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83화 (283/301)

외전 16화

* * *

그로부터 얼마 후, 제국의 사절이 북방의 땅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즈음의 일이었다.

“황제 폐하의 대리자 앞에서 예를 표하라!”

빌헬름 황제의 명에 따라 북부의 대지에 부활했다고 일컬어지는 ‘대 마도 제국’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그리고 마땅히 이 대륙의 지배자로서 그들에게 얻어내야 할 것을 얻어내기 위해.

일찍이 이 대륙에서 가장 강대하다 일컬어졌고, 어느 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제4제국이 부활했다. 그 사실이 사람의 입에서 입을 타고 대륙의 남쪽의 끝자락까지 퍼지는 것은 결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황제와 혁명이 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 마도 제국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모를 리 없으리라.

“제9제국의 위대하신 빌헬름 황제 폐하, 그리고 폐하의 뜻을 대행하는 사절 앞에서 예를 표하라!”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소리쳤다. 절대 그들의 지위를 쉽게 내줄 수 없다며 강경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어서 오시지요.”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는 작센 가의 밤까마귀 기사들과 더불어, 황제의 사절들을 맞이하는 것은 바로 그 남자였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넝마가 아니라, 작센 가의 밤까마귀 자수가 새겨져 있는 로브 차림을 하고서. 제9제국의 사절들 앞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남자가 등을 돌려, 제국의 위용을 상징하는 성채로 걸음을 옮겼다.

북부의 거성, 일찍이 작센 공작의 성이자 제국의 황성으로 거듭나 있는 그 구조물 앞에서, 제9제국의 사절들이 숨을 삼켰다.

“……!”

나아가 그 성에서 위압적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들이 있었다.

광검 헬무트 블랙베어 경과 그의 기사들, 나아가 최고위 밤까마귀 기사들로 이루어져 있는 《그레이브 가드》들. 척 보기에도 그들의 검(劍)에 깃들어 있는 힘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의 말이 정말이라고 가정할 경우, 일찍이 하나의 강자가 일백을 압도하는 수라도를 헤친 강자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로브 속에서 불길하기 그지없는 힘을 품고 있는 마법사들이 있었다. 마탑이 사라지고 색(色)을 잃어버린 시대에 여전히 의심할 여지가 없는 ‘흑색’을 흩뿌리고 있는 마법사들이었다.

일찍이 대 마도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일까.

나아가 남자가 대회당을 가로질러 등을 돌리고,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흑금(黑金)의 옥좌에 걸터앉았다.

흑색의 황금, 일찍이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일컬어지는 흑금의 군주.

그곳에 있는 것은 그들이 다가 아니었다. 일찍이 어둠 속에서 그림자 군주의 명령을 집행하는 이름 없는 암살자들, 데일 직속의 암행 조직 《그레이브 워커》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니까.

마법이 죽어가고 있고, 일기당천의 무용담이 전설 속의 옛이야기가 되어 있는 시대에, 그들이 갖는 존재감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할 것조차 없었다.

그러나 결코 주눅들 수 없다. 그들 역시 제국의 황제, 그림자 군주의 뜻을 대행하며 이곳에 와 있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들의 모욕이 곧 황제의 모욕이며, 그들의 목소리가 곧 황제의 목소리다.

“어느 날, 이 북해(北海)의 바다 위에 그대들의 땅과 성이 솟았다고 들었다.”

제9제국의 사람들이 기억하기에 이곳에 대지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공허하게 출렁이는 바다가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남자, 데일이 물었다. 그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흑금의 옥좌 위에서.

“무엇을 바라십니까?”

“그대들의 정체를 밝혀라!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사절 하나가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라.”

“…….”

“황제 폐하와 제국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라.”

“무릎을 꿇으라 했습니까?”

그 말에, 일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사절들조차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두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물러설 수 없었다. 그의 입이 곧 황제의 입이며, 황제의 입이 그들 앞에서 굴복하는 것은 결코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니까.

“빌헬름 폐하 앞에 신종(臣從)의 맹세를 올리고, 제국과 폐하와 맞서는 어리석음을 택하지 말지어다!”

“저는 누구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그 말에,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하며 대답했다. 사절들이 숨을 삼켰다. 그리고 데일이 되물었다.

“그대들이여, 그대들께서는 제 앞에서 무릎을 꿇으시겠습니까?”

“……!”

동시에 일대에 늘어서 있는 밤까마귀 기사들이, 그들의 칼자루 위로 손을 올렸다. 그 행위로도 형용할 수 없는 살기가 폭발하듯 휘몰아쳤고, 몇몇 사절들이 겁에 질려 무의식적으로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를 대행하는 자로서의 자각을 잊었느냐! 감히 무슨 짓이냐!”

“그, 그러나 루드비히 공! 부, 부디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사절의 수장이 소리쳤으나, 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두 다리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후들거리고 있었다.

“저는 어렵지 않게 그대들의 무릎을 꿇게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흑금의 옥좌 위에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나아가 그대들의 제국과 황제의 무릎을 꿇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겁니다.”

“가, 감히……!”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기꺼이 제가 그 사실을 그대들의 황제 앞에서 증명해야, 제 말을 믿어주시겠습니까?”

동시에 그가 걸치고 있는 밤까마귀의 로브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그림자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대회당의 일대가 어둠에 휩싸였다. 몇몇 사절들은 그야말로 졸도할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주저앉아 필사적으로 무릎 꿇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압도되듯이.

그의 앞에 있는 존재, 그의 힘, 무엇 하나 거짓이 아니었다.

