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66화 (266/301)

266화

* * *

「1. 샬롯」

검은 양의 제국.

그리고 그 제국에 군림하는 황제가 있었다.

그 누구보다 ‘제국’을 증오했으며, 자기 손으로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삶의 전부를 바친 자였다.

작센 황성.

일찍이 신검의 딸이자 랭커스터 대공 가의 가주였으며, 이제는 황제의 아내로 거듭나 있는 샬롯이 말했다.

“그날 네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내 감정을 알 수 있었어.”

데일이 홀로 ‘진짜 인간들의 왕’과 맞서 사해 군도로 떠났을 때, 홀로 남겨진 샬롯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정말로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

“그리고 너는 우리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에서 홀로 괴수들의 군세를 쓰러뜨렸지.”

샬롯이 말했다.

“이 대지를 빼앗으려는 사악한 침략자들을 쓰러뜨리고, 우리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것은 일찍이 청색 마탑주, 리제가 아이들에게 말해준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잔혹한 진실을, 청색의 흑막으로서 포장하고 덧씌운 이야기.

데일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듯, 리제 역시 아이가 아니었다.

“그게 진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

“우리 모두 진실 같은 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래도 너에게 더 이상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

데일이 말했다. 그렇기에 데일은 샬롯에게 진실을 말해주었다.

“적어도 너에게는…….”

“고마워, 데일.”

샬롯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진실을 알지 못하고, 강자들에 의해 덧씌워진 역사를 진실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이, 샬롯으로서는 그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싸운 것들이 정말로 의미가 있을까?”

“……글쎄.”

데일이 말을 흐리며 웃었다. 진실과 그림자의 군주, 그 이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제국과 맞섰다. 그것이 옳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최후에 이르러 그림자 군주는 황금의 추악함을 택했다.

“의미가 있도록 노력해야지.”

“응, 그래야겠지.”

그렇게 말하며 샬롯이 미소 지었다.

“……우리들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2. 앨런」

데일이 남자를 찾았을 때, 그곳에 있는 것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 노쇠해진 남자였다.

“아버지.”

“왔구나, 데일.”

그럼에도 그의 눈동자 속에는 세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와 통찰이 깃들어 있었다. 남자는 여느 때처럼 미소와 함께 아들을 맞아주었다.

“저의 새로운 제국에는……”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앨런의 표정에 일순 희미한 동요가 어렸다.

“아버지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말하지 않았느냐. 나로서는 이 이상 속세의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그럼에도 앨런의 뜻은 확고했다. 그렇기에 데일이 덤덤히 되물었다.

“저의 제국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그럴 뜻은 아니었다.”

은자(隱者)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너의 여동생, 그리고 너의 제국에 충성하는 이들은 이미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지 않으냐.”

“저에게는 여전히 아버지의 지혜가 필요할 따름입니다.”

“더 이상 너는 그 누구의 지혜도 갈구할 필요가 없다.”

“……그날, 저는 이 대지의 진짜 인간들을 몰살시켰습니다.”

데일이 말했다. 그것은 이계의 용사처럼, 이 제국에서도 극히 몇 명밖에 알지 못하는 진실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도 투쟁을 계속하는 황금의 추악함을 이해했지요.”

“나는 너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데일이 싸늘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진실을 말해준 모두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 행동이 틀리지 않았다고.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라고.”

고개를 저으며, 데일이 비로소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나약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저를 바라보는 표정이,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세운 제국을 두려워하고, 저를 두려워하고, 가장 가깝다고 믿은 이들조차 경외(敬畏)의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데일…….”

흐느끼듯이, 동시에 지금껏 쌓여 있는 앙금을 토하듯 데일이 말했다.

“말씀해주십시오, 아버지. 저는 당신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황제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까?”

일찍이 이 대륙에 군림하는 그의 적수를 떠올렸다. 황금의 군주, 아서 대제.

“괴물과 싸우며 어느새 또 하나의 괴물이 되는 것, 그것이 저의 결말입니까?”

“자신을 너무 자책하지 말아라.”

“저는 그저, 그 사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럽습니다. 제가 싸워온 것들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고, 나아가 제가 싸워온 이들과 무엇 하나 다를 바 없는 결말을 맞았다는 것이.”

“어째서 네가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느냐.”

앨런이 되물었다.

“너의 싸움은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 옛 제국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말해줄 수 있는 사실이다.”

그 남자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아들을 긍정해 주었다.

설령 그 아들이 얼마나 끔찍한 괴물의 초상을 갖고 있을지라도 개의치 않고.

「3. 괴수들의 왕」

그날, 출렁거리는 밤바다 위로 헤아릴 수 없는 용오름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 것 같은 풍경 속에서, 괴수들의 왕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괴수들의 왕은 결코 종말을 가져오는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 역시 일방적으로 유린당하는 희생자에 불과했으니까.

“그것이 진짜 네놈의 모습이었나…….”

괴수들의 왕이 조롱했다.

그의 앞에,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존재가 있었다.

일찍이 옛 어둠의 어머니가 그러하듯, 형용할 수 없는 촉수에 몸이 휘감겨져 있는 ‘괴물’이었다.

