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7화
* * *
제국 북부 기병대의 말발굽이 대지를 짓밟고 있었다. 기병들의 손에 들려 있는 창날이 농노들을 향해 내리꽂혔고, 쓰러진 농노 위를 중장기병의 전투마들이 가차 없이 짓밟고 지나갔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짓이겨졌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감히 폐하와 제국을 거스르고 도망친 자들의 최후를 알게 해줘라!”
기병대를 이끌며, 북부 귀족 세력의 수장을 겸하고 있는 막시밀 후작이 소리쳤다. 중앙 정부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어영부영하고 있는 이 사태를, 그의 손으로 직접 마무리 짓기 위해서.
일찍이 북부에서 혁명군의 주력 부대를 괴멸시켰고, 제국의 기둥을 자처하고 있는 막시밀 후작이다. 그렇기에 중앙 정부가 지레 겁을 먹고 있는 저 북부의 세력들 따위를 겁낼 그가 아니었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렇게 빌겠습니다! 요, 용서를!”
“황제, 오로지 황제 폐하를 섬기겠습니다! 다시 제국 앞에서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애초에 그것은 전투조차 아니었다. 학살이었고, 마땅히 보여줘야 할 모범에 불과했다.
일찍이 ‘제4제국’이 솟아났다는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이끌려, 그들의 영지를 버리고 도망친 농노들. 그들 앞에서 막시밀 후작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곳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농노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바라보며.
* * *
“…….”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펼쳐져 있는 풍경을 보고,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십자가에 농노들의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바닥에 꽂혀 있는 창에, 잘린 목이 꽂혀 있었다. 집이 불타고 밭이 엉망으로 짓밟혔으며, 피와 불길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데일이 지배하고 있는 북부의 끝자락, 주위 상황을 둘러보고 나서 밤까마귀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마을 전체를 둘러보았으나, 살아 있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명령하신 대로 나머지 일대에서, 밭을 경작하고 있는 탈주 농노들을 성으로 대피시켰습니다.”
“……그렇습니까, 잘 해주었습니다.”
기사의 보고를 듣고,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농노의 가족, 어린 소녀의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무심코 유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맞이해야 할 결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참으로 지옥 같았고, 앞으로도 지옥 같을 세상이었다.
그 사실이 데일의 가슴에 알 수 없는 공백을 새겨넣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당장이라도 밤까마귀 기사들을 꾸려 저들의 목을 폐하 앞에 대령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밤까마귀 기사의 말에,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 홀로, 그들과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예……?”
“직접 저들 제국 북부의 영지로 향해서, 그들의 수장과 직접 이야기를 할 예정입니다.”
북부에서 도망쳤고, 그들에게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내어주었다. 그게 다였다. 달리 그들을 지키기 위해 병사들을 세우지도 않았고 조처를 하지도 않았다.
지켜야 할 땅이나 사람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적어도 데일로서는, 황제의 사절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경고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데일의 경고를 이해했다고 믿었다.
너무나도…… 무르게 생각했다.
생각하고 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세계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 같은 것은 없었다. 이 세계의 이방자로서, 생각하는 것은 결코 데일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랬어야 했다.
“돌아가서, 리제에게 제 말을 전하십시오. 이 땅에 수용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를 헤아리고, 다시금 밭과 경작지를 나누어 그대들 밤까마귀 기사들에게 하사할 수 있도록 토지대장을 작성해 달라고.”
일찍이 황제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보좌로서, 그를 보필하고 있는 청색 마탑주.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의미와 무게를 헤아리며, 밤까마귀 기사가 황급기 고개를 숙였다.
지금, 데일이 그녀에게 말해준 것은 이 대지의 지배자가 되기를 천명(闡明)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데일이 흑색의 말 위에 올라탔다.
기사가 그의 성을 향해 되돌아갔고, 데일 역시 말의 고삐를 당기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데일의 땅, 그리고 도망치는 농노들을 감시하기 위해 세워 올린 제국의 북부 초소. 바로 그 초소의 경비병들이, 흑색의 말을 타고 있는 남자 앞에서 소리를 높였다.
“멈춰서 정체를 밝혀라!”
“이 영지를 지배하고 있는 자가 누구지?”
“이곳은 제국 북부의 지배자, 막시밀 후작께서 지배하시는……!”
남자가 물었고, 병사가 대답했다. 바로 그때였다.
남자의 발밑에서 흑색의 촉수가 솟아나, 병사 하나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컥, 커헉……!”
“막시밀 후작이 그의 기병대를 꾸렸다고 들었다. 그들이 나의 대지를 약탈하고 나서, 어디로 향했지?”
“그, 그게 대체……!”
질식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병사가 말을 웅얼거렸고, 그때 촉수가 비로소 그의 목을 놓아주었다. 필사적으로 호흡을 거듭하며 병사 하나가 소리쳤다.
막시밀 후작과 북부 영주들은 그것을 그저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며 웃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대 마도 제국과 흑금의 군주가 정말로 되살아났고, 머지않아 이 대륙을 휩쓸 것이라 공포에 떨고 있는 자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저, 저희는 그저 일개 병졸에 불과합니다! 후, 후작님과 기병대에 대해서는 정말로 무엇 하나 알지 못합니다……!”
“…….”
병사가 필사적으로 애걸했고, 데일이 차갑게 침묵했다.
바로 그때였다.
청색의 나비들이, 날아올랐다.
─ 또다시 가야 할 길을 잃고 방황하시나요?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제.”
