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71화 (271/301)

외전 4화

* * *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네……?”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철기병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소녀 유피가 나직이 숨을 삼켰다.

“이들의 무장을 보아하니 필시 보통 전력이 아니겠지요. 설령 일개 척후병이라 하더라도 부대의 소식이 끊어졌으니, 상황을 살피기 위해 추격대가 따라붙을 겁니다.”

“그럴 수가…….”

힘없이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서진 마을과 사람들의 사체, 하루아침에 무너진 일상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는 까닭에.

“엄마, 아빠…….”

불과 얼마 전까지 아무 일도 없이 웃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 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는 시체 앞에서, 유피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황제냐, 혁명이냐.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의 어리석은 대답이 가족과 사람들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마음의 준비가 될 경우, 말씀해주십시오.”

흐느끼고 있는 유피를 보며 남자가 덤덤하게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 제 잘못이에요.”

“유피 양의 잘못이 아닙니다.”

자책하듯 중얼거리는 유피의 말에,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들의 잘못이지요.”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였다.

갈 곳 없는 남자와 소녀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 * *

“혁명이다!”

“구체제(Ancien Régime)를 몰아내자!”

밤이 내려앉기 전에 남자와 소녀는 무사히 산을 내려와, 도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밤의 어둠이 내려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낮을 방불케 하는 축제의 열기에 휩싸여 있는 도시였다.

혁명, 그 말에 소녀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로브 차림의 남자가 말없이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말했다.

“배가 고프실 테니, 식사부터 해결하도록 하죠.”

“……네, 아저씨.”

소녀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마을에서 늘 겉돌고 있는 이 남자가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 ‘혁명군’을 자처하는 이들을 상대로 남자가 보여준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설령 유피가 아무리 세상 물정을 알지 못하는 소녀라 해도, 그가 보여준 힘들이 ‘일개 마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임을 직감했다.

태고의 어둠과 종말의 냉기. 유피가 말없이 흘끗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로브 밑으로 드리워진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그저 말없이.

* * *

직후, 남자가 유피를 데려가 준 곳은 허름하기 짝이 없는 목로주점이 아니었다. 호사라고 해봐야 딱딱하게 굳어 있는 흑빵이나 돼지 창자로 빚은 소시지밖에 알지 못하는 유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들이었다.

“여, 여기는……?”

“먹고 싶으신 것들을 마음껏 드십시오.”

도시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식당. 식당 사람들이 의심스럽게 남자의 몰골을 훑자, 이내 그가 품에서 무엇을 내밀었다. 금화였다. 생전 처음 보는 금빛의 이채에, 유피가 숨을 삼켰다.

“아,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나리!”

“그리고 이 소녀를 위해 입힐 아마포 재질의 옷가지를 부탁드립니다.”

남자가 또 하나의 금화를 내밀며 말했고, 식당의 사람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미소 지었다.

어느 날, 이 수상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유피의 마을을 찾았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방자를 순순히 들여보내 줄 정도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순순히 남자를 받아주었고, 남자 역시 마을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수행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남자를 일컬어 ‘괴물 사냥꾼’이라고 말했다. 유피 역시 그 사실을 듣고 납득했다.

그러나 유피 앞에 차려진 이 식사는 결코 일개 괴물 사냥꾼이 지불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순백의 밀가루를 빚은 부드러운 식전 빵과 맑고 깔끔한 고기 수프, 뒤이어 쏟아지는 호사스러운 훈제 요리가 어린 소녀 앞에서 꿈결처럼 펼쳐졌다.

“이, 이렇게 비싼 것들을……”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드십시오.”

직후, 유피는 그녀 앞에 차려진 식사가 남자 나름의 배려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에서는 끼니를 제때 챙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무엇보다 그토록 끔찍하기 그지없는 풍경을 보고 나서 제대로 식욕이 돌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유피는 머뭇거리며 빵을 손에 쥐었다. 솜처럼 푹신하고 부드럽다. 평소 그녀가 알고 있는 돌처럼 딱딱한 흑색 빵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빵을 찢어 입에 넣었다. 신기하게도, 달았다. 빵이 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유피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정말로…… 맛있어요.”

빵 조각을 찢어 음미하듯 맛보고 나서, 유피가 웅얼거렸다. 이내 숟가락을 쥐고서 수프를 떠서 맛보았다. 바싹 말라붙어 있는 목구멍이 따듯해졌다.

그리고 다시 빵을 입에 넣으려다 말고, 목구멍 너머로 차오르는 슬픔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 * *

그날 밤, 악몽을 꾸었다.

그러나 평소의 유피로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푹신한 침대 탓일까, 악몽은 찰나였다. 악몽이 끝나고 나서는 즐거운 꿈이 이어졌다.

꿀처럼 달고 솜처럼 부드러운 빵, 맑고 고운 수프를 먹는 꿈이었다. 즐겁게 식사를 하고 나서는 하늘의 구름처럼 푹신푹신하고 두꺼운 이부자리 위에 마음껏 누울 수 있었다.

공주님의 삶을 사는 것처럼 즐겁고 행복해서, 유피는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유피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 앞에는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이 펼쳐져 있었다.

“……!”

