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80화 (280/301)

외전 13화

* * *

“저는 고통스럽지 않아요.”

“그래, 행복하겠지.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처럼 달콤하고 즐거운 일은 없으니까.”

“…….”

“이 세계를 지탱하기 위해, 네 심장이 얼마나 꽁꽁 얼어붙어 있니? 네 뼛속까지 스며들고 있는 냉기가 얼마나 차갑고 싸늘하며 시리니? 아마 이루 말할 수조차 없겠지.”

겨울의 여왕 앞에서 데일이 말했다. 마치 억지를 부리고 있는 아이를 달래듯.

“오라버니가 얼음의 세계에 잠들어 있는 사이, 저는 영겁의 세월에 걸쳐 이 겨울의 제국을 쌓아 올렸어요.”

리제가 대답했다.

“이 세계에 있는 샬롯 양과 두 사람의 아이, 세피아 님, 아버지와 어머니, 무엇 하나 가짜가 아니에요. 오라버니를 위해, 그리고 저와 오라버니가 사랑하는 이들 모두를 위해, 제가 겨울의 제국을 세워 올렸어요. 오라버니께서 홀로 남겨진 세상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신 것들이 이 세계에 있어요.”

리제가 흐느끼듯 소리쳤다.

“이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세상의 끝까지 행복해질 수 있어요. 그것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이에요.”

“……알고 있어.”

“그럼 어째서 이 세계를 거부하시는 거예요?”

“네가 없으니까.”

“저 역시 이곳에 있어요!”

리제가 소리쳤다. 일대에 휘몰아치고 있는 바람이 쩍쩍 얼어붙고, 일체의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냉기가 휘몰아쳤다.

“그래, 리제.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을 돌아보렴.”

데일이 말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꿈의 세계 바깥에서, 영겁의 세월에 걸쳐 고독의 파수꾼을 자처하겠지.”

“저와 오라버니,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깟 추위 따위야 버틸 수 있어요. 이 우주의 끝이 찾아올 때까지도 말이에요.”

“네 희생은 우리를 위하고 있는 희생이 아니야. 오직 너 하나를 위해 짊어지는 희생이지.”

“……그렇지 않아요.”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어, 리제.”

데일이 말했다. 리제가 기억하는 여느 때처럼 다정하고 상냥한 오라버니로서.

“네 희생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때, 이미 무엇 하나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자신이 두렵겠지. 아무 의미도 없이, 영겁의 세월에 걸쳐 종말의 냉기와 추위 속에서 괴로움에 떨어야 할 미래가 너무나 무서울 거야.”

“……!”

데일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리제의 그림자를 헤아리고 있는 그림자 군주로서.

차라리 데일이 이대로 순순히 겨울의 제국에 잠들 경우, 리제로서는 그녀의 희생에 일말의 의미를 찾게 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거짓의 행복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거짓이다.

“세상에 깨어나지 않는 꿈 같은 것은 없어, 리제.”

“…….”

“꿈에서 깨어날 때야.”

데일이 말했다. 그 말에 리제의 가느다란 어깨가 비로소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내 그림자를 똑바로 보렴, 리제.”

그 말에 겨울과 그림자의 여왕이 고개를 돌렸다. 데일의 그림자, 오라버니의 그림자 속에 데일의 진실이 있었다. 그림자 속에 숨기고 있는 진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사랑하는 여동생을 위해 기꺼이 그의 전부를 바칠 수 있다는 결의였다.

“……무엇이 다르죠?”

그렇기에 겨울의 여제가 되물었다.

“이대로 저의 어리석음을 짊어지고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오라버니께서는 또다시 자기를 희생하실 셈이에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럼 그게 지금까지 오라버니의 행동과 뭐가 다르죠? 잘났다는 듯 제 앞에서 그토록 희생을 부정하신 주제에, 결국 오라버니 역시 일방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려 하고 계시잖아요!”

결국 다를 것 없다. 그렇기에 리제가 다시금 결의를 다잡고 소리쳤다. 그럼에도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리제, 오라버니가 약속할게. 전부 돌이킬 수 있어.”

돌이킬 수 있다. 그 말에 일순, 리제의 표정에 동요가 어렸다.

“이 겨울의 제국에서 너를,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되돌릴 수 있어.”

“이미 늦었어요.”

리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둘 중 하나가 희생하지 않는 이상, 제 잘못을 바로잡을 수는 없죠. 그렇기에 저는 더 이상, 오라버니가 이 고통을 짊어지길 바라지 않아요.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조차, 오라버니의 희생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고통보다 나을 테니까요!”

“늦지 않았어. 내 그림자를 봐, 리제. 아직도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니?”

“진실이 꼭 사실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리제가 말했다.

“아무리 오라버니가 진실하게 호소해도, 이미 그녀와의 계약은 되돌릴 수 없어요.”

“무척 괴로웠겠구나.”

동시에 데일을 휘감고 있는 여덟 개의 서클과 그림자 서클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냉기와 어둠 속에서 데일이 말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네 잘못이 아니야.”

일방적으로 남을 헤아리지 않는 자기희생, 일방적 자기애 속에서 리제가 겪었을 고통을 헤아렸다.

“처음부터 이것은 내 잘못이었고, 내가 책임져야 할 속죄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리제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한 데일의 희생이 또다시 그녀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 나랑 게임을 하자. 오빠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한 게임.

─ 나는 그저 궁금할 따름이야. 그 아이와 오빠, 어느 쪽의 ‘진실’이 더더욱 진실할지.

두 명의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두 명 모두 그들의 그림자 속에서, 서로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내기는 끝났어, 슈브.”

데일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 뭐가 끝났다는 거야?

