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77화 (277/301)

외전 10화

* * *

그 시각, 제9제국의 황성.

칠흑의 옥좌 위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 헤아릴 수 없는 고대의 다툼 속에서 이 시대에 ‘그림자 군주’의 힘을 손에 넣고 있는 자였다.

아울러 이제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황제. 그리고 황제를 흔들고 있는 바람에는 황금의 색이 깃들어 있었다.

역사는 늘 그렇게 움직였다. 그림자가 이기고, 다시 황금이 이기고, 또다시 그림자가…….

일찍이 이 지긋지긋한 대립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오직 하나의 존재였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 제4제국의 마도 황제.

황금과 그림자, 모두의 힘을 손에 넣고 비로소 흑금의 군주라 일컬어진 남자.

그러나 남자와 그의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 세상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다시 황금과 그림자가 찢어졌고, 늘 그래왔듯 그 끝을 알 수 없는 황금과 그림자의 대립을 거듭할 따름이었다.

일찍이 그림자가 승리했고, 그 그림자는 이제 황금 앞에서 패배를 목전에 두고 있다.

제국의 영토를 5할 이상 빼앗겼고, 마주하고 있는 곳곳에서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패전, 패전, 패전이었다.

하물며 마법이 스러지고 있는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군주들의 힘조차 예전 같지 않다.

바로 그때, 그 남자의 소식이 들려왔다.

홀로 철기대의 마도 갑주병들을 일소하고, 최신 병기로 무장하고 있는 이들을 도륙하고, 그것도 모자라 혁명군의 영토를 수라장으로 바꾸어 놓은 어느 정체불명의 흑마법사.

“그 사실이 정말이더냐.”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하오나 우려스러운 것은 그 흑마법사가 가진 힘,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림자 군주’의 힘이 아닐까 하고…….”

로젠하임 후작이 걱정스러운 듯 말을 덧붙였고, 그 말에 황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히 짐 이외에 ‘그림자 군주’의 이름을 칭왕하는 어리석은 자가 있다는 것이냐!”

“그, 그러나 당장으로서 그 남자의 행동은 우리 제국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나아가 그가 제국이나 폐하의 자리에 대해서는 일말의 흥미도 없는 듯하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로젠하임 후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림자 군주가 소리를 높였다.

“감히 짐의 힘을 사칭하며, 겁도 없이 그림자의 힘을 다루려 하는 자를, 공은 정녕 아무 대책도 없이 보내주었다는 말이더냐!”

“하오나 폐하, 혁명군의 병기에 대해 정보를 준 것 역시 그의 공입니다. 아울러 제가 보기에 그 남자는 제국의 정세에 무엇 하나 알지 못하는 은자(隱者)로……”

그림자 군주, 제국의 황제가 소리를 높였다.

“고작 그깟 이유로 그 남자를 역적 놈들에게 보내주었다는 말이냐!”

“……송구합니다.”

“어리석다, 너무나도 어리석다! 어찌하여 짐의 곁에는 이리도 어리석은 놈들밖에 없는 것이냐!”

그림자 군주, 제국의 황제가 소리쳤다.

로젠하임 후작의 발밑에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저 일방적으로 아이가 억지를 부리듯.

“제국의 황제, 나 ‘브란덴부르크의 빌헬름’이 고하겠다! 당장 최고의 정예들로 병력을 꾸려 놈의 뒤를 쫓아라! 감히 그림자의 이름을 참칭하는 그 자를 절대 살려두지 마라!”

그 말을 듣고 로젠하임 후작은 가슴 깊은 곳에서 조소를 참을 수 없었다. 살려두지 않겠다고? 도대체 이 세상의 어느 누가 그 마법사를 어찌할 수 있다는 것일까.

하물며 이 황제의 이름조차 아까운 머저리, 패배의 천재가 뭐가 잘났다고 소리를 높이는 것일까.

역사는 거듭되고,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고, 그저 같은 어리석음을 거듭하고 있었다.

* * *

황금과 그림자, 그 무엇도 지금의 데일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대의를 위해서도, 진실을 위해서도, 하물며 복수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 떠나는 여정이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가 사랑하는 추억의 자취를 더듬기 위해서.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들을 목도하기 위해서.

진실의 군주조차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향해.

그리고 비로소 그의 여정이 하나의 실마리 앞에 당도했다.

유리스의 그림자를 통해 목격한 제4제국의 유적지,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혁명군이 그 일대를 지키고 있었다.

데일이 올 것을 처음부터 예상했다는 듯이. 그러나 딱히 놀랄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병사, 대포, 머스킷, 그리고 그들 혁명군이 자랑하고 있는 마도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군세가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데일의 등 뒤에서, 유피 역시 겁에 질릴 이유가 없었다.

세상의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고, 설령 이 앞에 있는 군세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닐 테니까.

“황제냐, 혁명이냐.”

