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88화 (288/301)

외전 21화

* * *

그 무엇도 남자의 앞에서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말 그대로 무의미했다.

싸움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일방적 유린이었다. 그리고 존재 앞에서 개량형 2식 갑주, 옛 제국의 기술, 혁명의 대의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다. 무엇 하나 예외가 아니었다. 혁명, 투쟁, 정의, 대의, 삼라(參羅)의 것들이, 온갖 형태의 ‘의미’들이, 의미의 형태소조차 이루지 못하고 모래성처럼 덧없이 무너졌다.

무의미의 신이 그곳에 있었다.

“괴, 괴, 괴물 놈……!”

그리고 그 존재 앞에서 인간의 발버둥 같은 것은, 말 그대로 정말이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괴물이라고 했나?”

그리고 겁에 질린 채 벌벌 떨고 있는 2식 마도 갑주병들을 향해, 남자가 되물었다.

“히, 히익!”

밤까마귀의 로브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펄럭이며, 망토 끝자락이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촉수로 갈라져 있었다. 일찍이 슈브가 그러했듯, 로브 밑으로 칠흑의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그의 적들을 농락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개미를 가지고 놀듯 잔혹하게,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순수함을 겸비하고, 그림자 망토의 촉수들이 개량형 2식 갑주를 향해 미끄러지듯 휘감겼다.

“참으로 조잡하게도 손을 댔구나.”

애초에 마도 갑주는 혁명군의 병기조차 아니었다. 일찍이 ‘블랙아머 컴퍼니’라 불린 황실 직속의 중장보병들을 위해 제4제국의 마법사들이 벼린 병기였으니까.

대 마도 제국이 쌓아 올린 마도의 정수, 그러나 결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데일이 조롱했다.

“나의 병졸들을 위해 존재하는 무구 따위로, 정녕 나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그저 그림자의 촉수들을 거느리며, 마신이 걸음을 옮겼다.

마도 갑주병들이 촉수에 구속되어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데일이 덤덤히 그들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칠흑의 밤까마귀 로브 밑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림자의 호수와 촉수들을 꿈틀거리며.

“죽어라, 이 괴물 놈……!”

그 와중 촉수에 결박당해 있는 갑주병 하나가,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흑색의 금속에 휘감겨 있는 팔 하나가, 21세기의 기갑 병기처럼 뒤틀리며 총포(銃砲)의 형태를 구축했다.

콰앙!

폭발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폭발 속에서, 데일이 덤덤하게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아무 의미도 없었다.

“무의미하다.”

“괴물, 이, 이 괴물 새끼……!”

그의 바로 코앞으로.

총포를 쏜 갑주병이 경악하며 중얼거렸고, 데일이 다시금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괴물처럼 보이나?”

“네 꼴을 보아라! 그 꼴을 보고도 네놈을 정녕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이지.”

데일의 그림자 촉수들이 스멀스멀 갑주병의 사지와 목덜미를 휘감았다. 동시에 그의 그림자 속에 있는 진실을 엿보았다. 숨기고 싶은 진실조차 아니었다. 혁명의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대학살이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이자 괴물로서, 평생에 걸쳐 의미의 형태를 찾기 위해 세상의 황야를 거닐었다.”

무의미의 신이 말했다.

“묻겠다, 인간들이여. 너희의 혁명에 ‘의미’가 있나? 혁명 끝에 도래할 시대가 너희의 의미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나?”

촤악!

그림자 촉수가 갑주째 병사의 사지를 뜯어냈고, 마지막으로 목덜미를 휘감았다.

그곳에 있는 철기대가 맞이하게 될 결말.

혁명의 대의나 가치조차, 저 무의미의 신이 흩뿌리는 허무의 세례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렇기에 비로소 공포가 내려앉았다.

“일찍이 진정으로 진실과 의미를 찾아 방황하며, 저마다의 답을 손에 넣은 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 속에서 데일이 어느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불사공 프레데릭, 그리고 지금도 작센의 성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 데일에게 그녀의 전부를 넘겨주고 사라진 청색의 아라크네.

나아가 그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데일에게 ‘희생의 덧없음’을 일깨워준 리제.

그들 모두가 저마다의 답을 지니고 있었다.

“나의 시조 불사공께서는, 덧없음 그 자체야말로 우리들의 진리이자 의미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기에 데일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께서는 죽음 앞에서조차 덧없어지지 않는 것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의미라고 말했지.”

지금 데일이 그들의 의미를 부정하듯, 불사공 프레데릭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데일의 말이, 그곳에 있는 철기대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렇기에 데일이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의미’에 대해 나름의 답을 찾았고, 동시에 그 맹목과 집착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지.”

쓴웃음을 짓고 나서 말했다.

“그 여정이, 이제는 너무나도 지긋지긋하구나.”

데일이 팔을 휘저었다. 놀잇감에 흥미를 잃고 질린 아이처럼 덤덤하게.

“황금과 그림자, 황제와 혁명, 너희들이 추구하는 의미가 너무나도 덧없고 하찮아서,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구나.”

무의미의 신이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혁명의 기수들이, 세상의 마지막에 휘감겨올 종말의 냉기에 휩싸이며 스러졌다.

그들이 부르짖는 혁명, 혁명을 위해 필사적으로 투쟁을 거듭하는 그들의 삶, 그 모두가 절대의 무(無) 속으로 덧없이 집어 삼켜졌다.

