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7화
* * *
어느 날 갑자기 제9제국이 멸망했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일찍이 황제와 혁명 사이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주고받고 있는 대립조차 의미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물음 자체는 유효했다.
황제냐, 혁명이냐.
황제 브란덴부르크의 빌헬름은 스스로 제위(帝位)를 포기했고, 제국 내 황제파의 귀족들이 그들의 새 황제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게 아홉 차례의 제국들이 세워지고 스러지기를 거듭했고, 그 끝에 비로소 제10의 제국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부름에 응해주셔서 거듭 감사드립니다.”
일찍이 제3제국부터 이어지는 ‘제국의 전통’이 있었다. 황제를 필두로 제국의 귀족과 성직 제후, 심지어 자유도시의 부르주아들까지 하나의 자리에 모여 제국의 총의를 결정하는 것.
제국의회(Reichstag).
제국령 도시 잉겔하임에서 펼쳐진 그 엄숙하기 그지없는 자리에, 흑금의 군주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결코 데일 하나가 아니었다.
제4제국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일컬어진 옛 시대의 강자들 역시,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직전까지의 웅성거림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
“저, 저것이 대륙 북부, 제4제국의……”
황제의 아내이자 일찍이 신검(神劍)의 이름으로 불린 랭커스터 여대공, 그리고 작센의 샬롯.
황제의 아버지, 나아가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라 일컬어진 죽음의 대가, 작센의 앨런.
작센 가가 자랑하는 밤까마귀 기사들과 그들의 수장, 광검 헬무트 블랙베어 경과 무덤의 수호자들.
나아가 마탑이 색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흑색의 마력’을 머금고 있는 흑색 마탑의 흑마법사들까지.
후웅!
밤까마귀 기사들의 오러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육체에 휘감기는 칠흑의 오러 블레이드, 나아가 오러 아바타 앞에서 귀족들이 숨을 삼켰다.
“오, 오러 아바타!”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밤까마귀 기사들의 뒤를 이어서, 혁명군의 비밀 병기라 일컬어진 ‘마도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칠흑의 중장갑 보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것은 설마!”
“혁명군의 마도 갑주……?!”
귀족들이 당혹스럽게 숨을 삼켰으나, 데일이 걱정할 것 없다며 말했다.
“이 갑주는 처음부터 우리 제국의 병사들을 위해 존재해야 할 무기였습니다.”
그 증거로, 중장갑 보병대의 흑색 갑주에 새겨져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밤까마귀의 표식이다.
하나의 강자가 능히 일천을 압도할 수 있다고 일컬어지는 옛 시대. 바로 그 수라의 시대를 헤쳐나가며 그들의 힘을 증명하고, 적들의 시체로 산을 쌓아 올린 악귀들.
이 시대의 사람들로서는, 그곳에 있는 이들의 모습이 그저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으리라.
역사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의 망령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망령 따위가 아니었다.
세월마저 얼어붙을 정도의 절대영도 속에서, 비로소 그 얼음이 녹아내리고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냈을 따름이다.
데일을 비롯해 작센 가의 사람들과, 그들을 보좌하고 있는 휘하의 기사와 마법사들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들 군세가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제9제국을 가로질러 남쪽 끝에 이르기까지, 앞을 가로막는 요새와 귀족들을 굴복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의 남자였으니까.
마도 대제.
머저리 황제와 허울밖에 없는 제국 따위가 아니다. 정말로 그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충성할 가치가 있는 절대자의 제국이 그곳에 있었다.
“다시금, 이곳까지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귀족, 성직자, 도시의 부르주아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지요.”
그리고 의회의 가장 앞쪽에, 그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황제를 위해 제위(帝位)가 놓여 있었다. 흑색의 황금을 벼려서 주조를 마친 옥좌였다.
데일이 흘끗 그곳에 있는 옥좌를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나서, 샬롯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샬롯, 이 자리에 앉아.”
“데일……?”
그럼에도 그 제위에 앉는 것은 데일의 몫이 아니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쉬어줘.”
“그, 그래도……. 달리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사람들을 불러서……”
샬롯이 일순 머뭇거렸으나,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너와 우리의 아이가, 모두의 앞에서 이 자리에 앉아주길 바라.”
“…….”
어느덧 부풀어 있는 배를 쓰다듬으며, 데일이 말했다. 그 말에 샬롯 역시 주저하지 않았다.
흑금의 옥좌 위에 샬롯이 착석했다. 그리고 아내의 곁을 지키며,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사람을 불러 자리를 부탁할까요.”
“그럴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앨런이 덤덤하게 대답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앉으십시오.”
아내 샬롯의 곁에 서서, 흑금의 군주가 말했다. 그 말에 일순 웅성거림이 감돌았다. 정작 황제가 앉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앉아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데일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는 그대들께서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그저 자리에 앉으시기를 바랍니다.”
부드럽게, 그러나 이의를 허락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제야 비로소 의회에 모여 있는 이들이 일제히 착석했다.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고, 정적 속에서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그대들의 충성에 감사드립니다.”
정적 속에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뛰어넘어, 낯설기 그지없는 제국과 귀족들이 그곳에 있었다.
흘끗 고개를 돌렸다.