바로 그때, 데일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누구를 향해서가 아니었다. 그제야 유피는 그것이 그녀를 향해 묻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대답했다.

“……어느 쪽도 아니에요.”

“황금과 그림자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 말에 데일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유피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데일은 그저 묵묵히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이 세상은 늘 정답을 강요하고 있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그 어느 쪽도 정답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

“세상이 어느 하나의 결정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정말로 정답이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것을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까닭이지요.”

데일이 말했다. 유피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말대로다.

처음 그들이 황제와 혁명을 물었을 때, 그중에서 정답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어느 하나를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물음이었다.

황제를 대답했다는 이유 하나로 유피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나 혁명은 정답이 아니었다. 황제가 정답이 될 수 없듯이.

그저 그것은 세상이 강요하는 결정이었다.

힘없는 자들은 그저 세상이 강요하는 결정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다.

설령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정답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조아리고,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들이 믿고 있는 정답을…… 부정해주실 수 있나요?”

“…….”

그렇기에 유피가 말했다.

그것은 결코 알기 쉬운 복수심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궁금했기에. 아니, 그들이 믿고 있는 정답은 결코 정답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알려주고 싶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제 몫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오롯이 저들의 결정이지요.”

젓고 나서 물었다.

“물러나라.”

마법의 힘을 통해 목소리가 쩌렁쩌렁 증폭되어, 울려 퍼졌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제4제국의 유산을 살피는 것이다.”

데일이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혁명군으로서는, 그들이 지키고 있는 극비를 결코 쉽게 넘겨줄 수 없으리라.

설령 얼마의 희생을 치르더라도.

동시에, 저 멀리서 심지가 타오르며 대포가 굉음을 내질렀다.

쿵!

고작 하나의 남자를 상대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대포와 머스킷 총병들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을 호위하고 있는 마도 갑주병들의 군세까지.

“혁명의 적을 죽여라!”

“쏴라!”

혁명군이 소리쳤다. 혁명을 위해 혁명의 적을 죽이는 것. 그들에게 있어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정답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정답을 거스르는 자들은 ‘혁명의 적’으로 죽어 마땅하리라.

그 사실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무엇 하나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들이야말로 정답을 찾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들이.

“저 역시, 일찍이 저의 행위가 ‘정답’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누구도 감히 ‘제 정답’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으니까요.”

끝없이 대포가 불을 뿜었고, 흡사 공성전을 방불케 하는 규모의 포화가 휘몰아쳤다.

쏟아지는 철구(鐵求)와 흑색 화약 앞에서 그림자의 장벽이 솟아올랐다. 쏟아지는 흑색 화약이, 바로 그 그림자 속으로 덧없이 집어삼켜졌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동시에, 하늘이 찢어졌다.

찢어진 하늘의 틈새로 혁명군을 내려다보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눈동자’들이 있었다.

이계의 틈새, 바로 그곳에서 신들이 끔벅거리며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신이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힘과 정답을 착각합니다. 부모와 아이가 그렇고, 스승과 제자가 그러하며, 왕과 신하가 그러합니다. 저와 저의 여동생이 그러했듯 말입니다.”

“여동생……?”

뜻밖의 말에 유피가 숨을 삼켰다. 여동생이라니, 도무지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늘의 틈새를 통해 신들의 ‘팔’이 쏟아져 내려왔다.

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혁명군을 향해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신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을 싫어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신들은 무척이나 인간들을 좋아했다.

헤아릴 수 없는 촉수들이 지상을 향해 쏟아졌고, 그곳에 있는 인간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갖고 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기준에서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간의 입장에서 조심스러움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콰직, 콰직.

촉수가 무심코 힘을 주자 인간의 육골이 터져나갔고, 신 하나가 깜짝 놀라 촉수를 물렸다. 이미 늦은 뒤였다. 마치 어린아이가 실수로 놀잇감을 부서뜨리듯.

그리고 신이 눈동자를 몇 차례 끔벅거리고 나서, 이내 촉수를 움직였다.

그곳에는 여전히,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인간들이 있었으므로.

사람이 아주 살짝 힘을 주는 것으로 개미의 육골이 터져나가듯, 천공의 틈새를 찢고 지상을 내려다보는 신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힘은 힘입니다. 결코 정답이 될 수 없지요.”

남자가 덤덤히 말했다.

“그러나 저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압도적 힘이야말로 ‘정답’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저의 정답 역시, 저들이 부르짖는 혁명과 다르지 않았지요.”

“…….”

유피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조차 오롯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이 남자가 가진 무저갱의 밑바닥이 너무나 두려웠다.

두려움이 느껴지고 나서, 우습게도 그가 불쌍해서 참을 수 없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데일 아저씨…….”

말없이 남자의 등 뒤에서, 두 팔로 그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고, 이내 팔을 뻗어 유피의 손을 마주 잡았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신들의 유희 속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는 비명을 뒤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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