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87화 (287/301)

외전 20화

* * *

이 땅의 흙과 지배하는 자의 무릎. 데일이 요구하는 것은 무척이나 명쾌했으며, 동시에 그 누구도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발리앙 백작이 무릎을 꿇었고, 그의 기사들이 숨을 삼켰다. 백작령의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그야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복종의 증거를 보였으니까.

“그걸로 됐다.”

밤까마귀 로브의 남자, 흑금의 군주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라.”

“아, 알겠습니다!”

그대로 데일이 팔을 뻗었고, 발리앙 백작이 머뭇거리며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이 백작령 일대를 너에게 일임할 것이며, 나아가 제4제국과 나의 이름 아래 보호받게 될 것이다.”

“여, 영광입니다, 폐하!”

“너의 충성은 마땅히 보답받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잊지 말아라.”

데일이 말했다. 일말의 감정도 없는 싸늘한 목소리로.

“너를 향해 베풀어줄 나의 자비와 비호는, 어디까지나 나와 나의 제국을 향하고 있는 충성의 대가임을.”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발리앙 백작이 재차 고개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그제야 비로소 이 땅의 흙과 무릎을 손에 넣고, 데일이 덤덤히 등을 돌렸다.

정오의 하늘을 뒤덮고 있는 어둠의 장막이 사라졌다. 비로소 세상이 빛을 되찾았고,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백일몽에서 깨어나듯 세상이 제 풍경을 되찾았다.

그럼에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발리앙 백작이 보기에,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공포로 가득 차 있는 절대자.

마신(魔神)이 그곳에 있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무엇 하나 터무니없을 정도로 허황하기 짝이 없는 헛소리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그의 심장과 직감이 부르짖고 있었다. 결코 저 존재 앞에서 거스르지 말라고.

그 무엇도 이 남자를 속일 수 없다. 그렇기에 발리앙 백작이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차, 차,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폐하!”

“무엇이 말이지?”

그렇기에 그조차 알 수 없는 공포 끝에, 발리앙 백작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공포에 덜덜 떨리고 있는 몸을 필사적으로 다잡고.

“부, 부디 저의 불충을 고백하고 추, 충성을 증명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말하라.”

그 말에, 발리앙 백작이 일순 주위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남자 역시 그 사실을 이해하며, 덤덤하게 팔을 내저었다.

“잠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 * *

“혁명군의 밀사가 그대와 접촉했고, 함께 손을 잡아 나의 목을 칠 것이라 했느냐.”

발리앙 백작이 진실을 고했고, 흑금의 군주 데일이 차갑게 조소했다.

“그, 그렇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즉시, 저의 기사들과 혁명군의 마도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철기대가 폐하를……!”

“내 앞에서 진실을 감추지 않고 말해주었구나.”

“소, 송구합니다! 부디 저의 덧없으며 허황하고, 불충하기 그지없는 망상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 말에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

“진실을 말해주었으니, 마땅히 그에 걸맞은 포상을 받을 것이다.”

젓고 나서 데일이 말했다.

“나에게 무엇을 바라느냐?”

그 물음에 발리앙 백작이 일순 숨을 삼켰다. 말 그대로 절대자가 미물 앞에서 자비를 베풀듯, 흑금의 군주가 말하고 있었다.

“너의 충성을 대가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길 바라느냐?”

“제, 제가 어찌 감히……”

“너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발리앙 백작이 무어라 말을 이을 틈도 없이, 데일이 대답했다. 그의 그림자 속에 깃들어 있는 진실을 엿보며.

“혁명군에게 약속대로 신호를 보내, 그들 철기대가 나를 습격하게 하라.”

“예……?”

이어지는 그 말에 발리앙 백작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 말씀이신즉, 제 기사들을 매복시켜 함정을 파시란……”

“그럴 것 없다.”

그러나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들을 내가 있는 곳으로 이끌어라.”

“하, 하오나 상대는 혁명군이 자랑하는 철기대로, 그것도 무려 2식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내가 그들에게 당할 것을 걱정하나?”

데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 정도 수준의 적병들 앞에 덧없이 당할 자를 향해, 너는 무엇 하러 무릎을 꿇고 이 땅의 흙을 바쳤지?”

“소, 송구합니다!”

그 말대로다. 이 남자가 정말로 그가 생각하는 상식 밖의 존재일 경우, 고작 그깟 철기대 따위에 당할 리 없다. 아니, 설령 당했다 쳐도 결국 그것밖에 되지 않는 그릇임을 증명하는 셈이니, 발리앙 백작으로서는 무엇 하나 사양할 것이 없는 제의였다.

* * *

그 시각, 북부의 작센 황성.

“유피 양.”

자신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유피가 고개를 돌렸다. 돌리고 나서, 그대로 숨을 삼켰다.

“아…….”

데일처럼 짙고 어두운 흑발을 가졌으며, 나아가 흑색의 붕대로 두 눈동자를 가린 여성이 있었다.

“오라버니께서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지셨다지요.”

“그, 그럴 리가요! 오히려 저야말로 데일 아저씨에게…… 앗.”

말을 이으려다 말고, 유피가 당황하며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흑발의 여성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즐거운 듯 키득거림을 감추지 않고.

“데일 아저씨라니, 설마 이 세상에 오라버니를 그렇게 부를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네요.”

“죄, 죄송해요.”

“죄송하실 것 없답니다, 유피 양.”

흑발의 여성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작센의 리제라고 해요.”

“아…….”

여전히 이 성에서 보호받고 있는 유피였으나, 아직 데일의 제국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가 데일을 부르고 있는 호칭, 나아가 그 이름을 듣고 그녀의 정체를 헤아리기란 어렵지 않았다.

