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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93화 (293/301)

외전 26화

* * *

세상에서 가장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술래잡기였다.

제국의 황제를 자칭하고 있는 자가, 그의 수도를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오직 하나의 남자에게서 벗어나고자.

“카, 카일로 백작이 놈에게 항복하고 길을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폐하!”

“뭐라고?! 그놈이 감히……”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혁명군과 맞닿고 있는 제국령의 영주들이 속속들이 항복을……”

“감히 이 배신자 놈들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는 패배의 비보(悲報), 하물며 황제가 황도를 버리고 도망치고 있다는 소식이 딱히 희망을 줄 리도 없었다. 처음부터 혁명이 황제를 쓰러뜨리는 것은 시간의 싸움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작 제9제국의 빌헬름 황제를 위협하고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혁명군의 몫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역시 제국처럼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고, 뼈저릴 정도의 대가를 치렀으니까.

남자의 앞에서는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무의미의 신(神)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 일체의 것들을 허무로 되돌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가로막는 자에게는 죽음조차 자비로 느껴질 정도의 고통을, 그리고 무릎 꿇고 몇 줌의 흙을 바치는 용서를.

혁명군조차 함락시키지 못한 파괴요새, 그리고 제국의 황도가 고작 남자 하나의 손에 무너졌다. 나아가 그가 요새와 시체들의 산을 집어삼키며 세운 혐오스러운 거신의 이야기 역시,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역사 속에 사라져야 할 대 마도 제국이 부활했고, 바로 그 제국의 마도 황제이자 흑금의 군주가 다시금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부하 하나 거느리지 않고, 그저 홀로.

처음에는 그저 허황하기 없는 호사가들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그 후 남자의 손에 차례차례 쓰러진 성과 요새들, 헤아릴 수 없는 군세들이 시체의 산을 이루었을 즈음, 제국 내에서 그 말을 헛소리라 웃어넘길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고작 하나의 남자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브란덴부르크의 빌헬름 황제는 필사적으로 남하(南下)를 시작했다.

그때마다 남자 역시 제9제국의 중심을 가로지르며, 그와 황제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영지들을 집어삼켰다.

무릎을 꿇고 몇 줌의 흙과 바침으로써 영주들이 충성을 맹세했고, 그렇게 제9제국의 귀족들이 하나둘씩 흑금의 군주 앞에서 신종(臣從)을 맹세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청색의 나비가 날아올라, 데일이 정복을 마친 영지 곳곳에 청색의 거미줄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놈들!”

얼마 후, 흑금의 군주를 상징하는 혐오스러운 거신이 지평 너머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 이 공작령마저 놈의 손에 빼앗길 경우, 도대체 나의 제국은 어찌 되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뮈어 공작령에 몸을 숨기고 있는 빌헬름 황제가 염치도 없이 소리쳤고, 그 말에 뮈어 공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머저리가 제9제국의 황제를 자처하며 이 나라를 이끌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였다.

대륙 최강의 검, 진홍과 순백의 기사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미하일 경.

그리고 그가 홀로 남아 흑금의 군주와 맞서겠다고 했을 때, 그 결말이 어떻게 끝났을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하늘을 가득 뒤덮는 종말의 버섯구름, 그 열기가 황도를 집어삼켰고 흑금의 군주 역시 그 소멸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었다.

동귀어진(同歸於盡). 제국 제일의 기사라 일컬어지는 미하일 경 최후의 노림수.

그러나 종말의 폭풍조차 남자를 어쩔 수 없었다. 그 후, 세상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제국의 황제라 일컬어지는 자가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고, 남자 하나가 그를 추격했다. 제국의 귀족과 기사들이 그 앞을 가로막고 두 사람 사이에 성과 요새의 장벽을 세워 올렸으나, 남자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 끝에 결국 제국 남부 끝자락에 있는 이곳, 뮈어 공작령까지 도달했다.

