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65화 (265/301)

265화

* * *

인간들의 왕과 괴수들의 왕이 격돌했다.

진짜 인간을 가리기 위해서, 그리고 패배하는 쪽은 괴수의 이름이 씌워져 역사의 악(惡)으로 거듭날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고, 강함이야말로 정의니까.

이 대지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림자 군주는 기꺼이 황금의 추악함을 받아들이길 마다하지 않았고, 두 여신이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흑금의 군주, 여덟 개의 서클과 그림자 서클을 가속하며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대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마나, 그리고 슈브가 가진 태고의 어둠이 사방으로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그 존재들은 자신들을 ‘인간’이라 지칭하고 있었다.

“아아아악!”

“괴물, 괴물이야!”

이 별의 진정한 지배자, 그 존재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세상의 가장 깊은 곳에서 뭍으로 나와, 사해 군도의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하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을 보듯 끔찍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데일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하고, 나아가 잊을 수 없는 풍경이기도 했다.

굶주린 괴수들이 그들의 먹잇감을 사냥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가 받아가야 할 것이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을 뒤로하고, 괴수들의 왕이 말했다. 휘몰아치는 바다에는 소금 냄새가 서려 있었다.

“너희 침략자들이 빼앗고 앗아가 버린 것들을 되찾기 위한 싸움이지.”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진실을 거부하고 저항하려는 것이냐, 거짓 인간들의 왕이여.”

“…….”

“우리가 진짜 이 별의 인간들이다. 그리고 네놈들은 우리의 별을 침략하는 괴수들에 불과하지.”

“내가 어째서 네놈의 말을 믿어야 하지?”

“네놈 역시 진실을 알고 있지 않나.”

“여기까지 와서 진실이고 거짓이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네놈이 지금까지 그토록 부르짖은 진실 역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나? 진실과 그림자의 군주여.”

진짜 인간들의 왕이 조롱했다.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데일이 손에 넣은 것은 황금의 추악함이었다.

“…….”

흑금의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그에 맞서는 자는 익사공 바르바로사의 껍데기를 덧씌우고 있는 괴수들의 왕이었다.

사방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도륙을 뒤로하고 데일이 팔을 뻗었다.

8서클.

일찍이 대륙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다섯 마법사, 동시에 그들 다섯 명 전부를 합친 이상의 힘이 비로소 고개를 치켜들었다.

후우웅!

어둠이 데일의 육체를 휘감고, 암혈의 갑주를 덧씌웠다.

동시에 대지를 찢고 칠흑의 촉수들이 솟아나 괴수들을 향해 휘감기기 시작했다.

하나, 둘, 바닷속에서 뭍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괴수들을 향해서.

흑금의 군주가 검을 고쳐 잡았다. 동시에 고개를 내렸다.

그의 그림자에,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진실이 거울처럼 비춰지고 있었다.

“……옛 어둠의 어머니.”

어째서 그녀가 인간을 사랑하며,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당신이 우리들의 어머니셨습니까.”

─ 이제야 깨달았구나. 나의 아이, 검은 어린 양아.

다크 영(Dark Young).

데일과 그의 종족들, 이곳에 있는 ‘진짜 인간’들의 말마따나 그들의 존재는 결코 이 땅의 것이 아니었다.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 나는 나의 자식들이, 그리고 나의 씨앗이 멀리 퍼지는 것을 바랄 따름이란다.

옛 어둠의 어머니가 즐거운 듯 대답했다.

그것이 슈브가 데일의 곁에 있는 이유였고, 나아가 그림자 군주가 슈브와 함께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 자, 가서 이 별을 손에 넣거라. 너에게는 마땅히 그럴 자격과 힘이 있다. 나의 검고 어린 양아.

“…….”

옛 어둠의 어머니가 말했고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진실과 거짓을 부르짖으며 싸워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심코 샬롯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앞에서 데일은 진실을 밝히길 주저하지 않았다.

잔혹한 진실이었고, 샬롯과 데일은 더 이상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으리라.

누가 진실로 별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지, 진실과 거짓의 싸움에서 데일이 서 있는 곳은 결국 거짓이었다.

지금까지 그림자 군주가 그렇게 해왔듯, 도망칠 수 없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거짓은 물러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바다 너머에서 끝없이 몸을 일으키고 있는 괴수들의 군세를 주시했다. 진짜 인간들. 그들이 이 대지의 지배자로서 마땅히 가져가야 할 것들을 가져갔을 때, 거짓 인간들이 맞이하게 될 참극을 떠올렸다.

일찍이 이계의 용사가 지키지 못하고 내어준 옛 세계를 떠올렸다.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라.”

거짓 인간들의 군주로서, 마땅히 그가 지켜야 할 이들을 위해 데일이 팔을 뻗었다.

* * *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제4제국’이 시작되었지.”

청색 마탑주 리제가 말했다.

“세상을 빼앗으려는 침략자에 맞서, 나의 오라버니께서는 기꺼이 그들과 싸우셨다. 그리고 승리했지.”

“──역시 황제 폐하세요!”

그 말에, 아이 하나가 그 이름을 외치며 웃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홀로 괴수들을 물리치셨나요?”

“여신의 가호와 마나의 축복 아래, 그의 고결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검을 뽑으셨지.”

아이 하나가 물었고, 리제가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의 대지를 빼앗으려는 괴수들의 군세와 맞서, 최후의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투쟁을 계속했어.”

