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90화 (290/301)

외전 23화

* * *

“어머니의 복수.”

미하일의 탈을 쓴 악마가 말했고, 데일이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너에게는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다.”

일찍이 데일이 그러했듯, 그 업보가 돌아오는 것은 무엇 하나 이상하지 않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듯이, 복수의 사슬도 끊어지는 일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따름이니까.

적색과 백색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미하일 랭커스터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되물었다.

“어째서 미하일 랭커스터의 가죽을 쓰고 있지?”

“저는 당신이 제3제국을 무너뜨리기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역사를 보아왔습니다.”

“…….”

“저의 형제가 『피의 책』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듯, 저는 생물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정보를 토대로 저 나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지요.”

미하일 랭커스터가 말했다.

제4제국과 데일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시대의 모두가 사라진 게 아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흐르고 지금 이 자리에 이르러, 다시금 데일의 앞에 과거의 망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이란 역사로부터 무엇 하나 배울 수 없는 존재들이다.”

“아, 유감스럽게도 저는 인간이 아니라서요.”

미하일 랭커스터, 그리고 진화의 악마가 웃었다.

“인간의 역사란 곧 가능성의 역사입니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대지 위에 그들의 씨앗을 꽃피울 가능성, 다가올 종말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울 가능성, 생(生)의 투쟁 그 자체야말로 생명과 인간의 아름다움이지요. 인간들의 왕이자 괴수들의 왕, 당신이 이 대지 위에서 그렇게 했듯이 말입니다.”

“…….”

“그리고 저는 제9제국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역사를 기록하며, 훗날 다가올 복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조용히 숨죽이고 때를 기다리며, 당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생물’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해답을 갈구했습니다.”

미하일 랭커스터가 말했다.

“어째서 제가 미하일의 모습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랬지.”

“이계의 용사는 강했습니다. 그럼에도 오리지널의 당신을 능가할 수 없었지요.”

“…….”

“그렇기에 저는 인간의 역사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가능성의 역사, 미하일 랭커스터는 바로 그 대답입니다.”

일찍이 데일 앞에서 ‘불과 빛의 사도’로서 그가 보여준 힘을 기억하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미하일 랭커스터는 그 시절의 데일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위협적으로 자라날 강적이었다.

“미하일 랭커스터에게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생명의 역사를 통틀어, 그림자 군주에서 흑금의 군주로 거듭나 있는 그대에게 대적할 수 있는 유일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지요.”

그렇기에 일찌감치 그 뿌리를 뽑았다. 그러나 뽑혔어야 할 뿌리가, 이 자리에 다시금 되살아나 있었다.

“다행히, 저의 형제는 그의 존재를 피의 역사 속에 기록하고 있었지요. 그렇기에 미하일의 생명 정보를 기억하고 재구축해, 미하일 랭커스터로 의태(擬態)할 수 있었습니다.”

“레이 유리스의 『피의 책』을 말하고 있나.”

“레이 유리스, 그리고 미하일 랭커스터. 천하의 그대조차 그들이 훗날 최악의 위협으로 성장할 것을 두려워했고, 그들에게는 실제로 가능성이 있었지요. 그렇기에 당신이 주저하지 않고 그들을 쓰러뜨린 겁니다.”

“내가 미숙했을 적의 이야기였지.”

피와 생명의 역사.

“미숙한 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제 이름은 더 이상 미하일 랭커스터가 아닙니다.”

적백의 갑주에 휘감겨 있는 악마가 말했다.

“그럼 뭐지?”

“미하일 유리스, 그것이 저의 이름이지요.”

“레이 유리스와 사이좋은 형제 사이라도 되었나?”

“저는 미하일의 이름을 가지고, 당신의 존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 날부터 이 검을 갈고닦았습니다. 이 아이에게 깃들어 있는 가능성의 끝을 추구하며, 헤아릴 수 없는 영겁의 세월에 걸쳐 수행을 거듭했지요. 당신과 당신의 제국이 절대영도의 얼음 속에 갇혀, 세상과 괴리되어 있는 사이에 말입니다.”

‘미하일 유리스’가 말했다. 그 말에 데일이 차갑게 되물었다.

“……처음부터 제9제국이나 혁명군 따위는 너희들의 구색 맞추기용 꼭두각시에 불과했나.”

“우리 형제는 처음부터, 당신이 깨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자가 아니라, 일찍이 그러했듯 흑금의 군주로 자신을 자각하길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리제와 마주하고, 옛 제국을 되살리도록 도왔나?”

“처음부터 제가 쓰러뜨려야 할 것은 ‘검은 공자’이자 그림자 군주였으며, 나아가 흑금의 군주였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도망친 비겁자가 아니라.”

“…….”

“그리고 제 앞에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검은 공자’이자 작센의 데일이지요. 비로소 이때를 기다렸습니다.”

“……장광설이 길구나.”

그 말을 듣고 나서, 이내 데일이 흥미를 잃은 듯 손을 내저었다.

“무엇 하나 달라질 것은 없다. 지금의 나를 과거의 망령들이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세상의 온갖 의미를 허무로 되돌리듯, 무의미의 신이 말했다.

“말했듯이, 인간이란 가능성의 생물입니다.”

바로 그때, 미하일 유리스의 발밑을 따라 적백의 오러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마법이 죽어가는 시대에 아직도 오러 아바타를 사용할 수 있었나.”

“마법이 죽어가는 시대라고 했습니까?”

그 말에 미하일 유리스가 차갑게 조소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의 마법은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다.”

