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81화 (281/301)

외전 14화

* * *

얼어붙은 동토 위로 봄볕의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데일과 리제가 사랑하는 세계가 영겁의 얼음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멈춰 있는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울의 제국이 녹아내리고 나서, 또 하나의 제국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 마도 제국, 어느 날 갑자기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춘 가장 강대한 제국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고, 대륙의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저항하지 못할 힘을 가진 흑금의 군주이자 마도 황제의 제국이.

작센의 황도 앞.

밤까마귀 표식을 새겨넣은 흑색 갑주 차림의 기사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

작센 가를 위해 살아서도 죽어서도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했고, 영겁의 얼음 속에서 그들 역시 깨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넝마에 가까운 로브 차림의 남자를 보자마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철컹!

금속의 갑주가 부딪쳤고, 세로로 검을 내리꽂으며 기사의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남자가 덤덤히 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뒤에서, 소녀가 그 이해할 수 없는 풍경에 압도되어 머뭇머뭇 뒤를 따를 따름이었다.

작센 공작 가, 그리고 이제는 작센 황조(皇朝)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밤까마귀 기사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들이 로브 차림의 남자를 향해 소리를 높였고, 비로소 그 말에 유피가 숨을 삼켰다. 아무리 시골뜨기 소녀라 할지라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유피가 아니었다. 그리고 로젠하임 후작의 말을 떠올렸다.

흑금의 대제, 일찍이 대륙에서 가장 강대하다 일컬어진 마도 황제와 마도 제국.

남자, 데일이 걸음을 멈추었다. 열병식의 끝에서 그를 마주하고 있는, 데일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붕대로 두 눈동자를 가린 소녀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곁을 의지하며.

잊을 수 없는 엘프 마법사도 있었다.

데일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칠흑의 성처녀가 있었고, 작센 가를 위해 충성하는 밤까마귀 기사들의 수장이 있었다.

여자도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검사로 거듭났으며, 나아가 뱃속에 두 사람의 생명을 품고 있는 어머니가.

그들을 향해 데일이 다가섰고, 그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데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긍정해줄 따름이었다.

겨울의 제국이 녹아내리고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데일로서는 알 수 없다. 겨울의 제국이 녹아내리고, 대륙을 가로질러 이 땅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 사이 무엇이 벌어졌고 그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알 수 없다.

그저 그들의 앞으로 다가가, 데일이 고개를 숙였다. 숙이고 나서, 힘없이 몸이 무너져 내렸다.

무릎을 꿇고, 그들 앞에서 데일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목구멍 위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어서 오렴, 데일.”

그때, 어머니 엘레나가 흐느끼고 있는 데일을 감싸주며 말했다. 데일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

바로 그때, 붕대를 감고 있는 그의 여동생이 팔을 뻗었다. 그러자 딸의 곁을 지키는 아버지가, 조심스레 그녀의 팔을 맞잡고 데일의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아버지.”

“어서 오거라, 데일.”

작센의 앨런, 일찍이 흑색공이라 불린 남자가 데일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대로 허공을 향해 더듬거리고 있는 리제를 향해, 데일이 손을 뻗어 마주 잡았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데일의 손을 맞잡고, 리제가 되물었다.

“오라버니? 거기에 계신가요……?”

“그래, 리제. 나야.”

데일이 대답했다. 그 말에 리제가 다시금 데일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곳에 있는 데일의 얼굴을 살피기 위해서.

리제가 쓰고 있는 흑색의 붕대 너머에서, 일찍이 작센의 시조들이 가진 것과 같은 힘은 없었다. 일찍이 그녀가 가진 청색의 힘 역시 사라졌다. 그것이 리제가 치러야 할 대가였고, 리제와 데일이 저마다 함께 나누어야 할 희생의 일부였으니까.

사랑하는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쌓아 올린 제국이 그곳에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무심코, 황금의 군주 레이 유리스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나의 역사는 끝이 났다. 흑금의 제국 역시 마찬가지지. 그러니 적어도, 이 이상 너의 책에 우리가 기록될 일 같은 것은 없겠지.’

데일이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더 이상 데일에게 이 대륙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 같은 것은 없었고, 황금이나 그림자의 대립 같은 것은 알 바조차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 유리스는 되물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될까요?’

이 대륙에는 여전히 황금과 그림자, 황제와 혁명이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일찍이 ‘대 마도 제국’이라 일컬어진 제4제국과 흑금의 군주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데일과 그의 제국 역시, 레이 유리스가 기록하는 『피의 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찍이 세상을 등진 데일이 앞에 혁명군이 들이닥쳤고, 그들이 데일을 세상으로 끄집어냈듯이.

마법이 죽어가는 시대. 바로 그 시대에 일찍이 데일이 그러했듯, 그의 제국 역시 다시금 세상을 마주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제국을 바라보았다.

작센 가가 자랑하는 밤까마귀 기사들, 흑색 마탑의 사령술사들, 그리고 데일이 사랑하는 이들.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로 이름을 떨친 그의 아버지, 작센의 앨런.

신검(神劍) 샬롯과 광검 헬무트 블랙베어 경, 그림자의 검이자 칠흑의 성처녀 오렐리아. 엘프 마법사 세피아.

오히려 깨닫고 나서 데일은 헛웃음을 흘렸다.

* * *

“어이구, 시펄. 좋은 꿈이었는데 뒷맛 참 거지 같구려.”

그 남자 역시 그곳에 있었다. 작센 황성의 일실에서, 책상 위에 두 다리를 걸친 채로.

“좋은 꿈이었나?”

