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82화 (282/301)

외전 15화

* * *

혁명이냐, 황제냐. 황금이냐, 그림자냐.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질서는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세상 모두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혁명이냐, 황제냐.”

황금의 군주, 레이 유리스가 혁명군을 이끌고 있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황금의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옛 제국이 그러했듯, 혁명군 역시 저마다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모여 있는 조직에 불과하니까.

그렇기에 마도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혁명군의 철기대가 물었다.

흑색의 갑주에 밤까마귀 표식을 새겨넣고 있는, 정체불명의 기사들을 향해서.

“우리가 섬기는 것은 오직 하나, 황제 폐하다.”

기사들이 대답했다. 그 말에 혁명군으로서는 망설이지 않았다.

대륙 북부에서 벌어진 정체불명의 사태를 조사할 것. 호사가들은 멋대로 옛 제국이 되살아났니 어쩌니 떠들고 있으나, 세상에 그렇게 허무맹랑한 일이 일어날 리 없다.

필시 모종의 진상이 있을 것이고, 그들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철기대가 흑색 갑주 차림의 기사들을 향해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럼에도 전투가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저 기사들의 검에 휘감기는 흑색의 오러가, 일방적으로 철기대의 갑주를 도륙할 따름이었다.

일찍이 하나의 강자가 일백의 강자들을 도륙하는 시대가 있었다. 바로 그 전란(戰亂)의 시대에, 그들의 주군을 위해 충성을 바친 밤까마귀 기사들.

“작센 가를 위하여.”

혁명과 황제, 어느 쪽도 그들의 진짜 대답이 될 수 없었다.

일찍이 그들이 섬기는 것은 흑색공이라 불린 남자였고, 그의 아들 ‘검은 공자’였으며, 바로 그 작센 가야말로 그들이 진정으로 섬겨야 할 충성의 대상이었으니까.

* * *

공백의 대지 위에 세월을 거슬러 하나의 제국이 솟았다.

그리고 그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자, 나아가 전설 속의 존재에 불과해야 할 흑금의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무엇 하나 일개 시골뜨기 소녀, 유피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유피 양.”

“데, 데일 아저……”

그렇기에 데일이 다시금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무심코 대답하려다 말고 유피가 숨을 삼켰다.

“이 땅에서의 생활은 마음에 드십니까?”

“화, 황송해요, 폐하…….”

그 호칭에 데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개의치 마시고 평소처럼 불러주셔도 됩니다.”

“그, 그래도요! 제가 어찌 감히 폐하를……”

“저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닙니다. 나아가 이 땅에 있는 것들 역시, 더 이상 저의 제국이 아니지요.”

데일이 말했다.

데일과 그의 제국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도, 애써 그 사실로부터 고개를 돌리듯.

여전히 작센 가를 위해 충성하는 기사들이 있었고, 흑색 마탑과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대지에 지배해야 할 백성이나 영지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무리 강대하기 이를 데 없는 힘을 갖고 있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너무 제 앞에서 주눅 드실 필요 없습니다.”

뭐라 말을 이으려다 말고 유피가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 데일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이곳이 유피 양의 무사를 보증할 수 있는 곳이고, 저는 그 약속을 이행할 따름이니까요.”

“데일 아저씨……”

유피가 말을 흐리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무엇이 말입니까?”

“아저씨가 이렇게……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봤어요.”

유피가 말했다. 일찍이 혁명군과 함께 여정에 오를 당시, 그의 로브 밑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처럼 고독하고, 절망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림자였다.

그러나 그가 비로소 이 땅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남자의 그림자가 거두어졌다. 그 사실이, 유피로서는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야말로 유피 양이 웃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데일 역시 웃었다. 일순 유피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나, 아주 잠시였다. 유피 역시 남자와 여정을 함께하며,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을 겪었다. 그날의 물음이 유피의 삶을 빼앗았고, 삶을 빼앗겼다고 믿었다.

“유피 양이 함께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내밀어준 손이, 그녀를 이곳까지 다다르게 했다.

그렇기에 유피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 * *

“황제와 혁명이라.”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일찍이 딸이 세워 올린 겨울의 제국에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깨어나 낯선 세계를 마주하고 있는 남자였다.

“새로운 황금의 군주가 제9제국에 맞서 혁명군을 이끌고 있습니다. 핏빛공의 마도서 『피의 책』을 덧씌우고 있는 유리스 가(家)의 일족이지요.”

“아홉 차례의 제국이 세워지고 스러지기를 거듭해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구나.”

남자, 작센의 앨런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참으로 그 말대로다.

“어떻게 할 것이냐? 데일.”

“…….”

“마음먹을 경우, 너와 이 성에는 그들 위에 군림할 제국을 세울 힘이 있지. 과거의 네가 그러했듯 말이다.”

아버지의 물음에,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많은 것들을 바쳤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를 두려워하는 것조차 마땅히 감내해야 할 희생이라고 믿었지요.”

“감내할 가치가 있는 희생이었느냐?”