“데, 데일 폐하의 여동생이셨군요.”

“그렇답니다.”

리제가 즐거운 듯 웃으며 유피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 홀로 남겨지신 데일 오라버니가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것도, 모두 유피 양의 덕이었지요.”

“그럴 리가요!”

“유피 양이 있었기에, 비로소 저의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졌지요. 그러니 저에게 있어, 유피 양의 존재는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답니다.”

“……퍼즐 조각이요?”

그리고 이어지는 리제의 말에, 유피가 짐짓 차갑게 되물었다.

“유피 양께서는 오라버니의 옛 모습을 알고 계시나요?”

“알지 못해요.”

유피가 고개를 저었다.

“궁금하신가요?”

리제가 되물었고, 유피가 잠시 망설였다. 망설임 끝에 고개를 저었다.

“데일 폐하…… 아니, 데일 아저씨가 제 앞에서 보여주신 여러 모습들을 기억하고 있어요.”

“어머나, 그것참 궁금하네요.”

그리고 그녀 나름의 결의를 굳히며, 유피가 말했다.

“데일 아저씨가 저를 구해주셨고, 데일 아저씨께서도 제가 있었기에 구해질 수 있었다며 말씀해주셨죠. 그리고 데일 아저씨가, 이따금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짓고 있는 슬픔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데일의 과거, 그것은 바로 이곳에 있는 옛 제국 그 자체였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렇기에, 유피가 주먹을 쥐고 되물었다.

“어째서…… 데일 아저씨에게 그토록 고통을 주신 거죠?”

그 말에 리제는 결코 화를 내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유피의 모습마저 사랑스러운 듯, 미소 지을 따름이다.

“죄송해요, 유피 양. 저는 결코 오라버니를 괴롭게 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그렇기에 리제가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

유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데일의 옛 모습, 진실과 거짓, 희생의 고통을 거듭하고 있는 과거를 뒤로하고.

“유피 양이 오라버니의 곁을 지켜줘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리제는 웃었다. 어디까지나 오라버니의 행복을 바라는 여동생으로서.

“오라버니의 제국, 그리고 오라버니가 사랑하는 이들의 세계…….”

데일이 사랑하는 사람들. 더 이상 유피는 이 제국의 외부자가 아니었다.

“작센 가의 사람이 되신 것을 환영해요, 유피 양.”

그렇기에, 리제는 미소와 함께 유피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 * *

혁명군의 밀사와 접촉하며 사전에 계획한 대로, 발리앙 백작은 ‘흑금의 군주’가 머무는 성내의 일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개량형 2식 마도 갑주’로 무장을 마친 혁명의 기수, 철기대의 병사들이 움직였다.

그들 역시, 과거 로젠하임 후작령에서 2식 갑주로 무장을 마친 혁명의 동지들이 몰살당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아울러 그 남자의 정체가 바로 지금, 흑금의 군주를 자처하고 있는 존재일 가능성 역시 깊이 염두하고 있다.

아니,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당시 로젠하임 후작령에 있는 혁명군 중 생존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 존재가 펼친 힘을 목격한 제국의 사람들은 있었다. 그리고 제국에 심어둔 혁명의 첩자가 그 말을 엿들었고, 나아가 그 남자가 보여준 터무니없을 정도의 힘에 대해서도 나름의 대비책을 세웠다.

그림자를 이용하며, 거기서 칠흑의 촉수를 세워 올리며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흑마법사.

이 시대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마도의 경지.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혁명의 적에게는 오로지 죽음이 있을 따름이니까.

무너지고 있는 제9제국 자체는 더 이상 혁명의 적이 아니었다. 실제로 혁명군의 승리는 불을 보듯 자명했으며, 무엇도 혁명의 시대정신을 거스를 수 없었다.

흑금의 군주, 그리고 대 마도 제국을 자청하는 역사 속의 망령들이 나타날 때까지는.

그렇기에 그것을 마무리 짓는 것 역시 혁명군의 몫이어야 했다.

따라서 저마다의 사명을 품고, 혁명의 기수들이 움직였다. 그들과 내통하고 있는 발리앙 백작의 말에 따라서, 흑금의 군주가 기거하고 있는 일실을 향해.

“기다리고 있었다.”

칠흑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철기대가 들이닥쳤고,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네놈……!”

“일찍이 발리앙 백작이 기회를 얻었듯이, 너희들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설마 백작 놈이 배신을!”

“걱정하지 마라. 이곳에 있는 것은 오직 나 하나니까.”

남자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수행할 일들을 말해주겠다.”

덤덤하게.

“나는 이대로 홀로 제9제국의 황도로 향해, 그곳에 있는 황제를 내 앞에 무릎 꿇릴 것이다.”

“뭐, 뭐라고?!”

그의 입에서 이어지는 터무니없는 말에, 혁명군이 어이가 없어 숨을 삼켰다.

“그 후, 새로운 시대를 부르짖고 있는 너희 혁명군들을 일소하고, 잔당을 색출해 목을 매달 것이다.”

남자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이 대지에는 오직 나의 제국밖에 남지 않을 것이고, 그러나 그에 앞서…… 너희들 모두에게 동등하게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기회라고?”

“나와 나의 제국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숨과 지위를 부지할 기회.”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남자가 말했다. 그 말에 2식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혁명군 하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놈이 보여준 힘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파악을 끝마쳤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혁명군의 말 앞에서, 남자가 싸늘하게 조소했다.

조소하고 나서, 남자가 말했다.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목소리로.

“그럼 어디 발버둥 쳐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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