* * *

제9제국, 혁명군, 황금과 그림자, 이 대지에는 여전히 온갖 형태의 의미들로 가득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에게 있어 그것은 지긋지긋하기 그지없는 역사의 공회전에 불과했다.

인간이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유일의 사실은, 역사로부터 인간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설령 그것이 피와 전쟁으로 쌓아 올린 역사라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데일이 수행해야 할 것은 명백했다.

세상 전부를 손에 넣고, 그와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내려줄 것이다.

세상을 위해 희생하지도 않고,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을 뒤로하고 무엇을 대속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그와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기 위해서.

설령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일지라도 개의치 않고.

* * *

데일이 제9제국의 심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었다.

때때로 그것은 혁명군이기도 했고, 필사적으로 황제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제9제국의 이들이기도 했다. 그들 모두가 저마다의 대의를 갖고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들의 의미를 앗아가는 무의미의 신이 있었다.

“무엇을 위해 내 앞을 가로막았지?”

사방에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병사들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다. 하나의 남자를 상대로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 끝에 남자가 적들의 시체를 가로지르며 덤덤히 되물었다.

“네, 네놈을 황제 폐하가 계시는 곳으로 나아가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대병력을 끌어모았나?”

귀족 하나가 마지막까지 결의를 굳히지 않았고, 데일이 조소했다.

“귀족과 휘하 기사들, 용병과 농노 하나까지 필사적으로 긁어모아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괴, 괴물 놈……!”

“지금부터, 너의 행위가 갖게 될 의미를 말해주겠다.”

그렇게 말하며 데일이 싸늘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발밑에서 칠흑의 어둠이 휘몰아쳤고, 하늘에서 빛이 스러졌다.

직후 그 일이 일어났다.

일대에 널브러져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시체들이, 칠흑의 어둠에 휘감기며 몸을 일으켰다.

“아, 아아, 아……!”

“나에게 병력을 바치기 위해 이들을 끌어모았나? 적어도 너의 행동이 무의미하지는 않았구나.”

지평 너머에서 너머로 이어져 있는 시체들의 산이, 피의 바다가, 저마다 형체를 갖고 몸을 일으켰다.

헤아릴 수 없는 망자와 죽음의 기사들, 혈액으로 이루어져 있는 블러드 골렘, 무수의 불사자들이 그들의 지배자 앞에서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동시에, 망자와 망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듯 그들의 육체가 달라붙었다. 살과 피와 뼈, 망자들의 갑주와 칼날, 온갖 것들이 블랙홀에 휩쓸리듯 이끌리며 달라붙기 시작했다.

혐오스러운 것(Abomination).

이 세상의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불사의 거신이 그곳에 있었다.

무의미의 신 앞에서 감히 결의를 굳히고 맞서 싸운 자의 최후.

귀족이 최후의 발악을 펼쳤고, 결국 거기까지였다.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들었다. 지평 저 너머, 까마득할 정도의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느낄 수 있었다.

일찍이 그가 가진 이름, 그림자 군주를 자처하고 있는 제9제국의 황제를. 그리고 그가 지배하고 있는 제국의 심장을.

* * *

“작센 가에 어서 오세요, 유피 양.”

리제가 미소와 함께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나 유피는 순순히 그녀를 포옹하지 않고, 일순 망설였다.

“어머나, 왜 그러시나요?”

“……죄송해요.”

유피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그녀가 잠시 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보며 리제가 조용히 웃었다.

“유피 양께서는 아무래도,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그, 그렇지 않아요!”

리제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고, 유피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황하실 것 없어요. 이미 유피 양께서는 우리 작센 가의 사람이며, 오라버니께서 지켜야 할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

그리고 이어지는 리제의 말에, 유피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데일 아저씨의 여동생, 리제. 그녀의 모습을 회상할 때마다, 데일의 슬픔으로 가득 찬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데일이 그녀를 보았을 때,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 마주했을 때의 표정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리제가 말하길, 과거의 데일 아저씨는 지금의 유피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데일을 지금의 모습으로 되돌린 것은 어디까지나 여동생 리제의 희생과 계략이었다.

그리고 유피 역시 리제 덕에 데일을 알게 되었고, 그와 함께 비로소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앞에서 느껴지는 이 꺼림칙한 감정은 무엇일까?

마치 거미가 피부 위를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 같은, 불길하기 짝이 없는 감정이었다.

* * *

살과 피와 뼈, 칼과 방패와 갑주가 융합해 있는 ‘혐오스러운 것’이 그곳에 있었다.

쿠웅, 쿵!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지축이 요동쳤고, 병사들이 우왕좌왕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아가 그 앞에서 높게 쌓아 올린 성채나 요새, 성곽이나 대포 역시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감히 그 존재, 혐오스러운 거신의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아니, 가로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거신의 어깨 위에 남자가 올라타 있었다.

밤까마귀 자수를 새겨넣은 흑색의 로브를 흩날리며, 남자가 지평 너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앞을 가로막는 일체의 의미를 허무로 되돌리는 존재.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

아무리 거듭해도 달라지지 않는 역사의 공회전에 종지부를 찍고자,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그림자 군주와 그가 지배하고 있는 제9제국의 심장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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