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64화 (264/301)

264화

* * *

익사공이 덧씌운 것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심해 속에서, 익사공 바르바로사가 입을 열었다.

“보아라, 정복자들의 왕이여.”

입을 열 때마다 거품이 흘러나왔으나,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데일 역시 처음 그와 조우했을 때의 풋내기가 아니었다. 태고의 어둠이 그를 뒤덮었고, 육골이 찌부러질 수압과 호흡조차 불가능할 물속에서 그의 세계를 덧씌우고 있었다.

“이곳 세상의 밑바닥에서, 그들이 비로소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익사공이 말했다. 동시에 데일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일말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그 존재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일찍이 이 행성의 옛 세계를 무너뜨린 존재들, 괴수.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금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킬 때, 이 세계는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처음부터 이 별의 지배자는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께서는 그저 되찾아야 할 것들을 되찾을 따름이시지.”

“…….”

“네놈들은 이 별의 해충이다. 자신들의 뜻에 따라 대지를 짓밟고 파괴를 일삼는 무자비한 침략자들이지. 네놈들이 이 대지에 터전을 쌓아 올릴 때마다 별이 신음하며, 그것도 모자라 서로를 죽고 죽이며 그 피로 대지를 물들이는 미치광이들. 그것이 네놈들이다.”

“미치광이 해적의 입에서 그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데일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조소했다.

“때가 되었다.”

바로 그때, 익사공 바르바로사가 입을 열었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존재들이, 세상의 밑바닥에서 절규하기 시작했다.

소름이 등줄기를 훑었다. 동시에 데일이 그곳에서 검을 쥐려 했으나, 그보다 익사공의 손짓이 더 빨랐다.

딛고 있는 세계가 일전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어느덧 사해 군도의 성채였다.

“이것은 정당한 전쟁이다. 너희 역겨운 침략자들로부터 빼앗긴 것들을 되찾는 성전(聖戰)이지.”

콰직!

익사공 바르바로사가, 손에 들려 있는 흑요석 상자를 부서뜨렸다. 동시에 상자가 부서지고 그 속에서 약동하고 있는 심장마저 터져나갔다.

심장이 피를 뿜으며 짓눌렸고, 익사공이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익사공 바르바로사라 불린 남자가 사라지고, 그 존재를 덧씌우고 있는 이형의 존재가 있었다.

“……너는 누구지?”

남자가 웃었다.

“아, 나는 너를 기억하고 있다. 정복자들의 군주여.”

동시에 소름 끼치는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동시에 그의 육체 곳곳에서, 물에 젖은 촉수들이 하나둘씩 솟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피붙이들의 사냥꾼이여.”

“……!”

인간형 괴수. 고도의 지능과 힘을 갖고 괴수들의 무리를 통솔하는 지배자. 그리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저 괴수가 아주 특별하고 이질적이며, 그에 걸맞은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괴수들의 왕…….”

“괴수라고?”

데일의 중얼거림에, 괴수들의 왕이 웃었다.

“너희가 보기에는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있는 모양이구나.”

괴상하기 그지없는 짐승. 그것이 그들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지칭하는 이름, 그리고 네놈들을 지칭하는 이름은 조금 다르지.”

“……네놈들의 이름이 뭐지?”

“우리는 인간이다.”

“……!”

그 말에, 데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우리가 네놈들을 무엇이라 부르고 있는지 알고 있나?”

“글쎄.”

“어느 날 운석이 이 행성에 추락했고, 행성 전체가 소멸의 폭풍에 휩싸였다. 세상의 종말이 찾아왔지. 그리고 우리는 종말을 피해, 세상의 가장 깊은 곳으로 도망쳐 기약 없는 잠에 빠졌다.”

괴수들의 왕, 동시에 인간들의 왕을 자처하는 자가 말했다.

“그 사이, 운석에 기생하고 있는 ‘침입자’들이 이 지상에 뿌리를 내렸다. 지금까지 그랬듯 몇 개나 되는 별들을 파괴하고 그 위에 자신들의 존재를 덧씌웠으며, 별의 생명을 모조리 빨아먹고 나서는 결국 같은 행동을 거주하는 외계의 메뚜기 떼들이었지.”

“그게 우리 인간이라고……?”

“인간? 웃기지 마라.”

비로소 익사공의 모습을 빌린 존재가 감정을 드러냈다.

“네놈들이 진짜 괴수(怪獸)다.”

괴이하기 그지없는 짐승. 남자의 말에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덧 거기에 물에 젖은 생쥐 꼴의 남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몸에서 솟아나는 헤아릴 수 없는 촉수들이 갑각의 형태를 덧씌웠고, 비로소 데일이 알고 있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우주 전체를 통틀어 네놈들처럼 구역질이 나는 기생충들은 또다시 없을 거다.”

괴수들의 왕, 동시에 ‘진짜 인간’을 자처하는 존재가 말했다.

“나는 괴수들로부터, 우리 인간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그렇겠지, 정복자들의 군주. 그리고 최강의 ‘인간 사냥꾼’이여.”

“…….”

그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는 호칭에, 데일이 실소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일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세계 속에서, 이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졌다.

“나는 여전히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슈브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최후의 최후까지 인간으로 남겠다는 결의.

“우리에게 정의가 없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데일이 말했다.

