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9화
* * *
인간들의 제국.
혁명과 황제가 격돌하고 있는 전장 속에서, 비로소 역사 속 고대의 제국이 그 실체를 드러냈다.
세상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고, 덤덤하게.
흑금의 군주가 제국의 이름을 천명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막시밀 후작을 필두로 결집해 있는 북부 영주들의 기병대를 모조리 일소하고 나서, 일사천리로 그들의 영지를 손에 넣었다.
작센 가가 자랑하는 밤까마귀 기사들과 흑마법사들, 나아가 그들을 이끌며 데일이 나아갈 때마다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에게 있어 고결함이나 수행해야 할 사명, 세상 모두를 위한 대의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자신과 자신의 이들을 위해서.
그렇기에 ‘옛 제국’이 제9제국의 북부로 나아갔을 때, 그들의 성에 들어가 충성을 약속받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혁명과 황제, 그리고 옛 제국.
세 개의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는 대륙에서, 사람들은 또다시 결정을 강요받고 있었다.
* * *
전설 속의 ‘대 마도 제국’이 비로소 침묵을 깨트리고, 남하(南下)를 시작했다.
제4제국을 기준으로 남부, 그리고 제9제국과 혁명군을 기준으로 ‘북부’에 해당하고 있는 어느 귀족의 영지.
바로 그곳을 거점 삼아 주둔하고 있는 밤까마귀 기사들과 흑마법사들이 있었다.
그 숫자를 모두 합쳐도 고작 수백 남짓. 제국이라 부르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겨우 수백 명이라고?!”
“그렇습니다! 기사들과 마법사를 합쳐도 그 숫자가 겨우 수백 남짓이라고……”
“그러나 막시밀 후작과 북부의 중장기병대가 모두 전멸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것도 사실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이더냐! 겨우 수백 남짓의 군세로 천하의 막시밀 후작과 북부 기병대를 몰살시키다니!”
막시밀 후작령과 제9제국의 북부 귀족들이 몰살당했고, 대 마도 제국이 그들의 영토를 손에 넣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숫자를 들었을 때, 중부에서 그들을 저지해야 할 발리앙 백작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수백 명, 겨우 수백 명이다.
천하의 혁명군조차 그들이 자랑하는 정예 부대, 철기병의 숫자는 족히 수천을 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고작 수백 명의 부대를 이끌며, 자기들을 ‘대 마도 제국’이라 자청하며 정녕 제9제국을 굴복시키려는 것일까?
차라리 압도적일 정도의 숫적 우세와 힘의 격차가 있었을 경우, 순순히 항복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 세계에서 줄을 잘못 섰다가 처형대에 목이 걸리는 것은, 특히 이 시기에는 천하의 귀족들조차 절대로 남의 일이 아니다.
그 역시 제9제국이 뿌리부터 썩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황제와 혁명 속에서 모종의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바로 그 상황에서, 또 하나의 황제가 나타나며 새로운 결정을 강요하고 있었다.
발리앙 백작에게 혁명군 측의 밀사(密使)가 비밀스럽게 접촉한 것은 바로 그즈음의 일이었다.
* * *
“북부 영지의 토지대장(土地臺帳)을 고쳐 쓰고, 제9제국과 혁명군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도록 새롭게 병사들을 차출해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밤까마귀 기사의 보고를 듣고 나서,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막시밀 후작성, 이제는 제4제국의 군세가 거점으로 삼고 있는 국경 요새이자 전초 기지.
“이 정도에서 진격을 멈추고, 맞닿아 있는 세력과 협상을 시작할 겁니다. 그 사이, 경들께서는 이 일대 영지의 사람들을 규합하고 그들을 지킬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하십시오. 어쨌거나, 우리의 숫자가 적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제4제국의 황제는 결코 그의 옥좌에 무거운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자가 아니다. 심지어 그가 적진 속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조차, 그를 지켜야 할 기사나 마법사들을 대동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 황제는 그 누구의 지킴을 받아야 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아니, 일찍이 대 마도 제국의 이름으로 불린 제국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말 그대로 흑금의 군주로 거듭나 있는 데일 그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 수행해야 할 일을 맡기고, 데일이 홀로 몸을 일으켰다.
이곳 남부를 넘어, 대륙 중부에서 황제와 혁명이 격돌하고 있는 수라장을 향해서.
진격조차 아니었다. 그저 남자 하나가 말을 타고, 여정을 떠나고 있는 모습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밤까마귀 기사들이나 흑마법사들로서는, 그야말로 제국 그 자체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위압감에 전율해야 했다.
지평 너머를 가득 메우고 있는 죽음의 군세마저 저 남자를 어찌할 수 없으리라. 동시에, 저 남자야말로 바로 그 군세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 * *
제4제국의 전력이 고작 수백 명이란 사실을 듣고 고뇌했다.
그리고 그곳에 ‘제4제국’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것은 수백 명조차 아니었다.
하나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제국의 황제를 자청하며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발리앙 백작으로서는 이 남자가 미쳐버린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홀로 백작령에 모습을 드러냈고,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 앞에서 남자가 말했다.
“제4제국의 황제, 흑금의 군주가 그대들의 영주를 보러 왔다 전해라.”
밤까마귀의 표식을 새겨넣은 로브 차림의 남자였다. 로브 밑으로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가 무척이나 어두웠다.