그 존재 앞에서는 수평을 가득 메우고 있는 괴수들의 군세조차, 일방적으로 짓밟히고 유린당하는 미물에 불과했다.

진짜 괴물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외의 존재들은, 그저 진짜 괴물 앞에서 짓밟히는 사냥감이었다.

“네 모습을 봐라, 이 행성을 침략하고 짓밟고 빼앗는 정복자들의 군주여.”

“…….”

“네놈의 그 추악하기 짝이 없는 모습, 네놈이야말로 진짜 괴수들의 왕이다.”

그러나 그 존재는 더 이상 자신의 진실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곳에 인간의 존재 따위는 없었다.

저마다 ‘인간’을 자처하고 있는 그 존재들 모두, 인간의 존재와는 더없이 거리가 멀고 흉측하기 그지없는 괴물에 불과했으니까.

“그렇담 묻겠다, 진짜 인간을 자처하는 존재여.”

흑금의 군주,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존재가 물었다.

“인간이란 무엇이냐?”

“…….”

괴수들의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진짜 인간이다.”

그러나 흑금의 군주,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존재는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가진 추악함, 이 흉측하기 그지없는 모습, 이것처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의 증거가 어디에 있나?”

괴물이 팔을 뻗었다. 헤아릴 수 없는 촉수들이 퍼져나가며 괴수들을 집어삼켰다. 비명이 울려 퍼졌다.

괴수들을 사냥하는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인간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촉수와 뿔이 달려 있었다.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사냥의 밤이었다.

「4. 세피아」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세피아의 말에, 데일이 당혹스러운 듯 숨을 삼켰다.

“어디로 가시려는 거죠?”

“발이 닿는 어디라도 가겠지.”

세피아가 말했다.

“홀로 떠나시려는 겁니까?”

“…….”

세피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떠나겠느냐?”

침묵 끝에 세피아가 물었다.

“둘이서 말입니까?”

“그래.”

세피아가 대답했다. 뜻밖의 말에 데일이 일순 당황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겠지. 여기는 이제 너의 집이다. 네가 지켜야 할 것들, 그리고 지켜야 할 가족과 나라가 있지.”

“…….”

“걱정하지 말거라. 어디를 가도 청색의 거미줄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세피아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어디에 있어도, 너는 나를 지켜보겠지.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볼 수 있다고 약속해주세요.”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세피아가 말했다. 그 말에 데일은 주저하지 않았다.

“당신을 좋아했어요.”

“그래, 너의 첫사랑이었지.”

세피아가 즐거운 듯 웃었다. 첫사랑. 동시에 그 말이 갖는 거리감에, 데일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샬롯 양을 소중히 대해주거라. 그리고…….”

세피아가 말을 이었다.

“네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그 사실을 잊지 말아다오.”

“제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네요.”

데일이 자조하듯 웃었다. 그러나 세피아는 웃지 않았다.

“너는 네가 믿는 것들을 위해 싸워왔다.”

일말의 웃음기도 없이, 세피아가 말했다.

“그것은 진실이나 거짓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네가 옳다고 믿었기에 싸운 것이다. 네 여정을 부정하지 말아라.”

“세피아 님께서는 여전히 이 세계를 지켜보시겠지요.”

“그렇겠지.”

“훗날, 아주 훗날에…….”

데일이 말을 이었다.

“저의 제국이 스러지고 시대가 저물었을 때, 세피아 님을 보러 갈게요.”

기약조차 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을 입에 담으며.

“그때, 함께 여행을 떠나요.”

“그러자꾸나.”

세피아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미소 짓고 나서는, 슬쩍 그녀의 몸을 기울여 입을 맞추었다. 아주 찰나의 입맞춤이었다.

“다시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될 그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그 말을 끝으로 세피아가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세피아의 등을 보며,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5. 리제」

“어째서 그렇게 괴로워하고 계시나요? 오라버니.”

여동생 리제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데일이 알고 있는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여덟 개의 서클을 가진 천재 마법사, 대륙의 정점에 서 있는 청색 마탑주.

데일이 기억하는 순진한 소녀는 없었다. 그리고 리제는 그녀에게 주어진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수행하는 일들은, 오직 당신의 세상을 더 좋게 하기 위함이에요.”

“그것이 너의 바람이니.”

“오라버니께서 저에게 처음 마법을 가르쳐주셨을 때, 해주신 말을 기억하고 있어요.”

리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는 아직도 제 마법으로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어요.”

“……그러니.”

“때로는 진실을 알지 못하고, 달콤한 거짓 속에서 헤엄치는 것이 나을 때도 있지요.”

“그렇겠지.”

“오라버니가 세운 제국, 그리고 그 제국의 백성들은 모두 행복해질 거예요.”

리제가 말했다.

“그것을 위해 제가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청색의 흑막이 말했고,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저 오라버니께서는 마지막까지 홀로, 이 세상의 잔혹한 진실들을 짊어지고 계시겠지요.”

“…….”

“진실 앞에서 괴로워하고 계시는 오라버니를 볼 때마다, 제 가슴도 찢어질 것 같아요.”

리제가 말했다.

“대답해주세요, 오라버니. 그것은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에요?”

리제가 물었다.

“그럴 가치 따위는 없어.”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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