─ 청색의 새와 쥐들이 마침, 오라버니께서 찾는 것에 대해 속삭임을 물어왔답니다.
“어디로 가야 하지?”
─ 다시 이 세상을 위해, 기약 없는 여정을 시작하실 생각이신가요?
청색의 나비가 되물었다. 그 물음에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나의 작센의 땅이었다.”
젓고 나서 데일이 말했다.
“그 땅에 있는 이상 마땅히 내가 지켜야 할 것이고, 지켜야 할 사람들이었지. 그것은 내 책임이다.”
─ …….
청색의 나비가 침묵했고, 침묵 끝에 데일이 찾고 있는 이들의 행방을 대답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데일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일 이유조차 없었다.
지켜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며 그의 땅이었고, 대속해야 할 것은 이 세계와 인간 전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의 사람들에 불과했으니까.
* * *
데일의 대지, 일찍이 북부의 벽지 위로 당당하게 제9제국 기병대의 막사가 세워져 있었다. 막시밀 후작 아래 농노들의 이탈을 뿌리 뽑고, 모범을 보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북부 영주들의 기병대였다.
그들에게 있어 대 마도 제국의 부활 같은 것은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황제의 사절들, 나아가 혁명군 하나 어쩌지 못하고 빌빌대고 있는 제국의 모습이 막시밀 후작으로서는 무척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가슴속에서 또 하나의 야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에게 충성하고 있는 세력들, 나아가 빠르게 와해되고 있는 제국의 실체, 황제와 혁명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이 상황이야말로 그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임을.
이 북부에서 벌어진 수수께끼의 사태와 ‘무장 세력’의 소요를 종결시키는 것은, 바로 그 위업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막사의 저 너머에서 실루엣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계를 서고 있는 기사가 일순 적습이 아닐까 창날을 고쳐 잡았으나, 아니었다. 하나의 실루엣이다.
‘짐승……?’
로브 차림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정체를 밝혀라!”
그렇기에 기사가 소리쳤다.
“내 정체가 알고 싶나?”
남자가 되물었다.
동시에 그의 일대에서 어둠과 냉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적습, 적습이다!”
기병이 다급히 소리쳤고, 그대로 창날을 내리꽂으려 했다. 그러나 그 창날이 어둠 앞에 덧없이 집어 삼켜졌다. 데일이 아랑곳하지 않고 기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치려 했으나, 그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칠흑의 촉수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 아아……!”
“나에게 너의 죄를 고백하라.”
걸음을 옮기며, 데일이 물었다.
“저,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요! 그, 그저 영주님의 명령에 따라……!”
기사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데일이 흘끗 고개를 내렸다. 기사의 그림자가, 그의 진실을 고하고 있었다.
살려달라며 애걸하고 있는 아버지를 딸이 보고 있는 앞에서 도륙하고, 사람의 가죽을 쓰고 행할 수 없는 일들이 펼쳐졌다.
“어째서 거짓말을 했지?”
그렇기에 데일이 되물었다. 촉수에 두 다리가 붙들려 있는 기사가 필사적으로 애걸했다.
“거, 거짓말이라니요! 아닙니다, 마법사님!”
그리고 그 소요를 듣고, 일대의 기병대가 다급히 무장을 챙기고 몸을 일으켰다. 중장기병부터 시작해서, 신식 병기 머스킷으로 무장하고 있는 총기병까지.
새 시대와 기술,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피와 전쟁이다.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콰직!
기사의 발목을 묶고 있는 촉수가, 그대로 갑주와 발목을 우그러뜨렸다. 자세가 무너져 내렸고, 촉수가 다시금 그의 육체를 휘감았다.
콰직!
철갑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지고, 그 속의 육골이 찌그러지며 내장이 갑주 틈새로 터져 나왔다.
“나의 어머니시여.”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이 별의 ‘진짜 인간’을 몰아내고 괴수들의 터전을 쌓아 올렸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이자, 괴수들의 왕으로서 말이지요. 그리고 지금, 어머니의 아이들이 이 별을 가득 메우고 있지요.”
슈브, 그리고 옛 어둠의 어머니를 향해서.
“어머니의 뜻대로 우주의 끝에서 퍼진 씨앗이 이 땅에 뿌리를 내렸고, 이것이 그 꽃입니다. 정녕 어머니께서 이 풍경을 바라셨습니까?”
옛 어둠의 어머니가 퍼뜨린 씨앗이자 그녀의 자식들.
데일과 그의 종족들, 자신들을 인간이라 지칭하고 있는 그 종족들은 이 별의 지배자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이 별을 지배해야 할 진짜 인간들이 보기에, 그저 추악하기 짝이 없는 괴수에 불과했으리라.
그리고 그 괴수들이 이 별에 뿌리를 내렸고, 승리했다. 그것이 이 결과다.
─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느냐,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야.
옛 어둠의 어머니가 사랑스러운 듯 데일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히, 히익!”
그리고 막시밀 후작과 기병대에게, 그것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촉수들의 군체가 애무하듯 데일의 존재를 휘감았고, 데일이 말없이 그 촉수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아이처럼.
“황금과 그림자, 진실과 거짓, 끝없이 스러지는 제국들. 세상의 일이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일대의 어둠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삶이고, 살아 있는 이상 결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간들의 왕이자 괴수들의 왕으로서, 흑금의 군주가 비로소 그의 진짜 형태를 드러냈다.
다크 영(Dark Young).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추악하고 끔찍하기 그지없는 형태의 존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