이 아래로 도망칠 곳은 없다. 황제의 도망 역시 여기까지고, 흑금의 군주가 머지않아 그의 영지를 집어삼키기 위해 다가올 것이다.

저 남자 앞에서는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혁명군이 자랑하는 최신 갑주나 제국 제일의 기사, 설령 세상의 끝에 다가올 종말의 폭풍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 뮈어 공작! 당장 놈에게 맞서 병력을 소집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고!”

빌헬름 황제가 소리쳤고, 뮈어 공작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그리 웃기냐!”

“대책이라고 하셨습니까.”

웃고 나서 뮈어 공작이 되물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뭐라고……?”

“뮈어 공, 폐하 앞에서 그것이 무슨 말버릇이냐!”

일순, 그 말에 황제를 호위하고 있는 로얄 가드들이 그들의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그들이 칼을 뽑을 틈조차 없었다. 그것보다 뮈어 공작의 기사들이 더 빨랐으니까.

검이 휘둘러졌고, 피가 흩뿌려졌다.

“빌헬름 폐하, 아마 이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도 그대보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황제는 없을 겁니다.”

“네, 네놈이 감히 배신을……!”

칼과 칼이 맞부딪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화살들이 내리꽂혔다. 푹! 황제를 지켜야 할 금빛 갑주 차림의 기사들을 향해 화살이 내리꽂혔다. 갑주의 이음새, 투구의 틈새, 곳곳에 화살이 내리꽂혔고 피가 흩뿌려졌다.

“이대로 황제를 구속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뮈어 공작……! 감히 제국을 배신하고 네놈의 황제를 배신하려는 것이냐!”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빌헬름이 소리쳤고, 뮈어 공작이 되물었다.

“제 영지의 사람들을 긁어모아 보병대를 꾸리고, 기사들을 소집하고, 대포라도 쏘아서 저 존재와 맞서 싸우란 겁니까?”

거기까지 묻고 나서, 뮈어 공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동시에 그의 가슴 깊이서 꿈틀거리고 있는 공포를 뒤로하고.

“도대체 무엇이 저 존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천혜의 요새와 대포들? 수천의 기병대? 머스킷과 흑색 화약? 그것들이 정녕 존재 앞에서 의미를 지닐 것 같습니까?”

“뮈, 뮈어 공작……!”

“흑금의 군주? 마도 황제? 고대의 괴물? 무엇으로 우리가 저 존재를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깟 말로 정녕 우리가 저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럴 리가요.”

뮈어 공작이 되물었다.

“아직도 그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으십니까?”

“무, 무엇이 말이냐!”

“저것은…… 마신(魔神)입니다.”

뮈어 공작이 대답했다.

“저 존재가 보기에 우리는 그야말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는 벌레에 불과할 테지요. 폐하께서 아무리 저 존재 앞에서 발버둥을 쳐봐야, 결국 개미 새끼의 발악에 지나지 않습니다.”

“네놈이 감히……!”

“보십시오, 폐하. 같은 개미 하나 어쩌지 못하는 당신이, 무슨 수로 저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셈입니까?”

그렇게 말하며 뮈어 공작이 차갑게 조소했다.

* * *

뮈어 공작령을 향해 밤까마귀 로브 차림의 남자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영지를 향해 첫걸음을 들이기 무섭게, 일군의 무리가 남자를 맞아주었다.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들과 몇 없는 마법사, 그 외에도 공작령의 가신 귀족들이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아가 그들의 앞에서, 화려하게 자수를 수놓은 벨벳 코트 차림의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뮈어 공작, 삼가 우리들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 행위에 휘하의 사람들이 숨을 삼켰으나, 당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설령 제국에서 가장 강대하다 일컬어지는 세력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 무엇도 저 존재 앞에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것이 폐하에게 바치는 제 충성의 증표입니다.”

무릎을 꿇고, 그대로 뮈어 공작이 손짓했다. 몇 명의 기사들이 제9제국의 황제라 일컬어지는 빌헬름을 포박하고 남자의 앞에 내동댕이쳤다.