대기 중의 마나가 옅어지고, 마탑이 색을 잃고, 기사들의 오러 역시 더 이상 과거처럼 찬란하게 빛나지 않는다. 그것이 마법이 죽어가는 이 시대였고, 그렇게 생각했다.

“……!”

불과 빛의 사도로서, 흡사 태양의 코로나를 마주하듯 터무니없는 빛이 폭발했다.

“설마…….”

태양처럼 이 세계에 빛을 밝히고, 태양의 열기에 맞먹는 파괴의 불꽃이 미하일 유리스의 육체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데일의 세계에서조차 감히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터무니없을 정도의 오러.

“하루도 빠짐없이 이 세상의 마나를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고, 제 몸의 오러로 축적하기를 거듭했습니다. 저의 형제가 그랬듯이 말이지요.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제국이 세워졌다 스러지기를 거듭하고 있는 와중에도 말입니다.”

“…….”

“저의 형제, 레이 유리스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온갖 마탑의 색과 마력을 먹어치우고 있는 사이, 저는 세상에 남아 있는 온갖 기사들의 검(劍)과 오러를 먹어치웠지요.”

뱀파이어의 일족, 유리스의 일가가 갖는 끝없는 허기와 갈망이 ‘검’의 형태로 그곳에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아마 레이 유리스 역시, 그 허기와 갈망을 ‘마법’의 형태로 충족시켰으리라.

데일 앞에서 보여준 그 모습,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예감이 적중했다.

“그 사이, 세상 사람들이 멋대로 마법이 죽어가고 있다며 착각하기 시작했지요.”

뱀파이어의 일족을 자처하는 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어둑새벽을 밝히는 여명의 갑주를 휘감고 있었다.

진화의 악마.

생명의 역사를 통틀어 흑금의 군주를 쓰러뜨릴 궁극의 생물을 갈구했고, 비로소 그 형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공자’를 쓰러뜨릴 가능성을 가진 자, 미하일의 육체에 깃들어 그가 도달해야 할 가능성의 끝을 추구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데일이 미숙했을 시절의 ‘검은 공자’가 아니듯, 미하일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불과 빛의 군주, 미하일 유리스.

그에 맞서 흑금의 군주, 황금과 그림자의 군주 데일이 팔을 뻗었다.

달라질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그의 발밑을 따라 칠흑의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그림자의 호수가 펼쳐졌다. 세상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여명의 기사가 있었다. 핏빛처럼 이글거리며, 때때로 순백으로 타오르고 있는 여명의 빛을 흩뿌리며.

칠흑의 촉수들이 쇄도했고, 미하일 유리스가 휘감고 있는 여명의 오러가 어둠을 집어삼켰다.

“호오.”

그 모습에 데일이 비로소 흥미롭게 미소 지었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그와 합(合)을 맞출 수 있는 호적수가 있었다. 그 사실이 데일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불꽃을 지피기 시작했다.

“기약조차 없이, 그대와 맞서 싸우게 될 이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럼 나 역시, 마땅히 여흥에 어울려줘야겠지.”

그렇게 말하며 데일이 차갑게 대답했다.

동시에 그림자의 호수 속에서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는 기사들의 육골이 솟아올랐다.

어비스 나이트.

무저갱의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는 기사들이 일제히 쇄도했고, 데일이 팔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시린 냉기가 휘몰아치며 얼음의 총알들이 흩뿌려졌다.

마지막으로 마법에 수식(修飾)을 투영하며 흩뿌리는 것이 어느 때였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하일 유리스 앞에서 데일은 기꺼이 그의 옛 싸움 방식을 고수했다.

옛 호적수 앞에서 마땅히 차려야 할 예의일까, 그저 찰나에 걸쳐 어울려주는 여흥일까. 데일도 알 수 없었다.

종말의 냉기를 머금고 있는 아이스 볼트가 쏘아졌고, 미하일의 손에 들린 여명의 검이 그것을 받아냈다.

옛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가 아니었다.

“새 검을 손에 넣었나.”

“이 검을 벼리기 위해 참으로 여러 일이 있었지요.”

그리고 미하일이 검의 칼자루를 고쳐 잡고, 칼날을 따라 빛나고 있는 서슬을 과시했다. 그리고 그 검에 깃들어 있는 마법이 결코 보통의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검의 이름이 무엇이지?”

“샛별(Lucifer).”

과거의 망령, 일찍이 데일이 헤아릴 수 없는 강자들과 맞서며 헤쳐온 수라도의 시대. 바로 그 시절의 강자가 다시금 앞에 나타나 있었다.

동시에, 미하일 유리스가 땅을 박찼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여명의 검 ‘샛별’이 휘둘러졌고, 그에 맞서 데일이 태고의 어둠을 흩뿌리며 ‘칠흑의 검’을 생성했다.

“그 검에도 이름이 있습니까?”

“절망.”

데일이 대답했다. 희망의 샛별 앞에서, 그 빛을 부정하듯 덤덤하게.

“나 역시, 가능성에 대해서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옛 어둠의 어머니가 내게 준 어둠이 그 증거지.”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빛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어둠이 있었고, 바로 그 어둠을 빚음으로써 세상이 태어났다.

그렇기에 어둠이야말로 최초의 가능성이다.

인간을 가능성의 생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어둠의 생물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샛별의 검을 쥐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에 맞서 유일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희망의 악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악마에 맞서 인간들의 왕이 칠흑의 검을 고쳐 쥐었다.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태고의 어둠을 휘감으며, 온갖 형태의 의미와 가능성을 부정하는 절망(絶望)의 사도가.

희망의 샛별, 그리고 절망의 검이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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