여느 때처럼 그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작센 가의 사람들이 있었다. 설령 아홉 차례의 제국이 세워지고 스러지는 사이에도, 어김없이 데일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가족들.
거창하게 이 세상을 바꿀 생각 같은 것은 없다. 대신해서 대속해야 할 업도 없다. 그저, 데일이 이곳에서 바라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데일과 그가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세계.
그러나 그것을 위해 앞서, 그의 제국이 필요했다.
그가 바라는 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
“충성의 대가에 따라, 그대들의 지배와 체제는 보장을 받을 것입니다. 아울러 저는 당장 그대들의 앞에 놓여 있는 위협에 대해서도, 마땅히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설마 혁명군을……!”
“황제냐 혁명이냐.”
귀족 하나가 중얼거렸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물음 앞에서, 부디 저를 실망하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의심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황제 폐하!”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 합창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목소리를 높였고,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그대들께서는 기꺼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몇 줌의 흙을 바쳤지요. 직전까지 그대들이 신종(臣從)의 맹세를 바친 황제를 배신하고 말입니다.”
“……!”
그 말에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 말대로다. 어느 의미에서 제9제국의 몰락은 무척 우스꽝스러운 희극에 가까웠다. 고작 남자 하나가 무서워 황제가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제국 북부에서 남부에 이르기까지 귀족들이 차례차례 무릎을 꿇었다. 몇몇 어리석은 이들이 빌헬름 황제를 위해 남자를 가로막으며 맞섰고, 그 결과 벌어진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까닭에.
지평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사자들의 군세를 기억하고 있다. 살과 피와 뼈, 성과 냉병기들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융합되고, 혐오스러운 거신이 솟아나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대 마도 제국의 황제, 흑금의 군주.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 거창하기 그지없는 충성심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공포에 벌벌 떨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조아릴 따름이었다.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절대자 앞에서 굴복하듯.
“아, 그러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싸늘하게 내려앉아 있는 정적 속에서, 데일이 조용히 웃었다.
“공포는 충성을 보장하는 법이지요. 그리고……”
웃고 나서, 덤덤히 말을 이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대들이 저를 배신하는 것보다 공포스럽지는 않으리라 기꺼이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 사실을 증명할 좋은 기회가 찾아왔네요.”
동시에 일대의 공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정적 끝에 데일이 나직이 팔을 뻗었다.
촤아악!
제국의회에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 속에서, 칠흑의 촉수들이 솟아났다. 귀족들 사이에서 경악에 찬 비명과 당혹이 울려 퍼졌으나, 바로 그때였다.
“움직이지 마라!”
헬무트 블랙베어 경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의회에 있는 이들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촉수가 몇 명의 귀족들을 낚아채, 그대로 데일의 앞을 향해 내동댕이쳤다.
“히, 히익!”
“황제 폐, 폐하! 도대체 이것이 무, 무슨 일이십니까!”
바로 그때, 데일의 앞을 가로막고 샬롯이 몸을 일으켰다.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샬롯……?”
“그대들이 혁명군과 내통하며 제 그이와 제국의 동향을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요.”
“……!”
데일의 아내이자 제국의 황비로서, 그 위엄에 걸맞게 샬롯이 말했다.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 무엇도 그림자 군주 앞에서 진실을 숨길 수 없다. 그들을 휘감고 있는 청색의 거미줄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대들이 우리의 제국에 충성하고 있는 이상, 마지막 기회를 드리지요.”
“……!”
“우리는 공포로 그대들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결코 자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진실을 고하고 그대들의 죄를 고해하세요.”
샬롯이 말했다.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 그녀의 곁에 있는 남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마치 데일을 향해 말하듯이. 샬롯의 말에, 데일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말대로다.”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뒤늦게 무릎 꿇고 있는 이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혁명군과의 내통에 대해 낱낱이 고백하기 시작했다. 고백하고 나서,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애걸하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그들의 군주로부터 숨길 수 없음을 비로소 이해했기에.
사방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칠흑의 촉수들이, 당장이라도 그들을 찢어발길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손짓 하나로 족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이 조용히 손을 내젓자, 촉수들이 발밑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샬롯을 바라보았다. 절대영도의 세계 속에 잠들어 있는 것은 샬롯 하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뱃속에 깃들어 있는, 약동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생명이 느껴졌다.
머지않아 태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는 데일과 샬롯의 아이가.
“고마워, 데일.”
샬롯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말에 데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미소 짓고 나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마땅히 지배해야 할 제국의 이들을 향해서.
방금까지의 미소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표정으로.
* * *
그날 밤, 작센 황성의 침실.
“자비로운 제국이라…….”
침대에 걸터앉아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더 이상 과거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들조차 그를 겁내고 공포에 떨어야 할 존재가 되어, 모두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그와 그의 사람들, 사랑하는 아내를 향해서.
“더 이상 네가 이 세상을 위해 수행해야 할 의무나 희생 같은 것은 없어, 데일.”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아이가 지배하게 될 세상이야.”
“나도 우리의 아이도, 아버지가 마신(魔神)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 아버님과 어머님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샬롯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 흡사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데일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구나.”
“나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너를 두려워하고 경외하길 바라지 않아.”
“…….”
“너는 좋은 사람이야, 데일.”
그러나 이어지는 그 말에, 데일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