“생존에 선악은 없으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괴수들의 왕이자 인간들의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힘 있는 자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의 터전을 빼앗고 짓밟는 행위가, 정녕 악(惡)이 아니란 것이냐? 네놈들의 파괴에 짓밟히고 신음하는 동족들의 고통을 보고도, 그 행위를 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뺏고 빼앗기는 자 모두가, 정녕 선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설령 그게 악이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렇겠지, 정복자들의 왕이여. 너 역시 다를 바 없다.”

“무엇이 말이지?”

“네놈이 악이라 규정하고 무너뜨린 괴수들의 제국. 그들 역시 너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

“……!”

“힘을 가진 자야말로 정의이며, 힘 있는 자는 그렇지 않은 자들의 전부를 빼앗을 수 있다. 지금 네놈의 주장이 그들과 뭐가 다르다는 거지?”

자신이 악이라 믿고 쓰러뜨린 제국, 그리고 그들의 대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곳에서 데일이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힘의 정의를 숭상하며, 생존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의하는 정복자들의 왕이 그곳이 있었다.

“……그것이 진짜 진실이었나.”

진실과 그림자의 군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인간들의 왕이자 괴수들의 왕, 그리고 정복자들의 왕이 그의 검을 고쳐 잡았다.

등 뒤에서 슈브의 광소가 울려 퍼졌다.

“이제야 비로소 네놈들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그에 맞서, 괴수들의 왕이자 인간들의 왕이 조롱을 내뱉었다.

* * *

“괴수들은 정말로 나빠요!”

이야기 도중 어린아이 하나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쏟아지는 햇살이 무척 밝았다.

“어째서 우리 인간들의 터전을 짓밟고 빼앗으려는 거죠?”

“그러게나 말이란다.”

그 말에 청색 마탑주이자 그림자 군주의 여동생, 리제가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내 오라버니이자 인간들의 왕께서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그 존재들과 맞섰지.”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거기에 진실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역사와 진실이란 늘 승자들의 입맛대로 덧씌워지는 법이니까.

“우리의 행성과 터전을 짓밟으려는 사악한 정복자들에 맞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기로 하신 거야.”

그곳에 있는 것은 승리자들이었다.

아울러 승리자들의 대지 위에는, 오직 하나의 제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에는 달리 이름이 없었다.

이 지상 대륙에 유일무이한 국가이며, 그렇기에 보통의 명사가 아니란 이유에서.

그저 과거에 사멸한 제국들과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제4제국’이란 호칭을 쓸 뿐.

* * *

지금까지 자신이 믿은 정의가 모조리 무너져 내렸다. 처음부터 그림자 군주는 정의로운 자들의 구세주가 아니었다.

제국이 주장하는 힘의 정의, 힘 있는 자는 전부를 가지고 그렇지 못하는 자는 전부를 잃는다. 그렇기에 오직 이 세상의 정의는 하나다.

강자존(强者存).

어느 세계라도 다를 것은 없었다. 과거의 세계가 그러했고 지금의 세계가 그러하며, 미래의 세계조차 그러하리라.

그림자 군주는 그저 그들 중에서 가장 강대하며 힘을 가진 자였다.

그렇기에 정의를 자처할 수 있었다. 힘이 있었으니까. 그게 다였다. 딱히 그림자 군주가 정의를 자처할 수 있는 이유는 도덕적 고결함이나 무엇도 아니고, 그저 힘이 있는 까닭이었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는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다.”

데일이 말했다.

“설령 그것이 너희들의 전부를 빼앗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말에 괴수들의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지진이 몰아치는 것처럼 일대의 대지가 요동치고 있었다.

어느덧 사해 군도 전체를 집어삼킬 것 같은 폭풍 속에서, 성채가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린 성채 위로 비로소 바깥 세상이 드러났다.

흡사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 것 같은 풍경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진짜 인간’들이, 군도의 인간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데일이 보기에는 그저 괴수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과거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의 같은 것은 알 바 아니다. 설령 그것이 악이라 할지라도 개의치 않았다.

일곱 개의 서클과 그림자 서클이 가속에 가속을 거듭했다.

그의 앞에 있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진실과 조우하며, 그야말로 터질 것처럼 맹렬하게.

지금까지 그러했듯 그것은 그럴싸한 깨달음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마지막 진실의 조각을 맞추고 나서, 데일에게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다.

콰직!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 제가 당신과 함께하고 있어요.

바로 그때, 실체 없는 손길이 데일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노아…….”

사람을 사랑하는 자애와 자비의 여신이, 그의 팔에 손을 덧대고 있었다.

─ 나도 여기 있어, 오빠!

어린 슈브가 질 수 없다는 듯 데일의 곁에서 웃었다.

말 그대로 두 여신이 그곳에 있었다. 정복자들의 군주를 축복하며, 대기 중의 마나와 태고의 어둠이 데일의 심장과 그 그림자에 덧씌워졌다.

두 여신의 힘이 비로소 데일에게 깃들고 있었다.

빛과 어둠, 황금과 그림자, 진실과 거짓. 이제 데일에게 있어 그것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림자 군주이자, 동시에 황금의 추악함이 깃들어 있는 존재.

흑금(黑金)의 군주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심장에서 가속하는 여덟 개의 서클, 그리고 여덟 개의 그림자 서클과 함께.

그것은 세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세상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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