바로 그때, 데일의 곁에서 소녀가 되물었다. 흑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 밑에서 헤아릴 수 없는 촉수들이 꿈틀거렸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진실이 있으니까.”

─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

슈브가 즐거운 듯 키득거렸다.

─ 어서 나에게 ‘진실의 형태’를 보여줘.

“그럼 가져가라.”

데일이 말했다. 일순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고 리제가 숨을 삼켰고, 동시에 슈브의 드레스 자락 밑에서 촉수가 솟아났다.

푸욱!

촉수가 내리꽂혔다. 데일을 향해서. 그리고 리제를 향해서.

어느 하나의 자기희생이 아니었다. 어느 하나의 희생으로는, 옛 어둠의 어머니가 바라는 정답을 줄 수 없으니까.

“……!”

두 그림자 군주가 가진 진실을 헤아리는 눈.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진실을, 거울처럼 마주하고 있는 눈동자.

─ 정답이다, 진실의 아이들아.

옛 어둠의 어머니가 즐거운 듯 광희하며 소리를 높였다.

헤아릴 수 없는 칠흑의 촉수가 꿈틀거리며, 겨울의 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헤아릴 수 없는 억겁의 삶 속에서, 너희 인간이란 어찌도 이리 어리석고 사랑스러운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데일로서는 그 풍경을 볼 수 없었다. 리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앞이……”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앞이…… 어두워요, 오라버니. 어디에, 어디에 있어요?”

아이처럼 흐느끼고 있는 리제의 목소리였다. 그렇기에 데일이 팔을 뻗었다.

“리제, 여기 있어.”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서 두 팔을 뻗어 허우적대며.

이상할 정도로 감각이 어두웠다. 고작 앞이 보이지 않을 따름이었음에도, 오감 전체가 어둠에 휩싸여 미아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고독.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리제의 울음소리였다.

그림자 속에서 데일이 소리를 향해 팔을 뻗었다. 감촉이 느껴졌다. 무척이나 차갑고 싸늘하며, 심장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였다.

데일의 곁에서 리제가 말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겨울의 제국이 무너져 내렸고, 그 속에서 데일이 리제를 포옹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피부 너머로, 희미하게 약동하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 * *

“일어나셨습니까.”

어둠 속에서 의식이 들었고, 빛이 쏟아졌다.

‘빛……?’

느껴질 리 없는 감각에 데일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데일 아저씨!”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유피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눈꺼풀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일순 빛이 시야를 어지럽히고 나서, 비로소 망막에 상이 잡히기 시작했다.

유피, 그리고 혁명군의 수장이자 황금의 군주…… 레이 유리스가 보였다.

“어째서.”

데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게이트 너머의 세계에서, 데일이 바친 것을 기억하고 있기에.

─ 아주 잠시의 유예야.

바로 그때, 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일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 훗날 내가 가져가야 할 것을 가져가기 전까지, 마음껏 세상을 둘러보렴. 진실의 아이야.

소녀였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옛 어둠의 어머니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

그 말을 듣자마자 데일은 주저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해답을 찾으셨습니까?”

레이 유리스가 되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었나?”

“저는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거짓을 알 따름이지요. 그리고 그 세계는…….”

레이 유리스가 말했다.

“헤아릴 수 없는 거짓으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저 그 사실을 알았을 따름이지요.”

“…….”

데일이 침묵했다.

“옛 제국의 기술을 발굴하고 있는 것은, 그 거짓의 세계를 엿보며 손에 넣은 것이었나?”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의미가 없어졌지요. 혁명도, 황금과 그림자도, 제9제국조차 말입니다.”

“그것은 어째서지?”

“흑금의 제국이, 역사의 바다 밑에서 떠올랐으니까요.”

레이 유리스가 말했다. 그 말에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고, 이내 덤덤하게 되물었다.

“그럼 너는 이제부터 어쩔 셈이지?”

“비록 제가 혁명을 이끌고 있으나, 이 혁명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레이 유리스가 말했다.

“일찍이 저의 아버지께서 피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그 역사를 기록했듯, 저 역시 역사의 곁에서 피로써 그것을 기록할 따름이지요.”

“……나의 역사는 끝이 났다. 흑금의 제국 역시 마찬가지지.”

데일이 대답했다.

“그러니 적어도, 이 이상 너의 책에 우리가 기록될 일 같은 것은 없겠지.”

“부디 그러기를 바라겠습니다.”

레이 유리스가 미소 지었고, 데일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될까요?”

등을 돌리고 있는 데일을 향해, 황금의 군주가 되물었다.

“가시죠, 유피 양.”

“어, 어디로요?”

데일의 말에 유피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집으로.”

데일이 대답했다.

* * *

혁명이냐 황제냐. 지금도 끝없이 굴러가고 있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하고, 데일과 유피가 여정길에 올랐다.

세상의 끝자락,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제국의 터를 향해서.

대륙의 북쪽이 가까워질수록, 호사가들의 온갖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끝없이 울려 퍼졌다.

처음 이 세상에서 홀로 깨어났을 때, 그곳에서 공허하게 출렁이고 있는 북해(北海)의 바다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평 너머로 끝없는 어둠을 품고 있는 밤바다가.

그러나 거기에 더 이상 공허하게 출렁이는 바다 같은 것은 없었다.

대지가 있었다.

일찍이 복수를 위해 침묵하며 때를 기다린 이계의 땅, 북부의 벽지.

작센 공작의 영지이자, 흑금의 대제로서 지배하는 옛 제국의 터.

일찍이 데일이 그러했듯, 바로 그 대지의 겨울이 녹아내리고 멈춰 있는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와 소녀가 땅 위로 걸음을 내디뎠고, 차가운 땅 위로 봄볕의 햇살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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