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 * *
게이트 너머로 걸음을 옮기자, 이 세상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색채가 데일을 휘감았다.
옮기고 있는 걸음이 다음 걸음으로 내디뎌졌을 즈음, 세계의 풍경이 일전했다.
잿빛의 겨울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일찍이 엘프들의 왕국에서 이곳 ‘우주의 겨울’에 도달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피가 얼어붙고 폐부가 찢어질 정도의 냉기, 데일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종말의 냉기가 바로 그 증거였다.
그 후 제3제국과의 결전 끝에, 데일은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우주의 겨울과 맞섰다. 이 세상이 얼음으로 끝나리라 말하고 있는 태고의 두려움, 바로 그 종말의 사도에게.
아무리 데일이라 해도 힘으로 맞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겨울은 기꺼이 그의 행동을 멈추고 데일을 보내주었다.
‘결말이 있기에 구제받을 수 있고, 슬프고 괴로운 일들이 끝날 수 있다. 네 존재는 모두의 두려움 속에서 태어나 손가락질받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축복을 받을 존재여야 마땅했지.’
‘너무 시시해서 상대해줄 가치조차 없구나. 흥미가 깨졌다. 꺼져버려라.’
순백의 서리로 이루어진 실루엣이 말했고, 그것이 겨울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리고 지금, 데일이 딛고 있는 곳은 또다시 그 겨울의 세계였다.
피가 얼어붙고 폐부가 얼어붙을 정도의 냉기 속에서 데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 유리스의 말대로, 이곳에 정말 사라진 제4제국의 역사와 해답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저 흑백의 겨울밤 속에서 데일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일말의 주저나 망설임조차 없이, 그저 묵묵히.
이 세계에서는 좀처럼 시간의 흐름을 헤아릴 수가 없다.
얼마를 걸었을까, 며칠일까, 몇 주일까. 배고픔이나 졸림, 생명으로서 마땅히 느껴야 할 이치들마저 얼어붙는 세계에서, 데일의 존재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의식이었다.
여정 끝에, 데일의 의식이 비로소 해답이 있는 곳을 향해 도달했다.
“…….”
심장을 휘감고 있는 슈브의 촉수들이 욱신거리며 날뛰었고, 침묵하고 있는 냉기와 어둠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겨울의 제국이 그곳에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라버니.”
겨울의 여왕이 그곳에 있었다.
데일이 아니라, 그녀의 곁에서 생긋 미소 짓고 있는 옛 어둠의 어머니와 함께.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그들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수 있는 것으로 족했다.
“…….”
아이러니하게도, 겨울의 끝에서 데일의 육신을 덮치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이었다.
뜨겁게 이글거리는 열사의 대지조차 녹일 수 없는, 냉기의 심장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봄이 겨울을 녹이듯 얼어붙어 있는 데일의 육체 곳곳이 따스함에 휘감기며 녹아내렸다.
“……리제.”
목구멍 너머로 뜨거운 무엇이 솟아났다. 아이처럼, 울컥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믿고 있었어요, 오라버니께서는 결국 이곳으로 도달하게 될 것을.”
그러나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리고 나서, 따스함이 데일에게 또 하나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홀로 남겨진 세상에 진지하게 대해야 할 것은 없다고 믿었다. 아니었다. 지금 데일의 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홀로 남겨진 세상이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 것이 그의 앞에 있었다.
“리제, 무엇을 꾸미고 있지?”
그렇기에, 데일이 말했다. 그의 앞에 있는 또 하나의 그림자 군주, 흑금의 대제, 나아가 겨울의 여제를 향해서.
“저는 아무것도 꾸미고 있지 않아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니, 리제.”
“그럼요.”
리제는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오라버니,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세계였어요.”
“…….”
“보세요, 오라버니.”
그렇게 말하며 리제가 등을 돌렸다. 일말의 경계도 없이 순순하게 등을 드러냈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곁을 지키는 옛 어둠의 어머니 역시, 말없이 미소 지으며 등을 돌렸다.
“깨어나지 않는 환상은 행복과 구별될 수 없다.”
등을 돌리며, 리제가 속삭였다.
“행복의 세계에 어서 오세요, 오라버니.”
리제가 속삭였고, 그 말과 동시에 데일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 *
데일이 다시금 몸을 일으켰을 때, 그곳은 무척이나 낯설고 동시에 낯이 익은 곳이었다.
일찍이 제4제국에 군림하고 있는 ‘황제의 침실’이었으니까.
“데일?”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나이트가운 차림의 샬롯이 그의 곁에 누워 있었다. 샬롯이 말없이 팔을 뻗어 데일의 뺨을 쓰다듬었다.
“표정이 좋지 않아. 악몽이라도 꿨어?”
“……행복한 꿈이었어.”
그러나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럼 어째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깨어날 수밖에 없는 꿈이니까.”
데일이 씁쓸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 전체가 유리처럼 깨지고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다. 애초에 이 풍경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그곳에 있는 샬롯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다.
그대로 데일이 몸을 일으켰고, 샬롯이 슬며시 데일을 향해 팔을 뻗었다.
“데일, 느껴져?”
샬롯이 데일의 팔을 잡고 그녀의 배로 이끌었다.
콩닥, 콩닥. 맥박이 느껴졌다. 샬롯의 맥박이었고, 그러나 또 하나의 생명이 그곳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응.”
“우리의 아이야.”
“그렇구나.”
