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95화 (295/301)

외전 28화

* * *

여느 때처럼 냉기가 흩날리는 북부의 대지.

일찍이 그러했듯 역사 속에서 새 제국의 심장으로 거듭나 있는 작센 황성의 중정을, 데일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밤하늘이 어두웠고, 잿빛의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하얗게 쌓여 있는 순백의 밑바닥이 발자국 모양으로 패였다.

“데일.”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세피아 님.”

일찍이 데일과 리제의 스승이자, 엘프 마법사가 그곳에 있었다.

“표정이 어둡구나.”

“홀로 남겨진 세상에서,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됐을 때…….”

세피아가 말했다. 그 말에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비로소 제 여정이 끝이 났다고 믿었어요.”

그리고 누구 앞에서도 보이지 않는 나약함을 드러내며 말했다.

“세상이 제 손 위에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 곁에 있지요.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요? 이 이상 무엇을 더 손에 넣어야, 이 가슴의 공허가 메워질까요? 얼마나 더 세월이 흘러야 제 방황이 끝이 날까요?”

어느덧 데일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가르쳐 주세요, 세피아 선생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마신이나 무의미의 신이 아니었다.

그저 나약함으로 가득 찬 인간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엘프 마법사 세피아 앞에서 가르침을 추구하는 ‘검은 공자’가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나 역시, 세상 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방랑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스승조차, 데일의 물음에 해답을 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세피아는 그저 말없이 데일을 포옹해줄 따름이었다.

* * *

꿈을 꾸었다.

그것이 꿈이라고 명백하게 자각할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꿈이었다.

희고 어두운 밤하늘 아래,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작센 공작의 이름을 계승하고, 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며, 절대영도의 얼음 속에 갇혔다가 홀로 세상에 내팽개쳐진 고독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사랑하는 이들과 조우하고 새로운 제국의 황제로 거듭나 있는 존재.

무의미의 신(神).

그것이 데일이었고, 그의 앞에 남자아이가 있었다.

흑색의 붕대로 두 눈동자를 가린 남자아이였다. 그러나 결코 불사공 프레데릭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 모습을 잊을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자신의 과거를 잊을 수는 없다.

‘검은 공자(Black Prince)’가, 데일의 앞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은 씁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이것은 꿈에 불과하다. 그의 앞에 있는 저 존재 역시도, 과거의 망령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어째서 고개를 돌리려 하십니까?”

검은 공자가 물었다. 일찍이 데일이 그러했듯, 정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무엇을 말이지?”

데일이 되물었다.

“저에게서 말입니다.”

“내가 너를 마주해야 할 이유가 있나?”

데일이 싸늘하게 되물었고, 검은 공자가 차갑게 대답했다.

“두려우십니까?”

늘 그러했다. 검은 공자는 늘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틈에 있는 것을 잡아낼 수 있었다. 제국 제일의 천재, 공작 가의 신동.

그 존재가 자신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 존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남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데일이 웃었다.

“내가 나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나?”

그 물음에 ‘검은 공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로 제가 당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말이지?”

“당신이 그녀에게 되묻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자신이, 정녕 그 시절의 인간(人間)이 맞는지.”

그녀, 필시 슈브를 일컫는 것이리라.

“──테세우스의 배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

그리고 ‘검은 공자’가 말했다. 그 말에 데일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나서, 테세우스는 무사히 그의 배를 타고 아테네까지 돌아왔다. 그리고 아테네 사람들은 테세우스의 행적을 기려, 후대에 대대로 그의 배를 보존하기로 결의했다.

“알고 있지.”

“그러나 테세우스의 배를 이루고 있는 판자 하나가 썩을 때마다, 아테네 사람들은 썩은 판자를 새로운 판자로 갈아 끼웠습니다.”

커다란 배에서 나무판자 하나를 갈아 끼워도,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테세우스의 배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 끝없이 판자를 새롭게 갈아 끼우고 낡아빠진 부품들을 교체하는 과정을 거듭하며, 어느 시점부터 테세우스가 타고 왔을 당시 ‘배의 판자’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겠지요.”

결국 배가 하나도 남김없이 새롭게 갈아 끼운 판자로 거듭났을 때, 거기에 옛 테세우스의 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끝없이 재구축을 거듭하며 어느덧 거기에 ‘오리지널’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아테네 사람들은 그것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불렀다.

“…….”

“그럼 정녕 그것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재수 없는 꼬맹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거의 자신이었음을 떠올리자, 더더욱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우리의 세포는 지금도 사멸과 생성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세포들이 하나씩 탈바꿈하고 육체 전체의 세포들이 바뀌고 나서도, 지금 그곳에 있는 당신이 정녕 과거의 ‘검은 공자’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내가, 참 재수가 없는 꼬맹이였다는 것은 잘 알겠지.”

“세포가 다가 아니지요. 당신이 믿고 있는 신념, 사상, 목적, 일찍이 ‘검은 공자’였을 시절의 제가 지금의 당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판자’들이 갈아 끼워졌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저는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이 ‘검은 공자’가 아니듯이.”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지?”

“그것은 당신이 생각할 일이지요.”