여전히, 유피의 이부자리는 구름처럼 푹신하고 두꺼운 양털 침대였다. 남자가 말하길,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가 도시에서 머물 때 이용하는 저택의 일실이란 듯하다. 그가 어떻게 이런 방을 구할 수 있었는지 유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저녁에 먹은 식사를 떠올렸다. 꿈에서와 같았다. 부드러운 밀가루 빵과 수프. 그럼에도 유피는 무엇 하나 기뻐할 수 없었다.

유리창 너머로 어둑새벽의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부드러운 양털 이불 위에 고개를 파묻고서, 유피가 소리 없이 흐느꼈다.

* * *

“가르시아 소령을 비롯해 휘하 철기대 모두가 전사했습니다.”

그 시각, 일찍이 유피가 나고 자란 산 위의 마을.

일군의 병사들이 그곳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혁명의 기수를 자처하는 이들이었다.

“황제파 놈들의 습격이었느냐?”

“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체의 형태로 미루어 마법사에게 당했음은 의심할 바가 없는 듯합니다.”

“…….”

이상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자가 이들 부대를 절멸시켰는지를 떠나, 그들이 무장하고 있는 마도 갑주가 오롯이 놓여 있었다는 것이 더더욱.

철기대가 무장하고 있는 마도 갑주는 혁명군의 신형 병기로, 철기대를 쓰러뜨리고 나서 절대적으로 빼앗아야 할 전리품과 같다. 그러나 이 부대를 쓰러뜨린 자들은 갑주에 일말의 흥미조차 갖지 않고 떠나갔다.

“대령님! 여기 발자국을 찾았습니다!”

다행히도, 혁명의 적을 뒤쫓을 실마리는 그리 어렵지 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

* * *

이튿날 정오,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는 뜨거운 열기에 비로소 유피 역시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셨습니까.”

“……!”

그리고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기척조차 없이 목소리가 들렸다. 방 바깥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네, 네!”

유피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자, 여느 때처럼 로브 차림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로브 밑으로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가, 무척 어두웠다.

“옷을 갈아입으셨네요.”

남자가 말했다. 어젯밤 남자가 금화를 넘겨주며 따로 산 순백의 아마포 옷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천상의 드레스를 입은 느낌에, 유피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이, 이상하죠?”

“이상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그대로 등을 돌렸다. 바로 그때, 저 멀리서 귀를 찢을 것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서둘러 움직여야 합니다.”

남자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유피를 깨우지 않고 기다린 시점에서, 이미 많이 늦어버린 뒤였으나.

* * *

“혁명의 기수들이다!”

“철기대! 철기대의 행진이다!”

하룻밤 저택의 방을 빌리고 나오자, 도시의 거리를 가득 메우듯 군중들이 붐비고 있었다.

“혁명! 혁명!”

유피에게 있어 악몽처럼 들리는 그 말이 끝없이 울려 퍼졌고, 남자 역시 군중들 속에 섞여 말없이 그 풍경을 지켜보았다.

“……!”

철기대라 불린 기병들이, 일찍이 유피의 마을을 습격했을 때와 같은 갑주 차림으로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발가벗겨져 개처럼 바닥을 기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유피로서는 알 턱이 없었으나, 그 남자는 이 도시의 시장이었다.

“부탁입니다, 나리들!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행진 끝에, 개처럼 땅바닥을 기고 있는 시장이 애걸하듯 입을 열었다.

“저는 결코 혁명을 방해할 생각이 없습니다! 절대 혁명의 적들을 숨기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자랑스러운 철기대의 전사들이 습격당했다. 그 정도의 전력을 일소할 놈들이, 하루아침에 어디로 사라졌겠느냐?”

“저, 저로서는 정말로……!”

혁명군이 보기에, 그것은 무척 합리적이기 그지없는 추측이었다.

“구체제의 개! 죽여라!”

“혁명의 적을 죽여라! 죽여라!”

곳곳에서 군중들이 침을 뱉고 과일 따위를 투척하며 소리를 높였다. 유피가 그 모습에 경악하며 숨을 삼켰고, 남자가 말없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동요하지 마십시오.”

“그, 그래도……”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까?”

바로 그때, 남자가 되물었다.

“네, 네?”

“유피 양에게 그럴 힘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 힘을 이용해 수행하고 싶으신 일이 있습니까?”

그 말에 유피가 숨을 삼켰다.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겠다고 말하듯, 남자의 목소리에는 흡사 악마의 속삭임처럼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

유피는 어린 소녀였다. 그녀에게 있어 혁명군이 무엇을 하는 자들이고 무엇을 바라는 자들이고, 그들의 대의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저들을……”

그저 혁명군을 자처하는 저들이 하루아침에 유피의 전부를 빼앗았다. 그 사실에, 유피가 느껴야 할 감정이란 오직 하나였다.

“용서할 수 없어요.”

“…….”

유피가 속삭였고, 남자가 침묵했다. 유피 역시 달리 무엇을 바라고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랬어야 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바로 그때,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 도로 위로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

남자가 있었다.

도시를 행진하고 있는 혁명의 전사들, 철기대 앞을 홀로 가로막고 있는 남자였다.

“호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철기대를 지휘하는 부르봉 대령이 흥미롭게 미소 지었다.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적 끝에,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공기 속에서 대령이 말했다.

“정체를 밝혀라.”

“혁명의 적.”

남자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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