“있잖아, 데일. 나, 정말로 행복해.”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아이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다. 샬롯이 미소 지었고, 데일도 말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 행복이 꿈처럼 부서질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
이어지는 샬롯의 말에, 그녀의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두려움에, 데일로서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 *
데일이 그의 성을 나왔을 때, 지평 너머로 펼쳐진 것은 끝없는 흑백의 겨울밤이었다.
겨울의 제국, 그리고 바로 그 겨울의 제국을 지배하는 여제가 그곳에 있었다.
“리제.”
“어떠세요, 오라버니.”
“무엇이 말이지?”
“행복하지 않으신가요?”
리제가 물었고,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글쎄.”
“우주의 종말이 찾아올 때까지, 이 세계의 행복이 깨질 일은 없어요.”
리제가 말했다. 그녀와 데일이 발을 디디고 있는 이곳, 우주의 겨울 위에서.
“누구도 종말을 막을 수 없지요. 그러나, 종말이 다가올 때까지 행복해질 수는 있어요. 그것이 제가 찾은 답이었죠.”
일찍이 우주의 종말을 막기 위해 발버둥친 황금의 군주와 기수들을 떠올렸다. 리제는 그들처럼 어리석지 않았다.
“그것이 너의 바람이었구나.”
“이 세계에서는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고통받을 일도 없어요.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조차 의미가 없지요. 우주의 끝이 다가올 때까지, 그저 이 행복 속에서 끝없는 꿈을 꿀 수 있어요.”
리제가 말했다.
“달라졌구나, 리제.”
“저는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 말에 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께서 처음 저에게 마법을 가르쳐주신 그날부터,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어요.”
“…….”
“제 마법으로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세상. 비로소 저는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리제의 말처럼, 이대로 깨어나지 않는 꿈속에 파묻혀 행복을 누릴 수도 있으리라.
데일이 침묵했다. 여전히 리제의 곁에서, 옛 어둠의 어머니가 즐거운 듯 데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제, 하나 묻자.”
“말씀하세요, 오라버니.”
“네가 말하고 있는 ‘모두’ 속에는, 너 역시 포함되어 있니?”
“그럼요.”
그 말에 리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제가 사랑하는 오라버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작센 가의 충성스러운 가신들,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들까지, 그들 모두가 깨어나지 않는 꿈속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거짓의 여제가 말했다.
“그것이 ‘저의 행복’이에요.”
“그렇구나.”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웃었다.
“너 역시 나와 같구나, 리제.”
씁쓸하게 웃고 나서 데일이 말했다.
“너는 너 하나의 행복을 위해, 네가 사랑하는 이들 모두를 불행으로 몰아넣고 있어. 내가 그랬듯이 말이지.”
그 말에, 리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데일은 당황하지 않았다.
“때때로 희생의 고통은 행복보다 달콤하지. 그러나 리제, 세상을 위한 내 일방적 희생이, 너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었을지 이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구나.”
“……오라버니.”
“내 희생으로 네가 받았을 고통, 내가 희생의 이기(利己)를 통해 멋대로 자기애에 취해 있을 때, 나와 가까운 이들이 느껴야 할 고통과 공포, 나 역시 그것을 헤아리지 못했어.”
데일이 말했다.
“리제, 지금의 네가 그렇듯이 말이야.”
“…….”
“나에게 행복하냐고 물었지, 리제.”
리제를 향해 데일이 말했다.
“있잖아, 리제. 나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아. 너무나도 불행하고 괴로워.”
“어째, 서…….”
그 말에 리제가 숨을 삼켰다.
“네가 나를 위해 짊어지는 일방적 희생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미쳐버릴 것 같아.”
“……!”
“그리고 일찍이 나의 희생 앞에서, 너 역시 그러한 괴로움과 고통을 느꼈겠지.”
어느덧 데일의 목소리가 아이처럼 흐느끼고 있었다.
그대로 무릎을 꿇고, 데일이 애걸하듯 말을 이었다.
“내 잘못이야, 리제.”
과거의 어리석음을 후회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일찍이 흑금의 대제로서, 그 누구의 이해나 허락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 결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리제가 데일에게 준 고통은 결국 옛 어리석음의 속죄에 불과했다.
“너의 괴로움을, 내 아버지와 어머니, 샬롯, 세피아 님의 괴로움을, 나를 섬기는 기사들의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 어리석음이, 너를 이렇게 이끌었어.”
“…….”
그 말에 리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덧 리제의 곁에 있어야 할 옛 어둠의 어머니가, 데일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 아아, 사랑스러운 인간의 아이야.
어머니조차 아니었다.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속삭였다.
─ 이리도 최후의 최후까지, 이토록 인간으로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니.
“그게 우리의 약속이었으니까.”
슈브의 말에 데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인간(人間), 이제는 그 말에 깃들어 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일찍이 데일은 이 대지의 진짜 인간을 몰살시켰다. 괴수들의 왕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곳에 있는 데일은 인간이었다.
“희생은 어느 누구의 불행도 대속해주지 않아. 오로지 자신의 불행을 대속할 따름이지.”
데일이 말했다.
“나는 흑금의 군주로서 인간들의 고통과 죄를 대속했다고 믿었지. 그러나 처음부터 내 희생을 통해 짊어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 하나의 죄와 고통이었어.”
그 대가로 데일이 사랑하는 이들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았다.
“부탁이야, 리제.”
그렇기에 데일이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였다.
“더 이상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