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78화 (278/301)

외전 11화

* * *

유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저, 남자가 품고 있는 어둠이 너무나도 두려웠고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럽다? 그것은 유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형태였다.

“좋아해요, 데일 아저씨.”

“……유피 양.”

이계의 신들이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촉수들로 인간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비명이 울려 퍼졌고, 뒤이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을 부르짖거나 저주하고, 광기에 찬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울려 퍼지는 소리가 무척이나 덧없고 아스라했다.

하늘 위에서 끔벅거리고 있는 신들의 눈동자조차 개의치 않았다.

세상이 무척이나 고요했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데일의 존재였다.

유피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것이 저 신들의 광기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해, 데일이 그녀의 자아를 지켜주고 있음을.

그러나 동시에, 그 행위가 데일조차 예상하지 못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거짓의 감정이 아니었다. 데일이 그녀의 정신을 감싸고 지켜주는 것은, 그저 방아쇠를 당기는 것에 불과했다.

함께 여정을 거듭하고 있는 사이, 데일을 향해 유피의 마음은 나날이 부풀고 있었으니까.

“이곳은 유피 양의 마음을 고백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닙니다.”

“……죄, 죄송해요! 데일 아저씨, 저는 그냥……”

“그 이상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데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유피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뺨이 붉었다. 비로소 유피는 자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내뱉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덧 찢어진 하늘의 틈새가 메꿔지고, 봉합되었다.

광기의 미사가 끝을 맺었고,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로브 밑으로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가 무척이나 짙고 어두웠다.

혁명군의 시체로 쌓아 올린 산과 피바다, 그 너머에 있는 과거의 장막을 들추러 갈 때였다.

* * *

그것은 일찍이 옛 제국의 제후가 쌓아 올린 도시였다. 데일 역시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유리스 후작성. 그리고 이곳은 일찍이 바로 그 적색의 마탑주가 다스린 영지였다.

지금도 유리스의 일족이 막후에서 혁명군과 함께 투쟁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제국의 지배자들이 아니었다.

데일이 흑금의 군주로서 제3제국과 맞섰고, 황금의 기수들은 모두 패배하거나 무릎을 꿇었다. 유리스 가(家)도 예외가 아니었으리라.

그곳에 있는 유리스 후작성 역시, 제3제국이 멸망할 당시 스러진 폐성(廢城)이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뱀파이어의 고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족했다고 생각하는 그들 뱀파이어 일족은 살아남아, 지금도 피의 유지를 잇고 있다. 그들과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제4제국의 비밀이 엮여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저 더 이상 누구도 데일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하늘을 찢고 신들이 광기의 축제를 벌였고, 그곳에 있는 혁명군의 군대 모두가 몰살당했으니까.

데일이 걸음을 내디뎠고, 그가 걷는 방향의 역으로 겁에 질린 혁명군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데일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고성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낡아 빛이 바래져 있는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일찍이 제국의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지배자, 핏빛공 유리스 후작과 그의 여동생 레이디 스칼렛 남매였다.

“…….”

그 초상화를 보고, 데일이 그대로 입을 열었다.

“저들을 알고 있나?”

“……”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나의 적이었지.”

“설마 당신이…….”

바로 그때, 기척조차 없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피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고, 데일은 덤덤히 초상화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적발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알베르트 유리스, 유리스 일족의 후손이 어느덧 성의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 경고를 듣지 않았지, 어린 뱀파이어야.”

알베르트가 믿을 수 없다며 중얼거렸고, 데일이 말했다.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목소리로.

“네가 남아 있는 일족들의 수장은 아닐 테지. 그리고 혁명군의 수장 역시 아닐 터이다.”

“…….”

“혁명군의 수장, 새 황금의 군주가 이곳에 있나? 너희 혈족의 수장이 황금의 군주이며, 이들 혁명군을 이끌고 있나?”

“……그렇습니다, 흑금의 군주시여.”

알베르트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흑금의 군주……?”

그 말에 유피가 일순 숨을 삼켰다. 일찍이 로젠하임 후작이 말해준 제4제국, 그리고 그 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남자의 이명을 기억하고 있는 까닭에.

대륙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그 누구보다 강하다고 일컬어진 마도 황제.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고 두 힘 모두를 손에 넣고 있는 절대자가, 그의 앞에 있었다.

그렇기에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황금과 그림자의 다툼에 종지부를 찍고, 혁명이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제국의 황제를 자처하고 있는 그 머저리가 무릎 꿇리는 것. 이 남자에게 있어 그것은 일도 아닐 테니까.

“아무래도 좋다. 더 이상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 같은 것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으니.”

그럼에도 침묵 끝에, 데일이 말했다. 폐성 저 너머에 펼쳐져 있는, 헤아릴 수 없는 혁명군의 시체를 뒤로하고.

“이 성에 잠들어 있는 옛 제국의 유산으로 나를 이끌어라.”

데일의 말에 알베르트 유리스가 일순 머뭇거렸다. 그러나 망설임은 잠시였다.