“리제가 저에게 그 대답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까.”

데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를 위해서,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리제가 희생을 감내했을 때…… 희생이 주는 고통을 비로소 이해했고, 동시에 제가 사랑하는 이들이 제 희생 앞에서 겪었을 고통을 이해했지요.”

데일이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일방적이기 그지없는 자기애의 발로였다. 리제가 데일을 이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려 했을 때, 비로소 이해했다.

설령 그것이 처음부터 거짓과 모략의 대가, 청색 마탑주로서의 계획이라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리제는 그녀의 어머니를 닮아 지혜로운 아이다.”

“너무나도 지혜로워서 탈이지요.”

데일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제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고,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노쇠해진 그의 아버지를 향해서.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 역시 다행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앨런이 웃었다.

* * *

검이 휘둘러졌다. 곰처럼 무겁고 육중하게 내리꽂히는 작센 가의 대검이었다.

헬무트 블랙베어 경의 검이 휘둘러졌고, 데일이 그의 검을 비껴내듯 피하며 역습을 가했다.

일검(一劍) 끝에 승부가 났다.

“폐하께서 아이였을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리운 이야기네요.”

데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웃었고, 헬무트 경이 말을 이었다.

“그 시절의 데일 공자님과 검을 맞댈 때, 훗날 제 검이 공자님의 발끝에도 닿지 못할 때가 오리라 생각했습니다.”

“과찬입니다.”

데일이 웃었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그곳에는 데일과 작센 가를 위해 충성하는 밤까마귀 기사들이 있었다. 리제가 쌓아 올린 겨울의 제국에서 꿈을 꾸었고, 영겁의 세월 끝에 꿈에서 깨어났다.

그들 역시 당혹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수행해야 할 사명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충성해야 할 작센 가가 있었고, 섬겨야 할 주군이 여정 끝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때였다.

밤까마귀 기사 하나가 데일의 곁으로 다가와, 무엇을 속삭였다.

“폐하, 황령 일대에 ‘혁명군’을 자처하는 이들과 기사들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정중하게 그들이 물러가도록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경고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을 습격했고, 그들 부대와 일전을 치렀다고 합니다.”

“기사들의 희생이 있었습니까?”

“그것이……”

잠시, 기사가 말을 흐렸다.

“그들이 너무나도 약해 빠져서, 도무지 싸움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어이가 없어 숨을 삼켰다.

“일부 기사들이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황성으로 돌아오고 있고, 나머지는 폐하의 명령에 따라 북부 황령을 벗어나 일대 상황의 시찰을 속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듭 말씀드리나, 힘을 과시하거나 이 땅의 사람들을 두렵게 하지 마십시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데일의 명령에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짤막하게 정적이 내려앉았고, 헬무트 경이 다가오며 물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일찍이 그의 아버지가 물었듯, 헬무트 경 역시 같은 것을 묻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고개를 돌리려 해도, 세상이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혁명군이 북부의 땅까지 들어올 정도니, 제9제국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이 땅에 지배해야 할 마을이나 영지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제국의 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작센 가의 강자들이 있을 따름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어깨가 가벼웠다.

“헬무트 경, 그리고 이곳에 있는 경들께서는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

그렇기에 데일이 되물었다.

뜻밖의 물음에 헬무트 경이 숨을 삼켰고,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센 가를 위해 충성을 바친 그대들의 희생과 노고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데일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제국이 태어나고 스러졌음에도, 여전히 이곳에서 저를 위해 충성하고 있지요. 저는 더 이상 그대들의 충성을 강요할 생각이 없습니다.”

“……!”

“그렇기에 작센 가의 수장으로서, 저는 오롯이 그대들의 충성과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행동할 것입니다.”

지금의 데일에게는 더 이상 세상을 위해 짊어져야 할 짐도, 치러야 할 희생도 없었으니까.

* * *

“그게 무슨 말이냐!”

제9제국의 황제, 그림자 군주가 경악하며 소리를 높였다.

“대 마도 제국, 제4제국이라고?! 정말로 그 마도 제국과 마도 황제가 통째로 이 시대에 되살아났다는 것이냐!”

“혁명군에 심어두고 있는 첩자들이 말하길, 의심할 여지가 없는 주지의 사실이란 듯합니다.”

“그럴 리가, 그렇게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 정말로 일어날 리가 있더냐!”

브란덴부르크의 빌헬름이 소리를 높였고, 가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내 제국이, 정녕 짐의 제국에 이것이 무슨 일들이란 말이더냐!”

그림자 군주의 이름을 칭왕하고 있으나, 그에게 진실을 통찰하는 힘은 없었다.

나아가 그의 시조가 ‘브란덴부르크의 필립 백작’이며, 브란덴부르크의 필립이 사실은 황금의 혈통을 가진 아서 대제와 제3제국 황실의 핏줄이었음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은 이제 이름밖에 남지 않은 허울에 불과하며, 설령 그렇다 쳐도 황금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핏줄에 진실이 개입할 여지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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