“그걸 말이라고 하쇼?”

살검 마스터 바로가 맥주를 들이켜며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그의 곁에 있는 ‘그림자 성녀’가 말없이 미소 지었다.

“모두가 행복한 꿈을 꾸었어요. 그러나 결국 거짓된 꿈이었죠.”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러나 꿈이란 결국, 깨어나기에 꿈일 수밖에 없는 것이랍니다.”

“…….”

“설령 폐하께서 그 아이의 뜻을 긍정했더라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테지요. 그럼에도 그 꿈을 꾸었기에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깨어나지 않는 꿈을 꿀 수 있는 방법.”

그 말에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고, 그림자 성녀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바로, 나의 기사여.”

“……아가씨?”

“당신도 필시 저와 같은 꿈을 꾸었을 테지요. 저 역시, 이 눈동자를 대가로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푸흡, 컥컥!”

그 말에 마스터 바로가 맥주잔을 그대로 뿜었다.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뒤이어 마스터 바로의 표정이 그답지 않게 붉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를 지켜줘서 고마워요, 바로.”

그림자 성녀가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제 곁을 지켜주실 수 있나요?”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마스터 바로가 고개를 숙였고,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방해자는 이쯤에서 빠지도록 하지.”

이어지는 마스터 바로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데일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두 사람의 깨어나지 않을 꿈을 축복하며. 그리고 데일의 앞에 놓여 있는, 깨어나지 않을 꿈을 향해서.

* * *

“샬롯.”

“데일.”

데일을 보자마자, 샬롯이 미소 지으며 웃었다.

일찍이 데일을 두려워하며 겁내고 있는 샬롯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데일을 이해하고, 긍정하려는 아내가 있었다. 그녀의 뱃속에서 약동하고 있는 생명을 느끼며.

“꿈을 꾸었어.”

“응.”

샬롯의 꿈, 일찍이 겨울의 제국에서 샬롯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데일이 꾸고 있는 꿈이자, 동시에 샬롯이 꾸고 있는 꿈이기도 했다.

‘이 행복이 꿈처럼 부서질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

깨어나지 않는 환상, 행복과 구별될 수 없는 환상 속에서 미소 짓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데일이 조심스레 팔을 뻗어, 샬롯의 뺨을 쓰다듬었다.

“네가 꾼 꿈을 보았어.”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네 꿈이 깨지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

“……네가 두려웠어.”

샬롯이 말했다.

“흑금의 황제가 되어서, 세상을 위해 죄를 대속하는 너와 너의 제국이. 내가 알고 있는 데일이 사라진 것 같았어.”

“모두 내 잘못이었어.”

“그래도 지금 여기에 있는 너는, 내가 알고 있는 데일이야.”

“…….”

그 말에 데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팔을 뻗어 샬롯과 입맞춤을 할 따름이었다.

“절대로 네 행복이 부서지게 놔두지 않을 거야.”

입맞춤 끝에 데일이 말했다. 그 말에, 샬롯이 말없이 흐느꼈다.

* * *

겨울의 제국이 녹아내렸고, 모두가 꿈에서 깨어났다.

“처음부터…….”

거기까지 오고 나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진정으로 리제가 무엇을 바랐는지.

어째서 리제가 쌓아 올린 겨울의 제국 속에, 정작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데일이 홀로 세상에 떨어졌는지.

그렇기에 데일이 물었다.

흑색의 붕대로 눈동자를 휘감고 있는 그의 여동생을. 그러나 지금 데일이 마주하고 있는 리제는, 일찍이 손을 더듬으며 나약함에 떨고 있는 소녀가 아니었다.

일찍이 작센의 시조들이 그러했듯, 텅 비어 있는 칠흑의 동공이 그 너머의 것들을 꿰뚫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니?”

그때, 겨울의 제국 앞에서 리제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데일이 보고 있는 리제의 그림자는 또 하나의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청색 마탑의 교리를 잊으셨나요, 오라버니?”

“…….”

모략과 거짓의 대가.

청색 마탑의 첩자로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결코 첩자란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 규칙은 청색 마탑의 지배자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리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기 자신마저 속였구나.”

“아니에요, 오라버니. 저는 결코 저를 속이지 않았어요.”

흑색의 붕대로 눈동자를 가린 여동생, 청색 마탑주가 말했다.

“저의 진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어요. 그저 저 자신이, 또 하나의 저에 의해 춤추고 있는 꼭두각시임을 깨닫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그러나 오라버니, 그 아이와 저는 결코 별개의 존재가 아니에요.”

리제가 말했다.

“저는 오라버니가 이 세상을 위해 고통받는 것을 바라지 않았어요. 그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 어머니에 그 딸이구나.”

데일이 경이를 감추지 못하며 웃었다.

“오라버니의 제국과 세상은 오라버니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 세상에, 더 이상 오라버니가 대속해야 할 고통 같은 것은 없어요.”

리제가 말했다. 자기가 수행해야 할 사명을 마쳤으니, 이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듯.

“그렇기에 당신이 저를 증오하실지라도, 저는 이걸로 됐어요. 저의 사명을 마쳤으니까요.”

“…….”

리제의 말에 데일이 침묵했다.

침묵 끝에, 조용히 팔을 뻗어 리제를 포옹했다.

“고마워, 리제.”

그리고 그 뜻밖의 말에 리제가 일순 숨을 삼켰다. 청색 마탑주로서 청색의 거미줄을 흩뿌려야 할 거짓과 모략의 대가가, 데일의 포옹 앞에서 말없이 침묵했다.

침묵하고 나서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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