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5화
* * *
오로지 데일을 쓰러뜨리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가능성의 결정체. 그것이 바로 미하일 유리스였고, 그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태고의 어둠 그 자체였다.
복수를 위해 궁극의 생물로서 가진 합리성마저 포기하고, 인간의 어리석음과 불합리를 택했다.
칠흑처럼 검고 어둡게 물들어 있는 미하일의 검, 샛별이 휘둘러졌다.
카앙!
휘둘러지는 샛별에 맞서, 무의미의 신이 ‘절망’을 휘둘렀다.
그의 앞에 있는 존재는 어느덧 미하일 랭커스터나 유리스도 아니었고, 악마조차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가능성의 덩어리 그 자체였다.
태초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를 지배하는 자, 황금과 그림자의 군주. 인간과 괴물들의 왕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실낱보다 가늘고 덧없는 가능성에 전부를 배팅하고 있는 존재.
그렇기에 미하일의 검이 움직이는 것은 바로 그 가능성의 길이었다.
실낱처럼 가늘고 바늘구멍처럼 작아도, 거기에는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흑금의 군주가 저 존재가 가진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희망에 꿰뚫려 죽을 가능성이.
휘둘러지고 있는 검의 길이 무척이나 예리하고 베일 것처럼 날카롭다. 미하일의 말처럼, 그것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씁쓸해졌다.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벌레를 내려다보고 있는 인간처럼, 그리고 그 인간을 동정하며 내려다보는 신(神)처럼.
인간보다 인간에 가까운 악마가 맞이하게 될 가능성의 종말, 그 형태를 떠올렸다. 절망, 그리고 무의미. 그러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동정심.
“저를 동정하지 마십시오.”
그 마음을 읽은 듯, 미하일 유리스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흑금의 군주, 이것이 개체로서의 당신이 보일 전력이 아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 잘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절망’을 손에 쥐고,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카앙!
휘둘러지는 칠흑의 샛별에, 데일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발밑의 그림자 속에서 어둠의 형상들이 솟아올랐고, 육골의 형태를 이루었다.
어비스 나이트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미하일의 검을 가로막았다.
데일의 발밑을 따라 그림자 망토가 끝없이 확장했고, 어둠의 호수 속에서 《그림자 잠복자》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가시 촉수가 흩뿌려졌고, 데일의 발밑을 따라 종말의 냉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타앙!
냉기가 휘몰아쳤고, 총알의 형태로 일제히 내리꽂혔다. 총알 하나를 피하거나 쳐낼 때마다, 태고의 어둠에 휘감겨 있는 미하일의 초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비스 나이트 하나가 미하일의 샛별에 베여 쓰러질 때마다, 그림자 호수에서 두 기의 어비스 나이트가 솟아올랐다.
“내 피조물조차 어쩌지 못하고 있는 주제에, 정말로 나를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기에 데일이 말했다.
미하일을 휘감고 있는 태고의 어둠을 마주하며, 거기에 깃들어 있는 덧없는 가능성의 형태를 주시하며.
그림자 군주로서 그의 어둠, 나아가 그림자에 비치고 있는 진실들이 엿보였다.
데일을 쓰러뜨릴 가능성이 있었다.
0이, 아니었다.
0의 소수점 아래로 그저,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0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0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고, 소수점 너머로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돌려도 0 이외의 숫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0’과 동시에, 숫자와 수치로 헤아릴 수 없는 미하일 유리스의 발버둥이 겹쳐졌다.
진화의 악마가 레이디 스칼렛의 뱃속에 잉태되었을 때, 그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는 레이디 스칼렛의 손길이 엿보였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 처음으로 인간의 감정을 깨달은 악마의 슬픔이 느껴졌다.
태고의 어둠에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결국 가능성은 가능성에 불과하다.
적어도 지금 저 존재가 마주하는 상대, 데일의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이야기였다.
무의미의 신(神) 앞에서는, 그 어느 가능성이나 희망도 의미를 갖지 못하고 덧없이 흩어질 따름이니까.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데일이 말했다.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미하일이 대답했다. 적어도 그것은 데일이 익히 알고 있는 ‘미하일 랭커스터’였다. 기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미하일이 보여준 뒤틀림의 형태, 광신(狂信)의 형태 역시도 닮아 있었다.
“아니,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데일 역시 이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어째서 너에게 가능성이 0이 아니며, 덧없을 정도의 공백 속에 소수점 하나가 숫자의 형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
“알 수 없지요.”
미하일 유리스가 데일을 쓰러뜨릴 가능성의 형태, 그것은 베일 것처럼 날카롭게 휘둘러지는 검이나 기적 따위가 아니었다.
그림자 군주로서 그 가능성의 진실이 그곳에 형태를 드러냈다. 그렇기에 더더욱 씁쓸할 수밖에 없었따.
“내가 이대로 너에게 저항을 포기하고 심장을 내어줄 가능성이다. 그 이외에, 네가 나를 이길 가능성은 없다.”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0이 아니지. 적어도 미하일 랭커스터와 레이 유리스, 너희가 그들의 가죽을 쓰고 있는 이들이기에 나타나는 가능성에 불과하다.”