흑금의 군주, 마도 황제, 그 진위조차 불확실해 그저 부풀려진 역사 속의 과장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존재.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북부의 성에 존재하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강자들 모두를 합친 것 이상으로, 저 존재가 갖는 무저갱과 같은 어둠의 힘을.

“이 시대의 사람들이, 저와 저의 제국을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 정말로, 정녕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다고……?”

“여러 이름이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의 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이름입니다.”

바로 그때, 데일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으십시오.”

최후의 경고. 그 말 앞에서 마지막까지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사절들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제9제국의 황제, 바로 그 황제의 대행자로서 경외되고 우러러야 할 존재가 비참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릎을 꿇는 것은 느낌이 썩 좋지 않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을 보며 데일이 조소하듯 말했다.

“그럼에도 그대들께서는 저에게, 저의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 말씀하셨지요. 그토록 저를 불쾌하게 하고 싶으셨습니까?”

“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의 전통에 따라……!”

“이곳에 있는 저와 저의 사람들 역시, 모두 이 이방자에 불과합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저와 저의 사람들에게 그대들의 전통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 감정 없는 목소리에 사절들이 숨을 삼켰다. 형용할 수 없는 시린 공포가 그들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그리고 저의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때, 이 북부의 대지 역시 함께 사라졌지요. 그렇기에 엄밀히 말해서, 이 북부의 대지는 그대들 제9제국이 지배해야 할 영토조차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그러나 그대들이 다스리고 있는 이곳으로, 북부 영주들의 농노들이 하나둘씩 도망치고 있지 않았나!”

데일의 제국이 이 세계에 녹아내렸을 때, 지배해야 할 사람들이나 휘하의 귀족들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일찍이 작센 공작령이라 일컬어진 북부의 대지, 제4제국의 대지마저 모조리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람 없는 영지에, 밭을 일구고 작물을 심어줄 이들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하루를 벌어 먹고살고 있는 이들에게, 너무 가혹하기 그지없는 세금을 물렸더군요. 그들에게 저의 땅을 나누어주고, 조금의 값을 받았을 따름입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참으로 송구하나, 저와 저의 사람들 역시 먹을 식량이 필요합니다. 성의 재물을 팔고, 나아가 비어 있는 영지를 일구어줄 이들이 필요하지요. 마침 사람들이 오기에, 그들을 받아주었을 따름입니다.”

엄밀히 말해 그 행위는 제9제국을 모독하고 제국의 영지를 침략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것도 북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행위가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졌을 때, 제9제국의 체제가 뿌리부터 무너지게 될 것은 너무 명백했으니까.

“그 소식에 하루가 멀다고 제국의 농노 놈들이 이리로 도망치고 있지 않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대륙의 사람 전부를 받을 정도로 이 대지는 넓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이미 그 일 자체는 일어났고, 지금도 진행 중이었다. 그렇기에 데일이 조소했다.

“헤아릴 수 없는 농노들이 ‘혁명군’에 합류하며 봉기를 일으키고 있는 것 역시, 그대들 제국의 과도하기 그지없는 욕심 탓이 아니었습니까.”

나아가 그 이름이 입에 담길 즈음, 사절의 표정이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이 대지에서 몇 방울의 빗방울이 새는 것을 걱정하는 것보다, 당장 엎질러져 있는 물을 수습하시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황제나 혁명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그대들 제국 북부의 영주들이 저희로 입게 될 피해에 대해서는…… 서로가 뜻이 일치하도록 협상을 노력하겠다고 약속드리지요.”

“저, 정말로 혁명군을 위해 싸우지 않을 거라 약속해줄 수 있나?”

“제가 무엇을 위해 그래야 합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제4제국도, 흑금의 군주도, 더 이상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이방자’들이 있을 따름이지요. 그렇기에 저는 이 시대의 다툼이나 의미 없이 거듭되고 있는 전쟁,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 따위에 아무 흥미도 없습니다.”

“저, 정말로 우리 제국의 일에 중립을 지, 지키겠다는 것이냐!”

최후의 최후까지 힘을 짜내, 필사적으로 사절이 그의 위엄을 지키며 되물었다. 후들거리고 있는 두 다리와 다리 사이로 실금하고 있는 추태 속에서.

“중립이라니, 무엇을 착각하고 계시네요.”

데일, 흑금의 군주가 대답했다.

“저는 그대들에게 아무 흥미조차 없습니다. 흥미를 가질 가치조차 없지요. 그러니 부디,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습니다.”

비로소 일말의 감정도 없는 목소리와 함께.

마치 인간이 벌레를 내려다보고, 신(神)이 인간들을 내려다보듯 차가운 표정으로.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구태여 저의 흥미를 살 정도로 어리석은 행위를 거듭하지 마십시오. 그대들께서 규칙을 지켜주실 경우, 우리 역시 기꺼이 그대들을 예의로 대할 것이라 약속드립니다.”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황제의 사절에게 마땅히 대해야 할 응대나 의례조차 없이, 그 길로 사절들이 도망치듯 꽁무니를 뺐다.

그 후, 하루가 멀다고 제9제국의 농노들이 데일의 땅이자 진짜 북부를 향해 도망쳤고, 그곳에 하나둘씩 자리를 잡고 터를 이루기 시작했다.

혁명과 황제 속에서 새롭게 택할 수 있는 제3의 길.

그렇기에 이 이상 농노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모범’을 보이기 위해, 북부 귀족들의 기병대가 출정했다.

도망친 농노들의 터를 습격하고 학살을 자행했고, 북부의 대지가 기병대의 말발굽에 짓밟히며 타올랐다.

데일의 의지와 별개로, 어느덧 그와 그의 제국은 더 이상 세상 바깥의 이방자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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