누구도 이 남자의 앞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 * *

알베르트 유리스가 데일을 이끌어준 곳은 성의 가장 깊숙한 곳, 지하에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사슬과 마법, 마법이 스러져가는 이 시대에도 그 입구를 봉하고 있는 마법에는 아주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데일이 팔을 뻗었고, 그의 손에서 휘몰아치는 냉기와 어둠이 아주 덧없이 그것을 깨트렸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듯 마법의 힘이 깃들어 있는 사슬이 부러졌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알베르트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나아가 마법이 지키고 있는 내부로 걸음을 내디뎠다.

차박.

발을 내딛기 무섭게, 발밑에 가득 차오르고 있는 물이 밟혔다. 고개를 내리자, 그것은 피였다.

“꺄악?!”

유피가 비명을 내질렀고, 데일이 말없이 팔을 뻗었다.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유피 양은 이곳에 계십시오.”

“그, 그래도……”

“유피 양을 홀로 두려는 게 아닙니다.”

데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재차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어둠이 휘몰아치듯 솟아나며 사람의 실루엣을 이루었다. 육골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의 실루엣,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어비스 나이트, 일찍이 데일의 시대에서조차 최고위 강령술이라 일컬어지는 고도의 마법이었다.

그 존재가 뿜어내고 있는 힘에 전율하며 알베르트가 숨을 삼켰다. 유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존재가 유피 양을 지켜드릴 겁니다.”

그러나 데일이 말했고, 칠흑의 기사가 유피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검을 세로로 내리꽂았다. 레이디 앞에서 기사의 서약을 올리듯.

그 모습에 유피가 일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이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차박, 차박.

데일이 핏물 위를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이 성이 감추고 있는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를 향해서.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데일이 딛고 있는 핏물이, 파도가 일렁이듯 흐름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데일의 체내에서 흐르고 있는 ‘종말의 냉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심장을 휘감고 있는 슈브의 자취, 칠흑의 촉수로 이루어진 생체 서클이 욱신거렸다.

“…….”

데일이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광휘가 있었다.

결코 이 세상의 색상이 아니었다. 수정색이라고 생각하자 비취색으로 바뀌고, 비취색이라 생각하자 보랏빛을 머금었으며, 자색이라고 생각하지 비취색이 되었다.

“게이트…….”

그 광휘를 데일 역시 알고 있었다.

“증오에 대해 알고 있는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얼음도 불 못지않게 능히 세상을 파멸시키리라고.”

광휘의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보게 될 이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검은 공자.”

이제는 까마득할 정도의 옛 호칭, 그 호칭을 입에 담으며 실루엣이 웃었다. 그 모습 앞에서는 천하의 데일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알베르트 유리스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레이 유리스?”

“저를 기억하고 계셨네요.”

“어떻게 살아 있지?”

“무엇이 존재를 정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레이가 물었다.

“기억입니다.”

“…….”

“설령 그 기억이 환상과 동의어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깨어나지 않는 환상은 행복과 구별될 수 없다.’

무심코 리제의 말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육신 곳곳을 따라 칼자국이 그어지듯 핏빛의 활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피의 책』…….”

“레이 유리스는 ‘검은 공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와 구별될 수 없는 기억을 가진 저는, 어느 의미에서 또 하나의 레이 유리스라고 해도 틀리지 않지요.”

“그럼 진짜 너는 누구지?”

“저 역시 과거의 제가 누구였는지, 잊어버렸습니다. 지금의 저를 정의하는 것은 오로지 ‘피의 책’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데일이 레이 유리스의 그림자를 향했다.

“설령 제 존재가 처음부터 거짓이라 할지라도, 저의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자신을 바쳐 거짓의 저를 되살리셨습니다. 그것이 제가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기억이지요.”

“핏빛공을 말하고 있나.”

“당신에게 있어서도, 하물며 저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까마득할 정도의 과거지요.”

그림자 속에 비치고 있는 진실이 그곳에 있었다. 진실과 구별될 수 없는 거짓, 거짓의 아이, 레이 유리스가 그곳에 있었다.

새로운 황금의 군주.

그의 정체에 대해 짐작이 가는 것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유리스 남매가 그들 일가의 전부일 리도 없었고, 나아가 스칼렛이 잉태하고 있는 ‘진화의 악마’일 가능성도 있으리라.

여전히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진실이나 거짓도, 황금과 그림자도, 그 무엇도.

“그러나 당신에게 닿기에, 이미 당신께서는 너무나도 높은 곳에 올라 있네요.”

레이 유리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찾는 것은 오직 하나다. 너를 죽일 이유도, 싸울 이유도 없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피의 책에 그 아이와 제4제국의 끝이 기록되어 있나?”

“유감스럽게도 이 세계의 누구도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황금과 거짓의 군주, 레이 유리스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 너머에는 그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지요.”

그 말에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데일과 레이 사이에서 빛나고 있는 우주의 색채, 그 너머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무저갱을 바라보며.

“우주의 겨울…….”

데일의 몸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종말의 냉기, 바로 그 힘을 준 존재가 기다리고 있는 곳.

겨울.

일찍이 이 세계를 얼음으로 끝내려 했으며, 데일은 그와 맞서 승리했다.

그리고 바로 그 존재가, 지금 데일이 갈구하는 모종의 해답을 쥐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망설일 여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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