“그럼 저에게 심장을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럴 생각은 없다.”
무의미의 신이 말했다.
“이걸로 너의 마지막 가능성이 모두 사라졌다.”
흡사 신의 목소리처럼 위압감으로 가득 차 있는 목소리가, 마력을 머금고 실내에 휘몰아쳤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일체의 의미를 허무로 되돌리고, 실오라기처럼 덧없는 가능성을 부정하며.
후우웅!
미하일 유리스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태초의 어둠이, 덧없이 스러졌다. 어둠이 스러지고 나서는 여명의 갑주와 샛별의 검이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황성 일대를 집어삼키고 있는 그림자 속에서, 바람 앞의 촛불처럼 덧없이 빛을 뿜고 있었다.
촛불을 꺼트리는 것은 손가락을 짓누르는 것처럼 쉬우리라.
“……슈브.”
─ 왜, 오빠?
그렇기에 무심코, 이해할 수 없어졌다. 어느 시점부터 그의 주위에 있는 존재들이 너무나도 하찮고 덧없게 느껴졌기에.
일찍이 불사공 프레데릭이 그러했고 아서 대제가 그러했듯, 옛 제국의 강대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이 그러했듯, 그의 앞에 있는 인간과 인간들이 너무나도 하찮고 덧없는 미물처럼 느껴졌기에.
그것이 정녕, 인간이 인간을 보며 느낄 수 있는 감정일까. 차라리 신이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는 감정에 가깝지 않을까.
“지금의 나를, 정녕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데일 자신도 알 수가 없어졌다. 이것은 정말 인간이 이 세상을 보고 있는 시야일까? 데일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어느덧 천상에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오빠, 그 물음의 의미를 알고 있겠지?
“…….”
슈브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일순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훑었다.
천상의 신조차 내려다볼 수 있는 존재. 신들의 신. 그것이 옛 어둠의 어머니고, 데일의 곁에 있는 소녀의 정체였으니까.
부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부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습게도, 진실을 알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데일이 감정 없는 표정으로 미하일을 주시하며, 슈브에게 물었다.
“그럼 내 앞에 있는 저 존재는, 벌레와 같은 미물(微物)에 불과하나?”
─ 글쎄.
슈브가 즐거운 듯 키득거렸다. 이것은 싸움조차 아니었다. 어느덧 이 홀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는 망령 기사들에게 휩싸여,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존재가 있었다.
저 앞에 있는 존재, 너무나도 덧없는 미물의 발버둥 앞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실체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것이 정녕 인간이 인간을 마주하며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맞나.
저 천상 위에서 인간을 동정하는 신의 감정에 가깝지 않을까.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알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이대로 손가락을 뭉개 촛불을 꺼트릴 수도 있고,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어느 쪽의 결정도 그저 미물을 대하고 있는 신의 전능(全能)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대하고 있는 감정이, 어느덧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검은 공자’ 시절의 자신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높이, 그리고 지금에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높이.
그 까마득할 정도의 차이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미하일 유리스.”
“……!”
“복수를 포기해라.”
데일이 말했다.
“나 역시 너의 죄를 묻지 않고, 레이 유리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 역시 나의 이름으로 보호받게 될 것이다.”
데일의 말에, 미하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웃겨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무엇으로 저에게 죄를 묻겠다는 겁니까?”
“이 세상의 지배자로서.”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미하일을 휘감고 있는 여명의 갑주가, 다시금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생명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DNA의 자가복제.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생명의 기능을 수행할 마음조차 들지 않네요.”
미하일이 씁쓸하게 자조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가고 홀로 남겨진 세상에, 이 끝없는 고독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겁니까?”
“…….”
미하일이 씁쓸하게 말했고, 그 말에 비로소 데일이 숨을 삼켰다.
“남의 일이 아니겠지요, 흑금의 군주시여.”
“나를 용서할 필요는 없다.”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어느덧 저항조차 포기하고, 데일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미하일이 있었다.
덧없는 가능성의 종말을 고하듯, 데일의 손에 들려 있는 칠흑의 검이 휘둘러졌다.
바로 그때, 미하일이 휘감고 있는 여명의 갑주가 또다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이형의 빛에 휩싸이며, 이글거리고 있는 열이 일점(一點)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급작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핵융합의 작용임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
소멸의 빛이 휘몰아쳤고, 핏빛의 화염과 버섯구름이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행위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은, 데일이나 미하일 모두 알고 있었을 테니까.
고작 핵폭발 하나로 흑금의 군주를 어쩔 수는 없으리라.
이 성에서 수행해야 할 일은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아직, 공식적으로 데일은 제9제국의 ‘황제’를 무릎 꿇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데일이 씁쓸하게 고개를 돌렸다. 돌리고 나서, 그저 덤덤하게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잿더미가 내려앉고 있는 종말의 풍경 속에서, 홀로 터벅터벅.
가야 할 곳은 명확했다. 그러나 아무리 명쾌하게 목적지를 알고 있어도, 로브 자락을 흩날리고 있는 데일의 걸음에는 방황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