아마 그곳에 있는 모두가 그 말을 듣고 미치광이의 헛소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백작께서는 미치광이의 헛소리를 들어줄 정도로 한가하시지 않다!”
“썩 물렀거라!”
경비들이 조롱하며 남자를 향해 말했고, 남자가 침묵했다.
“꼭 증거를 보여줘야 믿겠나?”
침묵 끝에 남자가 되물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일순, 하늘의 빛이 스러졌다. 햇빛이 수직으로 쏟아져야 할 정오의 하늘이, 칠흑의 장막에 뒤덮였다.
“백작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어둠 속에서 남자가 말했다. 세상의 빛을 꺼트리고 형용할 수 없는 어둠을 거느리며.
그 존재가 갖는 위압감에, 경비들이 숨을 삼키며 황급히 등을 돌렸다. 그대로 백작을 향해 보고를 올렸고, 비로소 백작성 입구에 하나의 남자가 나타났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 고작 하나!
다시금 그 숫자 앞에서 이성이 갈피를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제국의 백작으로서 그에게는 다수의 기사들과 이 세계에서도 희소하다 일컬어지는 마법사들이 있다. 그렇기에 이것은 해볼 수 있는 싸움이 아닐까? 오히려 제4제국의 황제를 쓰러뜨렸다고 하는 명성이, 황제와 혁명의 사이에서 새 야망의 디딤돌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하나, 아자르 공.”
대 마도 제국의 황제, 결국 그 역시 마법사다. 그렇기에 그가 물어봐야 할 상대는 오직 하나였다. 백작이 직속의 마법사를 불러 물었고, 마법사가 역으로 되물었다.
“……저, 저것이 대체 뭡니까?”
“무엇이 말이지?”
“저, 저 남자…… 저 남자가 뿜어내고 있는 마, 마력……? 아니, 저게 정말 마력이라고? 아니, 아니야…….”
그러나 마법사가 멋대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무엇 앞에서 상식이 무너지고 있는 사람처럼.
“아자르 공, 내 말에 대답하게나!”
“마, 마도 황제? 저 남자가 다루고 있는 힘이 대체 뭐지……? 마력? 어둠? 서클에서 뿜어내고 있는 힘? 아니, 아니야, 아니야…… 어느 것도 아니야, 그럼 뭐지……?”
그 자리에서 횡설수설하고 있는 미치광이가 있었다.
“아자르 공, 헛소리하지 말고 정신 차리게!”
바로 그때, 입구에 서 있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로브 밑의 그림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법사 아자르를 응시했다.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어둠이, 후드 밑에서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 아아……!”
비로소 아자르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그래, 이제야 알았습니다, 폐하!”
“폐, 폐하라고?”
“아니, 아니지요. 저것은 황제조차 아닙니다! 황제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저것은, 저 존재께서는…… 어찌 감히 저 존재를 인간 따위의 존재가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아, 아아, 그렇습니다, 마신(魔神)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자르가 느닷없이, 대리석 바닥을 향해 고개를 처박았다.
“마신이시여! 마신이시여! 저를,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쾅! 쾅! 그의 머리가 깨지고 두개골이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자기 머리를 바닥에 거듭 처박으며 자해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그 기이하기 그지없는 풍경에 발리앙 백작이 숨을 삼켰다. 그러나 마법사 하나의 갑작스러운 기행으로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가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세상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강대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있었고, 그 존재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다.
그렇기에, 그대로 백작이 이끌리듯 걸음을 옮겼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마신을 향해서.
* * *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의 빛을 꺼트리고 어둠을 거느린 채, 남자가 말했다.
발리앙 백작과 그를 섬기는 기사들이 일제히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고, 발리앙 백작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대의 정체를 밝히시오.”
“이미 말하지 않았나.”
남자가 대답했다.
“나에게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고, 그 이름 중 하나를 너희들에게 말했다.”
“마, 마도 황제…….”
마법이 죽어가는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하다 일컬어지는 마법사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정말 사실일까?
또다시 숫자다. 하나, 고작 하나다. 이 시대의 상식에서 하나의 강자는 결코 일천을 압도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이 옳다고 가정할 경우, 저 존재는 일찍이 그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고대의 괴물이다.
하나의 강자가 일백을 압도하며, 나아가 그 강자들조차 홀로 모조리 굴복시킬 정도의 괴물.
그것이 사람들이 전설처럼 떠들어대고 있는 흑금의 군주이자 마도 황제의 힘이었고, 저 남자는 바로 그 이름을 자청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무, 무엇을 바라고 있소?”
백작의 물음에,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뜻밖의 행동에 당황했으나 그것은 결코 굴종의 표식이 아니었다.
그대로 바닥에 있는 흙을 몇 줌 쥐어, 몸을 일으켰다.
“조금의 흙.”
“……!”
“그리고 그대의 무릎.”
남자의 말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줄을 잘못 서는 것으로 천하의 대귀족도 처형대에 목이 걸리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발리앙 백작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결정을 내렸나?”
침묵 끝에 남자가 되물었다.
이성이 소리치고 있었다. 귀족으로서 그가 가진 기사들의 숫자, 나아가 숫자와 이 시대의 상식.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군세조차 거느리지 않고 홀로 서 있는 저 남자 앞에서 무릎 꿇을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공포가, 그의 무릎을 움직였다.
“이, 이 땅의 흙과 저의 무릎을…… 폐, 폐하의 앞에…… 바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