검은 공자가 싸늘하게 조소했고, 흩날리고 있는 눈송이가 그대로 정지했다.

어느덧 그곳에 ‘검은 공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세계가, 정지해 있는 상태로 끝없이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알 수 없는 시린 냉기가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그리고 그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공허의 대지를 바라보며,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이튿날 아침.

꿈에서 깨어나자, 푹신하기 그지없는 양모 침대의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잠들어 있는 샬롯의 옆모습이 보였다.

말없이 데일이 손을 뻗어 샬롯의 뺨을 쓰다듬었고, 샬롯이 즐거운 듯 웃음소리를 흘렸다.

“일어나니까, 데일이 내 코앞에 있네.”

“그래.”

데일이 웃었고, 샬롯 역시 웃었다. 그대로 데일이 샬롯의 부풀어 있는 배를 향해 손을 옮겼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아이가 함께 있어.”

“세 명이 함께 잠들기에는 조금 비좁지?”

“그렇지 않아.”

그 물음에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딱 적당해.”

“정말로?”

“너무 넓은 곳에서, 우리 아이가 고독에 떨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샬롯이 말했다. 그 말에 데일로서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할 따름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데일.”

그러나 이내 샬롯이 데일의 뺨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 무엇보다 상냥하고 자애롭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너는 나쁘지 않아. 그러니까 너무 자기를 자책하지 마.”

“……샬롯.”

데일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대로 샬롯의 곁에 누워, 두 사람의 아이를 느끼고 행복에 잠겨 있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

그렇기에 데일이 되물었다. 일순 샬롯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다정한 아버지가 되어줘.”

샬롯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 비할 바 없는 결의와 각오를 다지고.

“너의 제국을, 나에게 줘.”

그 말에 데일이 다시금 숨을 삼켰다.

“나의 제국……?”

“이 세상은 너의 것이 됐어. 그러나, 네 발아래 놓여 있는 세상은 널 괴롭게밖에 하지 않아.”

“샬롯…….”

“내가, 네 짐을 함께 짊어질 수 있도록 허락해줘.”

샬롯이 말했다.

“내가 전장에서 제국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출정할 때, 황성에 남겨질 우리 아이의 곁을 지켜줘.”

“…….”

“내가 이 제국의 통치를 위해 귀족들을 소집할 때, 네가 우리 아이의 곁을 지켜줘.”

샬롯의 말이 갖는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있잖아, 데일.”

“응.”

“세상의 지배자가 되고 나서, 행복해?”

샬롯이 다시금 되물었다.

“우리의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도, 우리를 버려두고 홀로 세상의 대속자를 자처할 생각이야?”

“…….”

그 말에 데일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샬롯이 홀로 짊어져 왔을 고통과 괴로움이 느껴져, 말없이 입술을 깨물 따름이었다.

망설임이 있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약속할게.”

데일이 말했다.

“고마워, 데일.”

그 말에 샬롯이 웃었다. 웃고 나서, 그대로 데일을 향해 입맞춤했다. 그리고 샬롯과 입술을 겹치고 있는 사이에, 무심코 꿈의 내용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검은 공자’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샬롯이 입술을 겹치고 있는 자신이, 정녕 그녀가 알고 있는 자신일까.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 * *

“폐하를 뵙고자 하는 자가 찾아왔습니다.”

데일이 몸을 일으키고 황성으로 나오기 무섭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누구지?”

“자신을 혁명군의 수장이라 일컫는 자입니다.”

“…….”

그 말에 데일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그 말을 신뢰할 증거가 있나?”

“마도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철기대의 대병력이, 그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공작령 앞에서 밤까마귀 기사들에게 항복 의사를 타진하고 있습니다.”

“…….”

“기사들이 그들의 마도 갑주를 회수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를 자처하며 그들의 수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를 황성으로 들여보내라.”

데일이 말했고, 부하가 고개를 숙였다. 설령 모종의 음모를 숨기고 있다 할지라도, 이 존재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작센 가에 충성하는 이들이기에, 역설적으로 그들의 주군이 자신들의 보호나 걱정이 필요 없는 존재임을 그 무엇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흑금의 옥좌에 앉는 것은 데일의 몫이 아니었다.

샬롯이 옥좌에 앉았고, 데일이 그녀의 곁에 섰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그 행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태어날 두 사람의 아이, 그 아이를 품고 샬롯의 배가 부풀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데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끼이익.

미소 짓고 나서, 작센 황성의 대회당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혁명군의 수장이자 수뇌를 자처하는 이들이 그 앞에 있었다.

유리스 가(家)의 일족들. 그리고 그들을 보좌할 수 있도록, 마도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최소의 철기대가 있었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황제 폐하.”

회당을 가로질러, 혁명군의 수장이자 유리스 가의 가주(家主)가 고개를 숙였다.

레이 유리스의 가죽을 쓰고 있는 뱀파이어의 일족.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싸늘하게 침묵을 지켰다.

“무엇을 위해 이 영지까지 발걸음을 하셨나요?”

데일의 침묵을 대신해 샬롯이 입을 열었다. 샬롯이 물었고, 레이 유리스가 차갑게 되물었다.

“테세우스의 배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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