유리스의 존재를 휘감았고, 손짓 하나로 그의 존재를 허무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 유리스는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그 무엇도 이 존재 앞에서는 무의미했기에.

일찍이 무의미의 신이 되어 제9제국의 황제를 쫓았을 때, 그의 앞에서 헤아릴 수 없는 귀족들이 무릎을 꿇고 항복을 외쳤다.

그들의 저항이나 발버둥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있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을 향해 조롱하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과거의 망령이자 ‘검은 공자’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공자’는 우리의 앞에 나타나, 기꺼이 우리의 존재를 조롱했지요.”

“그럼 그것이 정녕 너의 짓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

“세상의 그 무엇도 당신 앞에서 진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당신 앞에서는 그 어느 저항조차도 의미가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황금과 그림자의 군주시여. 그리고 무의미의 신(神)이여.”

레이 유리스의 말에, 데일이 나직이 표정을 찌푸렸다.

“나에게 무엇을 바라지?”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저의 아버지가 그래왔듯 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피의 책』에 기록하는 일입니다. 설령 그것이 흑금의 군주 앞에 무릎 꿇고 충성하는 일일지라도.”

그 말에 데일이 나직이 침묵을 지켰다.

“……네 말을 믿겠다.”

침묵 끝에, 무의미의 신이 대답했다.

* * *

데일이 사상의 세계를 걷어내고 나서, 밤까마귀 기사들이 다급히 그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걱정할 것 없다.”

그러나 데일이 조용히 팔을 뻗어, 그의 기사들을 제지했다.

“레이 유리스, 너의 충성을 받아들이마.”

데일이 말했고, 레이 유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하나, 나에게 약속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를 따르고 있는 혁명의 기수들을 나에게 넘겨라.”

그 말에 유리스 가의 일족들이 숨을 삼켰다. 그러나 레이 유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며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 * *

그날, 혁명이 끝을 맺었다.

마지막까지 레이 유리스를 따르고 있는 혁명의 기수들이 그들의 뜻을 포기하고 무릎 꿇었고, 구심점을 잃고서 혁명의 잔당들이 흩어졌으나 ‘청색의 거미줄’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데일이 직접 움직일 필요조차 없이 숙청이 이루어졌고, 그것으로 끝을 맺었다.

황제와 혁명 모두가 스러지고 나서,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신(神)의 몫이었다.

* * *

“오라버니.”

여동생 리제가 데일을 불렀고,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흑색의 붕대로 두 눈을 가린 그의 여동생이 있었다.

“폐하…… 아니, 데일 아저씨…….”

청색 마탑주의 곁에서, 유피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바로 직후, 유피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엇’에 대해 알아차렸다.

“유피 양.”

“여, 역시 알아차리셨나요?”

유피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러나 그 당황에는 그저 수줍음이 깃들어 있을 따름이었다.

“리제 님께서, 저에게 마법의 재능이 있대요.”

“……축하드립니다.”

“무척이나 재능이 뛰어나답니다.”

“고, 고마워요, 리제 님.”

유피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웃었다. 그 말에 데일이 조용히 침묵했고,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꿈을 꾸었어, 리제.”

“꿈이요?”

흑색의 붕대로 시야를 가리고 있기에,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일찍이 ‘검은 공자’라 불렸을 시절의 내가 나타났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리 없는 유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제가 조용히 침묵했다.

“처음에는 그저 악몽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나 아니었지. 그러니 리제, 짐작할 수 있는 무엇이 없니?”

데일이 되물었다. 딱히 그녀를 추궁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상과 의식을 조종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청색의 업이다.

“약속했잖니, 리제. 일방적으로 치러지는 희생은 모두를 괴롭게 할 따름이야.”

데일이 말했다. 그날, 우주의 겨울에서 리제와 마주했을 때를 떠올리며.

“…….”

리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용서해 주세요, 오라버니.”

“아무것도 용서할 것은 없어.”

데일이 씁쓸하게 웃으며 리제를 포옹했다.

포옹하며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검은 공자’가, 그곳에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