“이, 이것 놓아라! 이 빌어먹을 배신자 놈들……!”

“…….”

“감히 나, 위대하신 성검사의 후손이자 브란덴부르크 가(家)의 빌헬름을 이렇게 취급하고도 네놈들이……”

빌헬름 황제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고, 밤까마귀 로브 차림의 남자가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빌헬름의 목소리가 그대로 정지했다.

후드 밑으로 드리워져 있는 어둠이, 말없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소름과 냉기가 일대에 내려앉았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냉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알몸으로 겨울의 밤바다에 내팽개쳐진 것처럼.

빌헬름 황제, 나아가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는 뮈어 공작 가의 이들 모두 예외가 아니었다. 딱히 대기의 기온이 내려가거나 진짜 냉기가 흩뿌려지는 게 아니었다.

“위대하신 성검사의 후손이라. 참으로 그립구나.”

침묵 끝에 밤까마귀 로브 차림의 남자, 데일이 차갑게 조소했다. 이제는 그 이름마저 과거의 즐거운 추억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일찍이 그의 가슴팍을 찢고 튀어나와 있는 칼날의 감촉도, 증오도, 복수의 감정조차 희미하다.

“설마하니 브란덴부르크 가(家)가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제위에 앉게 되었을 줄이야. 조상들이 무척 흡족하게 여기시겠구나.”

“…….”

“황금의 혈통을 지니고, 그림자의 군주를 자처하고 있으니…… 어느 의미에서는 흑금의 군주라 불러도 과장이 아니겠지.”

그 말을 빌헬름 황제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데일 역시 그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뮈어 공작, 그대의 충성은 보상받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동시에 남자의 등 뒤에서 청색의 나비들이 날아올라, 그대로 뮈어 공작의 곁으로 날갯짓을 했다.

청색의 거미줄이 그의 육체에 휘감겼다.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 일체의 정보를 감시하며 데일의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체제의 토대. 그게 바로 청색의 거미줄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대의 가신들 역시, 내 앞에서 마땅히 무릎과 흙을 바쳐야 할 것이다.”

“명령에 받들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뮈어 공작이 재차 손짓을 했다.

철컹!

일대에 늘어서 있는 기사들, 귀족들, 일개 병사들까지 예외 없이 그들의 무릎을 꿇었다.

북쪽의 끝에서 시작해, 남쪽의 끝에 이르기까지. 제9제국을 가로지르는 데일의 여정 역시 거기서 끝을 맺었다. 그대로 사로잡혀 있는 제국의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새롭게 설 제국에, 옛 제국의 황제가 살아 있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

“히, 히익!”

그 말에 방금까지의 위세를 잃고 빌헬름 전(前) 황제가 숨을 삼켰다.

“그러나 옛정을 생각해, 자비를 베풀어주겠다.”

“옛정……?”

데일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일찍이 그와 헤아릴 수 없이 맞섰고 패배했으며, 나아가 그의 손으로 쓰러뜨린 브란덴부르크 가의 옛 가주들을 떠올리며.

“너에게 성과 영지를 하사할 것이다.”

“그, 그것이 정말입니까……?!”

뜻밖의 말에 빌헬름 황제가 숨을 삼켰다. 그로서는 결코 데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곳에서 네가 남아 있는 여생을 부족함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기꺼이 자비를 베풀어주마.”

“……!”

“그렇기에 이것이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다.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그 말을 듣자마자 빌헬름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사, 삼가 새 제국의 폐하를 뵙사옵니다!”

남자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의 자비에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그 역시, 아무리 어리석다 해도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으므로.

일찍이 ‘검은 공자’ 시절, 비참하기 짝이 없는 패배와 고통을 겪은 브란덴부르크 가의 옛 가주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겪었을 뼈저린 고통의 응보(應報)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듭하며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조상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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