“──리제.”

바로 그때였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이 일순 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니, 리제.”

리제가 말없이 미소 지었다.

“폐하!”

“삼가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일찍이 청색 마탑주의 밑에서 마도를 갈고닦는 귀족 가의 자식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이 제국의 지배자가 그곳에 있었다.

“맞아요.”

그리고 그의 여동생, 작센 황실의 리제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오라버니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지켜주셨고, 어떻게 침략자들과 맞서 그들을 쓰러뜨렸는지.”

“어린 시절의 이야기야.”

데일, 흑금의 군주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리제가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었을지, 데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저 하나 확실한 것은, 그 이야기가 결코 잔혹한 진실은 아니리란 사실이다.

“오라버니께서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래, 그게 진실이지.”

리제가 말했다. 데일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햇살이 쏟아지는 어느 날, 제국의 황성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 *

흑금의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수평 너머까지,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는 끝없는 괴수들의 군세에 맞서 홀로 맞서고 있는 자였다.

그러나 그의 사냥은 결코 세상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의 세상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검은 어린 양이 비로소 그의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괴수 사냥꾼으로서의 힘, 어느 날 갑자기 깨우친 이형의 능력들, 무엇 하나 이형(異形)이 아니었다.

그것이 처음부터 그들 종족이 가진 진짜 모습이었다.

각성자, 참으로 그 말대로였다.

검은 어린 양이 비로소 그의 어린 시절을 끝마치고 성장했다.

진짜 인간들을 자청하는 괴수들에 맞서, 그들보다 더더욱 괴수 같은 존재로 거듭남으로써.

괴수들이 넘실거리는 밤바다를 향해 흑금의 군주가 팔을 뻗었다.

용오름이 솟아나며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물기둥이, 블랙홀처럼 괴수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지상에 있는 괴수들을 향해 흑금의 군주가 땅을 박찼다.

사냥의 밤이 시작되었다.

* * *

데일이 청색 마탑주의 아래에서 마법을 배우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의 일이었다.

“폐하.”

샬롯 오르하르트, 이제는 제국의 황비(皇妃)이자 작센의 샬롯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부를 것 없다니까.”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폐하.”

데일이 멋쩍은 듯 말하자, 샬롯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더 이상 샬롯은 세상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이 세상에 그림자 군주와 인간의 과거, 나아가 괴수들의 진실을 기억하는 자들은 없다.

일찍이 제3제국에서, 용사의 진실이 그러했듯이.

샬롯은 그중에서 당사자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그녀 역시 침묵을 택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정의를 헤아릴 자격 같은 것은 없었어요.”

그림자 군주의 거짓에 암묵의 동의를 택함으로써.

“우리가 그토록 악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옛 제국조차 마찬가지였지요.”

일찍이 그들이 함께 의기투합하며 맞서 싸운 적을 떠올렸다.

황금의 대제, 그리고 그가 지배하는 거짓의 제국. 그들이 쓰러뜨려야 할 악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말씀을 주의하세요, 황비님.”

샬롯의 말에 일순 리제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청색의 흑막, 모략과 거짓의 마탑을 다스리는 지배자로서.

“됐어, 리제.”

그러나 리제의 말을 가로막는 것은 데일이었다.

“……오라버니.”

“이래서야 우리가 그들과 다를 게 뭐겠니.”

“무엇 하나 다르지 않겠지요.”

샬롯이 자조하듯 대답했다. 다시금 리제의 표정이 얼어붙었고, 아이들은 그녀들의 신경전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제국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제국이 아니야.”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리제의 곁에 있는 아이들을 보며, 덤덤히 말을 잇는다.

“내가 싸우고 세워 올린 것들은 전부, 우리 모두를 위해서니까.”

“폐하의 뜻이 옳습니다.”

리제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 역시 침묵을 지키며 그의 말을 긍정했다.

* * *

“삼가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새로운 제국, 일찍이 작센의 데일이 북부의 작센 공작성에 쌓아 올린 황성이 그곳에 있었다.

황성 너머로는 얼어붙을 것처럼 끝없는 동토가 펼쳐져 있었고, 그러나 누구도 그 추위에 감히 불평을 투덜거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대하며 힘 있는 제국의 심장, 그곳이 작센 황실령이 갖는 또 하나의 이름이었으니까.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가신들이 끝없이 늘어서, 그들의 군주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장엄하며 음울하기 그지없는 고딕 양식의 대회당.

그 끝에 솟은 흑금의 옥좌에, 제국의 황제가 앉아 있었다.

일찍이 작센의 검은 공자였고, 아버지를 이어 칠흑공의 이름을 가진 공작이었으며, 왕들의 감시자를 자청했다.

그 끝에 이르러 결국 남자는 새로운 제국의 지배자로 거듭났다.

세상의 끝에서 이 대지의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영웅으로 거듭남으로써.

그날 사해 군도에서 황제의 손에 구해진 뱃사람들은, 지금도 황제의 활약을 무용담처럼 떠벌리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이 세계를 집어삼키려는 괴수들의 군세였고, 제국의 황제는 홀로 그들과 맞서길 자처하며 기꺼이 세상을 지켰으니까.

그것이 그들의 진실이었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야.

산양의 뿔을 가진 어린 소녀가 사랑스러운 듯 미소 지었고,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무엇 하나.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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